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꼴라시코(3) >
해는 이미 저물었다. 하지만 기온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6회 초.
마운드 위는 여전히 찜통 같았다.
타석에 선두 타자로 9번 타자가 들어왔다.
존을 공략하는 공격적인 피칭.
-딱!!
초구에 타자의 방망이가 튀어나왔다. 낮게 깔린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선 하나.’
-나쁘지 않군.
‘말했잖아요. 오늘 애들 집중력 괜찮다고.’
-박동엽이랑 김정엽. 저 엽씨 형제는 항상 집중력은 괜찮던 애들이었어. 대신 실력 자체가 문제였지.
‘쟤들도 벌써 1군에서 5개월을 굴렀습니다. 사직에서만 50경기 넘게 뛰었고요. 재능은 그렇게 나쁘지 않던 애들입니다. 이제 슬슬 적응할 때도 됐죠.’
-그보다 이제 상위타선으로 세 번째 타순이다. 조심해.
‘그래봐야 엘리츠라고 하면 또 방심하지 말라고 화내실 거죠?’
-잘 알면서 묻기는. 자신감과 자만은 구분할 줄 알아야지.
타석에 1번 타자 박효경이 들어왔다.
첫 번째 타석 삼구삼진. 두 번째 타석 내야안타. 그리고 세 번째 타석이었다.
그가 마운드의 성민을 힐끔 살폈다.
6회 초, 고작 공을 하나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자를 벗어 땀을 닦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쳤겠지?’
당연하다. 8월 말 30도를 오가는 높은 기온 속에서 지금까지 71개의 공을 뿌렸다. 게다가 성민은 지금까지 등판을 거른 적이 없었다. 물론 월요일에 야구를 하지 않고, 5선발 로테이션을 돌리는 환경인 만큼 어지간하면 6일 휴식이 주어지긴 했다.
또한, 잘 던지는 투수라곤 하지만, 외국인 용병들처럼 1년 쓰고 말 선수처럼 7이닝, 8이닝을 기본으로 던지게 하는 미친 짓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8월이다. 시즌 초와 비교하면 체력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
이제 문제는 과연 얼마나 지쳤을까 하는 점이다.
초구.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흔들리며 날아드는 공.
박효경이 끝까지 공을 지켜봤다.
-뻐엉!!
“스트라잌!!”
성민의 너클볼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그 흔들림은 예측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쳤군.’
115.1km/h
공이 느려졌다.
손끝의 감각으로 회전은 억제했지만, 근력 자체가 떨어졌다.
구속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팔의 스윙. 그리고 이 스윙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관절의 움직임이고, 그 관절을 움직이는 두 가지 요소는 근력과 유연성이다.
무더위 속에서 71구.
김성민은 분명 지쳤다.
박효경이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마운드 위, 성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폼은 여전히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하나, 두울, -딱!!
속구다.
하지만 1회와는 달랐다. 박효경이 내민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건드렸다.
높게 뜬 타구.
1루의 현정현이 빠르게 달렸다.
[현정현 선수, 따라가 봅니다만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네요. 파울입니다.]
-쳇, 알루였으면 이건 아웃이었어.
‘그게 누군데요?’
-내가 애틀랜타에서 처음 올스타에 선정됐을 때 우리 팀 일루수.
‘어휴, 난 또 누구라고. 아니 정현이 형이 좀 못 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빅리거랑 비교해서 비난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솔직히 방금 저 타구는 KBO 일루수 대부분이 못 잡을 타구였어요.’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44km/h
느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KBO를 기준으로는 충분히 빠른 공이었다.
[시즌 막판 6회 초임에도 불구하고 144km/h라니 역시 김성민 선수 대단합니다.]
[이번 시즌 김성민 선수의 속구 평속만 따지면 146.4km/h로 김준성 선수의 148.2km/h에 이어 토종 투수 가운데서는 두 번째입니다.]
[자 김성민. 세 번째 공을 준비합니다.]
볼카운트 0-2
박효경이 어떻게든 공을 걷어내겠다는 자세로 눈을 빛냈다.
-어떻게든 공을 걷어내겠다. 이거 너무 뻔한거 아니야?
‘효경이 정도면 뻔해도 되는 타자죠.’
-하긴, 밖으로 빠지는 공도 잘 보고, 힘이 부족해서 그렇지 걷어내긴 또 잘 걷어내는 타자지.
혁준의 싸인에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지금 느린 너클볼은 좀 아니지. 역시 너도 안쪽 코스 빠른 공 생각했지?’
-아뇨.
