< 헬꼴라시코(4) >
[8이닝 무실점 김성민!! 하지만 이번에도 불안했던 뒷문?]
[불꽃 튀는 1위 다툼!! 부산 마린스 또다시 0.5게임 차 추격!!]
-8회까지 명품 경기. 그리고 9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헬꼴라시코 클라스.-
-아니, 사직에는 무슨 수맥이라도 흐르나?-
-수맥은 무슨, 선수단 갸들이 그냥 걸어 다니는 수맥이여.-
-마지막까지 경기를 재밌게 보라는 마린스의 투철한 서비스 정신!!-
-그 서비스 사양하고 싶다.-
기사의 댓글을 바라보며 성민이 투덜댔다.
“아, 얘들은 4:2로 무난하게 이겼는데도 또 이러네.”
-크흠, 거 솔직히 말해서 무난은 아니었지.
“아니 그 정도면 무난이죠.”
-너 마린스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무난의 기준이 좀?
***
바로 어제 9회 초.
사직의 관중들이 흥분했다.
“저 시부럴 놈의 새끼들이?”
[9회 초, 투아웃 주자 1루 상황!! 도밍고 산체스!!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갔습니다!!]
[9회 초, 도밍고 산체스의 2점 홈런. 엘리츠, 역시 쉽게 경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마린스 이 새끼들 하여간 쉽게 이길 생각이 없다니까. 아니 4점밖에 차이 안 나는데 왜 원직이가 아니라 성종인 건데? 그 돈만 많이 받아먹는 늙다리 퇴물을!!”
덕아웃 구석에서 오른팔에 얼음을 두르고 마음껏 에어컨 바람을 쐬던 성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오, 내가 이래서 9회까지 올라갔어야 하는 건데.’
-감독이 미치지 않고서야 너를 9회까지 올리는 건 말도 안 되지.
‘왜요? 8회에 안타 두 개 맞았다고? 솔직히 그래도 내가 지금 쟤보단 잘 던질 것 같은데.’
-투구 수를 생각해야지. 하여간 뭐 나도 현역 때 그러긴 했지만, 선발 놈들 마운드 욕심은 하여간.
다행스럽게도 이어지는 타자를 땅볼로 잡아내며 경기는 끝났다.
4:2 승리.
그리고 하루가 지나 오늘 토요일.
8월의 혹서기에 맞춰 저녁 6시에 경기가 시작됐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2선발로 밀려난 닉 해리슨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여전히 적응되지는 않는 끈적한 더위가 그의 몸을 불쾌하게 했다.
“젠장.”
토요일, 어쩌면 1위를 탈환할지도 모르는 경기답게 경기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8월 말에 들어섰음에도 154km/h에 달하는 속구가 연달아 존을 공략했다.
-뻐엉!!
“스트라잌!!”
이어지는 143.7km/h의 슬라이더. 그리고 마지막 131km/h의 체인지업까지.
“스트라잌!! 아웃!!”
[선두 타자 헛스윙 삼진!! 닉 해리슨 선수 공 다섯 개로 엘리츠의 선두타자 박효경을 잡아냈습니다.]
[닉 해리슨 정말 대단한 공입니다. 마지막 공이 체인지업인데 구속이 131km/h란 말이죠. 이 정도면 메이저에서도 수준급의 구속이에요.]
[컨트롤이 좀 약점으로 지적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오늘 박효경 선수를 상대로는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어제 비록 마지막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헬꼴라시코 소리까지는 나오지 않을 경기를 지켜봤던 사직의 팬들이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최소한 김성민이랑 닉 해리슨 경기 정도는 믿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마린스와 엘리츠의 2차전을 응원했다.
그리고 1회 초 닉 해리슨이 그 기쁜 마음에 부응했다.
K.K.K
마운드의 닉 해리슨이 포효했다.
그리고 1회 말.
어제만큼은 아니었다.
안타와 진루타, 적시 이루타, 외야 플라이, 그리고 적시 안타와 삼진.
마린스가 2점을 뽑아냈다.
-느낌이 괜찮군.
‘그렇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제보다 느낌이 더 괜찮아요.’
-당연하지. 마린스의 법칙. 1회에 대량 득점을 올리면 동점이 되기 전까지는 추가점이 나오기 힘들다.
‘영감님 마음대로 그딴 이상한 법칙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경기가 계속됐다.
2회, 3회.
닉 해리슨은 좋은 투수였다. 괜히 공 감독이 인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끌고 가는 선수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 보여주는 모습은 그 이상이었다.
3회까지 삼진만 무려 여섯 개.
엘리츠의 타자들이 그의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3회 말.
-딱!!
[쳤습니다!! 박동엽!! 높게 뜬 타구!!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갑니다!! 박동엽 시즌 19호 홈런!!]
