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꼴라시코(2) >
성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거 불안한데.’
-그렇지? 이 불안감 나만 느낀 거 아니지?
‘경기 초반에 크게 이기면 불안해지다니. 영감님도 이제 마린스맨 다 되셨네요. 다시 태어나면 마린스에 입단 하쉴?’
-아니다, 이 악마야!!
‘그나저나, 하필 또 엘리츠 전에서 이러네요. 짜증나게.’
성민이 가벼운 잡담과 함께 마운드에 올라왔다.
헬꼴라시코.
성민 역시 그 악명을 잘 알고 있었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이기에 이제는 마린스나 엘리츠 선수들도 자조적 농담으로 써먹고 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마린스가 못했던 경기가 사실 한 두 경기가 아님에도 엘리츠 전만 되면 유독 더 부각이 되는 느낌이다.
물론 이것은 마린스만 예능을 하느냐, 상대 팀도 같이 예능을 하느냐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디 KBO에 예능팀이 마린스, 엘리츠 둘 뿐이던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인기 팀끼리 예능을 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게다가 헬꼴라시코라는 이름, 기분 나쁘게 입에 착 달라붙긴 달라붙는단 말이죠.’
타석에 엘리츠의 4번 타자가 올라왔다.
도밍고 산투스.
도미니카 출신의 거포로 빅리그에서는 3루 수비 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KBO에서는 그럭저럭 수준급 삼루수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성적은 0.279/0.366/0.491에 21홈런. 잠실을 홈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훌륭한 성적이었다. 만약 내년에 재계약을 한다면 120만 달러는 충분히 받을만한 성적이다.
-꿀꺽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번 시즌 성민을 상대로는 7타수 무안타 4삼진. 긴장해야 하는 쪽은 도밍고 산투스 쪽이었다.
‘젠장.’
그의 기준으로 성민은 괴물이었다.
KBO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마이너에 리햅을 위해 내려왔던 빅리그의 투수도, 9월 확장 로스터를 통해 빅리그에 올라갔을 때 경험했던 빅리그의 투수들도 이만한 포스는 없었다.
물론 그가 상대했던 빅리그 투수 가운데 진짜배기 에이스라고 할만한 투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빅리그 투수들이었다.
도밍고 산투스가 고개를 저었다.
‘위축되지 말자.’
진짜 그의 실력이 빅리그 트루 에이스 급일리 만무하다. 그저 이번 시즌 동안 성민이 쌓아올린 기록들이 그를 더 빛나게 만드는 것뿐이다.
도밍고가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되뇌었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느린 공을 치기 위한 정석적인 방법은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추고 느린 공에 대응하는 것이다.
물론 스즈키 이치로 같은 전설적인 괴물은 그 반대의 방법을 취했다지만 그건 역사에 이름을 남길 괴물이기에 가능했던 미친 짓이다.
도밍고 산투스가 성민의 빠른 공에 자신의 박자를 맞췄다.
초구.
잠실을 홈으로 쓰면서 107경기 만에 스물한 개의 홈런을 만들어낸 강력한 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98.9km/h의 느린 너클볼.
중간에 방망이를 조절했음에도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공이다.
-여전히 스윙 하나는 시원하네. 위협적이야.
‘뭐, 그렇긴 한데 저한테는 나쁘지 않은 타입이죠.’
도밍고 산투스의 스타일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슬러거다.
자기가 잘 치는 코스에 공이 들어오면 그대로 장타로 연결된다. 본인도 그걸 잘 살려 적극적인 스윙을 가져간다. 게다가 선구안 역시 크게 나쁘지 않다. 또한, 존을 빠져나가는 공도 제법 잘 본다.
투수들은 조금만 실수해도 큰 거로 연결되는 도밍고가 부담스러워 까다로운 승부를 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볼질이 늘어난다. 삼진도 많지만, 볼넷도 많은 전형적인 슬러거의 탄생이다.
하지만 컨택 능력 자체만 따지면 나쁜 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MLB에서 실패하고 KBO에서 성공하고 있는 이유다.
‘KBO와 MLB 야수의 가장 큰 차이는 수비. 그리고 그다음이 컨택 능력이다.’
성민은 도밍고를 상대로 피해가는 승부를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이번에도 존을 통과하는 느린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2구 연속 같은 공에 헛스윙.
도밍고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다. 헬멧을 고쳐 쓰고 장갑을 동여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볼카운트 0-2.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투수라면 보통 공을 하나 뺀다. 하지만 0-2의 카운트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지는 그 공을 안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방망이를 휘두르는 쪽으로 가보자.
도밍고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세 번째.
마운드의 성민이 와인드업했다.
공이 날아온다.
젠장.
이번에도 또 느린 너클볼이다.
3구 연속 같은 공.
여전히 방망이는 빨랐다. 하지만 앞서 두 차례나 당했던 탓일까? 무의식중에 방망이의 타이밍이 조금 느려져 있었다. 쳐낼 수 있다!! 도밍고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쫓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린 너클볼!! 헛스윙 스트라잌입니다!!]