‘그러면?’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방망이를 움켜 쥔 효경이 성민의 동작을 살폈다. 그의 약점은 몸쪽 빠른 공이다. 보통 투수라면 빠지는 공으로 유혹해볼 수도 있지만, 성민은 조금 과감한 투수다. 지금 상황에서 얼마든지 몸쪽을 공략할 수 있다.
효경이 성민의 공을 대비했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방망이를!! 방망이를?
-부웅!!!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공이었다.
성민의 느린 너클볼 구속은 100km/h 내외.
일반적으로 투수가 던진 공이 직선이라고 할 만한 궤도로 날아오는 최저의 구속이다.
하지만 지금 성민이 던진 공은 아예 그 종류가 달랐다.
[맙소사!! 이퓨스, 김성민 선수 여기서 이퓨스를 던지네요.]
이퓨스, 일명 아리랑볼.
예상하고 있다면 100이면 100 배팅볼이 될 수밖에 없는 공이다. 하지만 배팅은 타이밍이며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작업이라는 말이 있듯이, 150에 가까운 빠른 공을 대비하고 있던 타자에게 67km/h의 이퓨스는 마구다.
“스트라잌!! 아웃!!”
박효경이 아쉬움에 바닥을 걷어찼다.
그리고 이어지는 타자를 상대로 우익수 방면 외야 플라이.
경기가 계속됐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성민이 바로 직전 공수교대에 갈아입었던 언더셔츠를 벗었다. 고작 1이닝. 3명의 타자를 상대했음에도 언더셔츠가 축축하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새 셔츠로 갈아입었다.
-흠, 확실히 야수 놈들 네 경기라고 신경을 쓰기는 쓰는구나. 하긴 아무리 놈들이라도 지금 실책을 범하면 어떤 욕을 들어먹을지 알 테니 당연히 이기고 있다고 방심할 순 없겠지.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야 네가 마운드에 있으니 긴장하고 경기를 한다지만, 너 내려가고 8회 9회까지 이기고 있으면 어떨까? 이 더위에. 이 자식들이 제대로 할까? 게다가 헬꼴라시코의 법칙 너도 알지? 불펜 올라오면 백프로 털릴거다.
‘뭔 소리에요. 헬꼴라시코 법칙대로라면 진작에 우리 점수 내줘서 동점 되고 이제 연장 12회까지 점수 안 나야 하는 타이밍이거든요?’
성민이 자신의 가방을 살폈다.
아직 뽀송한 언더셔츠는 세 장이나 남아있다.
-쳇, 쓸데없이 헬꼴라시코의 법칙을 잘 알고 있군.
‘매일 들어먹는 욕이 그건데, 저도 당연히 찾아봤죠.’
-그래서 이제 경기 터져도 헬꼴라시코 소리는 안들을 수 있으니 안심이 되냐?
‘되겠습니까?’
마운드.
2회 말부터 올라왔던 박진명이 숨을 몰아쉬었다.
덥다.
그리고 힘들다.
주자는 1루.
하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좋다. 그의 공을 두들기는 타자는 있었지만, 점수는 나지 않는다. 왠지 오늘은 이대로 완벽하게 상대방을 틀어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31km/h의 슬라이더가 존을 공략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박동엽 저 개새끼.-
-여기서 또 헛스윙 삼진?-
-야, 진정해. 그래도 병살타 아닌 게 어디냐.-
-우리 지금 아직 4:0으로 이기고 있어.-
-나도 알아. 근데 여기 사직이고 상대는 엘리츠고 아직 6회 말이잖아. 10점 차이나도 불안한데 꼴랑 4점 차이니까 그렇지.-
-4점이면 널널하지 성민이가 점수 주겠냐?-
-성민이야 점수 안 주지. 근데 너는 불펜 개놈 새끼들을 믿냐? 그리고 원직이는 어제도 던졌잖아. 얘도 연투하는 날은 불안하다고.-
-아, 시발 방금 병살타 아닌 게 어디냐고 했던 놈 나와라. 말이 씨가 됐잖아!!-
-아니, 박진명 저 똥볼러를 상대로 왜 점수를 못 냄? 안타 계속 쳤잖아. 근데 왜 점수가 안나냐고.-
-킁킁. 이 냄새 혹시 나만 나냐?-
-어, 너만 나는 거다. 오늘 경기 절대 그거 아니야. 말하지 마라. 부정 탄다.-
-헬.꼴.라.시.코.-
성민이 글러브를 챙겨 다시 마운드로 올라왔다.
공 감독이 강 용구 수석 코치를 불렀다
“불펜 준비하고 있지?”
“네, 준비 시켰습니다.”
“일단 이번 이닝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선두 타자를 상대로 5구째 중견수인 맷 데이비스 정면 외야 플라이.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다행이다.