[박동엽, 박동엽 선수의 쓰리 런!! 여름 들어 홈런 페이스가 조금 주춤했던 박동엽 선수. 11경기만의 홈런입니다!!]
[마린스 오늘 정말 대단한데요? 이번 이닝에만 벌써 6점을 뽑아냈어요. 기세를 탔습니다.]
마린스의 선수들이 우르르 홈플레이트로 몰려나가 동엽의 머리를 두들겼다. 그리고 그 중에는 성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8:0
필 니크로가 중얼거렸다.
-3회에 대량 득점이라. 조금 불안하군.
‘아까는 추가점이 나오기 힘들거라더니, 이번엔 추가점이 나오니까 또 불안합니까?’
-그래,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다. 그런데 솔직히 너도 불안하잖냐.
성민이 답하지 못했다.
엘리츠가 투수를 교체했다.
안타, 그리고 병살타.
닉 해리슨이 여전히 엘리츠를 잘 틀어막았다.
4회, 그리고 5회가 지났다.
그 사이 엘리츠는 투수를 또 한 번 교체했다. 실점은 없었다.
6회 초.
-뻐엉!!
[닉 해리슨 9구째!! 살짝 빠지는 공. 심판 손 올라오지 않습니다. 박효경. 결국 1루로 걸어나갑니다.]
[볼을 정말 잘 골라냈습니다. 풀카운트에서 파울만 두 개를 치고 결국 걸어나가다뇨. 닉 해리슨 선수 입장에서 보면 이건 차라리 초구에 안타를 맞은 것보다 더 피곤한 일일 겁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30도를 웃도는 기온.
심지어 오늘은 어제보다 30분이나 일찍 경기를 시작했다.
닉 해리슨이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았다.
‘시발 이게 볼이라고?’
안그래도 높은 불쾌지수. 심판의 판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참았다. 괜히 심판한테 대들어서 좋을 건 없다. 특히 용병 투수라면 더 그렇다.
닉 해리슨이 두 번째 타자를 상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필 니크로의 불안이 현실로 나타났다.
-뻐엉!!!
[심판 손 올라오지 않습니다. 두 타자 연속 볼넷!! 노아웃에 주자 1, 2루가 됐습니다.]
“뭐? 시발 이게 볼이라고?”
마운드의 닉 해리슨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시발 그러면 어디 이것도 볼을 주나 한번 보자.”
그리고 그것이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딱!!
복판으로 몰린 공이 우측 외야로 날아갔다. 김호섭이 달렸지만 늦었다. 1루와 2루 주자를 모조리 불러들이는 적시 2루타.
경기가 흘러갔다.
오후 10시 47분.
경기가 시작된 지 이미 4시간 47분이 지났다.
필 니크로가 탄식했다.
-그래, 성민이 네 말이 옳았다. 네가 등판했던 경기 정도면 충분히 무난한 경기였어.
성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장 11회 초. 1사 주자 2루.
점수는 14:14. 양 팀 모두 투수 교체만 다섯 번. 대타 카드 역시 모조리 사용했다.
수비 위치 역시 이상했다. 이루수인 김정엽이 유격수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엘리츠의 용병 타자 도밍고 산체스가 김성종의 공을 잡아당겼다. 2, 3루 간으로 흐르는 빠른 타구.
김정엽이 몸을 날렸다.
이루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완벽한 수비. 글러브에 든 공을 그대로 3루로. 그리고 3루에서 다시 1루로.
병살타.
분명 8회까지만 하더라도 펑펑 점수를 내던 두 팀 모두 점수가 나지 않았다. 쓸데없이 자기 포지션도 아닌 곳에 서 있던 선수가 호수비를 했다.
연장 12회.
시간은 11시 13분. 무려 다섯 시간 하고도 13분.
“그래, 내가 오늘 이 졸전의 끝을 꼭 보고 만다.”
가족 단위로 온 팬들은 이미 떠난 경기장.
마침내 경기가 끝났다.
[마린스, 엘리츠 2차전. 14:14 연장 12회 무승부!!]
[피 튀겼던 치열한 혈전. 1위까지 반 경기 남았던 마린스에게는 아쉬운 무승부.]