‘뭐가요?’
-타구가 맷 데이비스 쪽으로 간 게 다행이라고. 호섭이 쪽으로 갔어봐라. 이거 이루타다.
‘우리 호섭이 형도 이 정도 타구는 잡거든요?’
-양심이 있으면 다시 말해 봐.
‘우리 호섭이 형도 컨디션 좋은 날에는 이 정도 타구는 잡습니다.’
-그래도 양심이 완전 썩지는 않았네.
두 번째, 도밍고 산체스가 타석에 들어왔다.
앞선 타석에서는 두 타석 연속 삼진.
하지만 제대로 맞추기만 하면 넘길 힘이 있는 타자다. 그런 타자를 상대로 방심은 금물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초구 느린 너클볼.
그리고 이어지는 바깥쪽 코스 빠른 공.
-뻐엉
조금 많이 빠졌다.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아!!”
성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모자를 고쳐 썼다.
-어필 잘하네.
‘당연하죠. 저도 이 바닥 10년 찹니다.’
물론 심판도 알고, 타자도 알고,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도 알고 하물며 성민 본인도 어림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판에게는 충분한 압박이다.
20승 무패.
KBO 역사상 최초의 무패 투수.
6.2이닝 무실점.
조금이라도 투수에게 불리한 판정으로 기록을 깨버린다면 나중에 어떤 욕이 날아올지 모른다.
세 번째.
마찬가지로 바깥쪽 빠른 공.
-뻐엉!!
아주 조금 더 들어온 공이다.
“스트라잌!!!”
도밍고 산체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 본다.
“굿 볼!!!”
그러거나 말거나 혁준이 큰 소리로 공을 칭찬하며 성민에게 다시 공을 던졌다. 심판을 바라보던 도밍고 산체스의 시선이 혁준에게 꽂혔다.
이게 진짜 굿볼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눈빛이다.
혁준이 뻔뻔하게 그를 마주 봤다. 방망이를 쥔 도밍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가 타석에서 네 번째 공을 준비했다.
네 번째.
바깥으로 빠지는 공.
하지만 조금 전 그와 비슷한 느낌의 공에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왔다. 방망이가 안 나갈 수 없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성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 봐요. 내가 내 슬라이더 쓸만하다고 했잖아요.’
-이게 슬라이더 덕분이냐? 심판이 떠먹여준거지.
애초에 존 밖에서 시작해 더 먼 곳으로 날아가는 슬라이더가 도밍고 산체스에게 삼진을 뺏었다.
원하는 대로 경기가 풀린 탓일까?
세 번째 타자 역시 기분 좋게 내야 뜬공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성민아 수고했다.”
“네?”
돌아온 덕아웃.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 강용구 코치에게 성민이 되물었다.
“코치님. 저 너클볼러잖아요. 그리고 오늘 느낌 진짜 죽여줘요.”
“성민아, 너 재작년에 수술했다.”
“지난달에 찍었던 MRI 결과 보셨잖아요. 요즘 과학기술 죽여줍니다. 토미존이 선배님 뛰실 때 토미존이 아니에요.”
본래라면 하기 힘든 건방진 이야기다.
하지만 성민은 강용구 코치와 기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으며, 더군다나 오늘의 선발 투수였다. 강용구 역시 엘리트 선수 출신으로 선발 투수가 자기가 등판한 날 마운드에 얼마나 강한 애착을 갖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더 뛸 수 있다고?”
“네, 진짜 느낌이 좋습니다.”
“알겠다. 감독님한테는 내가 이야기해볼 테니까 일단 아이싱 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 봐.”
공 감독이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불펜을 올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성민이 오늘 공 몇 개 던졌지?”
“5회까지는 좀 많이 던졌는데 6회랑 7회에 투구 수 좀 아껴서 아직 89 갭니다.”
공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선수가 지쳤다. 불펜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오늘 경기 이후로 성민이에게는 6일 휴식을 줄 예정이었다. 선수의 의지가 저렇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한다면 1이닝 정도 더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7회 말,
2사 주자 3루. 외야 플라이.
박진명이 또 한 번 마린스를 막아냈다. 그야말로 인생투였다.
그러나 운이 없었다.
만약 오늘 상대 팀 마운드를 지키는 투수가 성민이가 아니었다면, 그는 헬꼴라시코의 법칙에 따라 높은 확률로 영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8회까지 아득바득 마운드에 선 성민은 강했다.
2032시즌.
헬꼴라시코의 강력한 저주도 성민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8이닝 무실점.
4:2 승리.
성민이 시즌 21번째 승리를 수확했다.
< 헬꼴라시코(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