-오늘 이렇게 또 한 번 완벽한 헬꼴라시코가 이뤄졌다.-
-내가 세어봤는데 헬꼴라시코의 조건 대부분을 충족했다. 이 정도면 빼박 A급 헬꼴라시코다.-
-경기 초반 대량 득점, 그걸 따라감, 동점 만듬, 동점 되면 점수가 안 남, 핸드볼 스코어. 잘 던지던 투수 털림. 어우, 충족시킨 조건 세다가 내가 혈압 올라서 돌아가시겠다.-
-아니, 왜 우린 잘하다가 엘리츠만 만나면 꼭 이럼? 솔직히 올 해 우리 좀 괜찮았잖아.-
-괜찮기는 개뿔. 어제도 솔직히 성민이 아니었으면 헬꼴라시코 됐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걸.-
-닉 해리슨은 좋은 투수다. 하지만 아직 마린스를 이길 정도는 아니야.-
-에이, 어제는 에러도 하나 밖에 없었잖아. 경기력도 눈 썩는 수준은 아니었고.-
-8회 이후로 주자 2루 득점권에서 병살이랑 외야 플라이가 몇 개였는지나 아냐? 저게 눈이 안 썩는다고?-
***
“허, 이 정도로까지? 기껏해야 KBO의 투수잖아.”
안경을 쓰고 체크셔츠를 입은 늙은 전력분석관의 코웃음에 똑같은 복장을 한 젊은 인도인이 반박했다.
“하지만 KBO에서 25경기 21승 ERA는 0.82를 기록 중인 투수죠.”
“그래 봐야 KBO야. 게다가 FIP은 1.49나 되지.”
“영감님, 대체 몇 년도를 살고 계신 겁니까? 2032년에 FIP이라뇨. 그리고 그쪽은 리그가 달라서 계수도 좀 조정해야 하는 거 뻔히 아시잖아요. 거기다가 그 친구 너클볼럽니다. BABIP에 가장 큰 아웃 라이너요.”
“그래, 좋아. 좋다고. 그런 거 다 옳다 치자. 그래서 그 녀석 데이븐포트 변환식으로 변환한 값이 얼만지는 알고 있지?”
데이븐포트 변환식이면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리그 간 격차에 관한 변환식이다. 그 식에 따르자면 작년을 기준으로 할 때 차이는 평균적인 MLB의 투수가 0.5의 기대승률 값을 갖는다면 평균적인 KBO의 투수가 MLB에 진출했을 때 기대승률 값은 0.31에 불과하다.
“이러니까 영감님이 구닥다리 소리 듣는 겁니다. 데이븐포트라뇨. 물론 그거 옛날에는 공신력이 있었죠. 근데 최근에 KBO에서 MLB로 온 투수가 없잖습니까. 덕분에 40인 로스터 언저리에 있던 선수들이 KBO 가서 나온 성적만 갖고 만든 반쪽짜리 수식이잖아요. 게다가 요즘 누가 그런 변환식을 굳이 씁니까. 어차피 스탯캐스트 데이터 보면 대충 답이 나오는데요.”
“그래봐야 그쪽에서 보낸 데이터야. 혹시 알아? 손이라도 댔을지. 다 믿어주기는 힘들지. 게다가 그 선수 재작년에 수술을 했는데 지금 벌써 165이닝을 뛰었어. 요즘 거기 돌아가는 꼴 보면 포스트시즌까지 해서 거의 200이닝을 넘게 뛸 것 같은데, 내구성도 의문이지. 2013년에 양키스에서 NPB 무패 투수였던 다나카 마사히로 영입했던 거 기억나지? 그거 결과가 어땠어? 또, KBO 투수 평균이 NPB보다 한참 못 한 것도 생각해야지. 그러니까 지금은 차라리 잭 월쳐 쪽이 훨씬 좋은 플랜이야.”
“잭 월쳐요? 와우, 영감님 농담도 심하시네요. 그리고 다나카 마사히로면 양호했죠. 솔직히 양키에서 그 돈 받고 그만큼 던져줬으면 땡큐 아닙니까?”
“내가 성적만 이야기하는 것 같아? 기대했던 성적과 실제 성적의 괴리를 말하는 거잖아. 게다가 뛰는 내내 팔꿈치에 폭탄을 안고 있었던 걸 생각해야지.”
“좋습니다. 좋아요. 제가 백번 양보하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잭 월쳐랑 비교하는 건 좀 아니죠.”
“그래서 베일런이랑 비교는 옳고?”
“진짜 이 친구 베일런 만큼 해낼 친구라니까요?”
두 사람의 다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상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가 책상을 탕탕 두들겼다.
“자 정리를 해보자면 게일 자네 말은 건강, 그리고 리그의 수준 차에 대한 걱정이고, 산자이 자네 말은 그럼에도 잭 월쳐보다는 김의 예상 성적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잖나.”
그의 이야기에 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그만!! 알겠네. 일단 한국에는 스카우트 팀의 빌리를 파견하도록 하지. 그리고 두 사람 의견은 따로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8월의 끄트머리.
순위 경쟁이 얼추 끝난 것은 한국만이 아니었다.
이미 끝나버린 2032년.
내년을 준비하는 빅리그의 구단들이 한 걸음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헬꼴라시코(4) > 끝
ⓒ 묘엽
작가의 말
클라루스님 추천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