[김성민 선수, 오늘도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터쳐블이라는 단어가 꼭 들어맞는 피칭!! 도밍고 산투스 선수. 오늘 공을 건드려 보지도 못한 채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저 녀석은 분명 존 밖으로 빠지는 공을 그럭저럭 구분하는 녀석이긴 하지.
‘단 투 스트라이크 이전까지만 말이죠.’
-거봐라. 미리미리 타자에 대해 공부해두니 이 얼마나 좋으냐.
필 니크로가 콧대를 높게 세웠다.
‘아, 진짜. 대만 애들 상대로 자료 안 봤다고 그걸 언제까지 우려먹으실 생각입니까. 저도 어지간한 상대 거는 다 꼼꼼하게 살펴봤었다니까요.’
-그래서 네가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거다. 사자는 토끼 새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사자 주식 중에 토끼는 없거든요?’
-비유가 그렇다는 말이다. 비유가. 너 빅리그 투수 중에 이제 막 마이너에서 올라온 녀석이라고 방심했다가 두들겨 맞는 놈들이 어디 한두 놈인 줄아느냐?
‘알겠습니다. 알겠어. 대만 일은 제가 크게 사과하겠습니다. 위험하건, 안 위험하건 전부 꼼꼼하게 잘 살펴볼게요.’
-에잉, 언젠가 한 번 크게 혼꾸녕이 나야 알아들을 놈 같으니라고.
‘그래서 그 혼꾸녕 이미 충분히나고 매일 달달달 외우고 있잖습니까.’
-내가 하는 이야기가 어디 혼꾸녕 축에나 속하는 줄 아느냐?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역전 끝내기 홈런 정도는되야 혼꾸녕이지.
‘아니, 근데 아무리 예전의 저였다고 해도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자료 안 읽고 들어가는 멍청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말이!!
성민과 필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5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모자를 고쳐 썼다. 필과 아옹다옹 할 때와는 달랐다. 타자를 바라보는 성민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저 결심 했습니다.’
-무슨 결심?
‘오늘 경기에 그 이야기 안 나오게 할거에요.’
-무슨 이야기?
‘헬꼴라시코요.’
필이 정색을 했다.
-성민아, 내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생각해봤는데 그건 전성기에 내가 여기 다시 서도 힘들 것 같다.
‘진짜요?’
-그래, 지금 세 번째까지 생각해봤거든? 솔직히 내가 컨디션 좋은 날이면 완투승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헬꼴라시코 이야기 안 나오게 하는 건 도저히 무리야.
‘아니, 그래도 지금 4:0으로 경기도 이기고 있고.’
-경기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팀은 근본부터가 글러 먹었어. 대부분 애새끼들 마인드가 대만이랑 상대하던 너랑 비슷해. 이길 것 같으면 풀어지지. 어차피 에러는 평소에도 한다고? 그래 맞아. 평소에도 하지. 실력이 부족하니까. 하지만 이기고 있을 때 나오는 에러들은 그 이상이야.
필의 말이 점점 격렬해졌다.
-잘 던지는 건 할 수 있어. 그런데 저 새끼들 에러 폭발하는 건? 그래, 뭐 그것도 삼진 펑펑 잡아서 억제한다고 치자고. 불펜은? 아, 9회까지 던질 생각이야? 이 더위에? 삼진 펑펑 잡는 거로 투구 수 늘리면서?
‘워워, 영감님. 진정하세요.’
마린스 경기를 고작 몇 달 지켜봤으면서 쌓인 울분이 거의 10년 차 마린스 팬 수준이다. 뭐, 당사자 바로 옆에서 매일매일 고통받았던 만큼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뭐, 그런 면이 조금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쟤들은 엄청 열심히 하잖아요.’
성민의 시선이 동엽과 정엽을 스쳤다.
내야 수비의 핵인 키스톤. 하나는 부경고를 졸업한 성골, 하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비주류다. 하지만 모두 젊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야구를 잘하고 싶다는 의지로 불타는 애송이들이다.
-흥, 확실히 저 녀석들은 아직 오염이 덜 되긴 했지.
‘오염이라니. 말이 좀 심하신 것 같긴 하지만. 확실히 우리 팀이 좀 그런 게 있긴 있죠. 그래도 이제 달라질 겁니다.’
-과연 그럴까?
‘그런 이론도 있잖아요. 승리랑 패배는 아주 강렬한 경험이고, 그것은 인간의 단기적인 패턴을 바꿔놓는 강력한 요인이다.’
-뭐야,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운거야?
‘엄마가 읽던 주간잡지에서요. 거기 좋은 말 엄청 많이 나옵니다. 어쨌거나 잘 보세요. 쟤들뿐만 아니라 다른 선배들도 최소한 제 등판에서만큼은 여전히 빡세게 긴장하고 있잖아요. 시즌 초랑은 다르다고요.’
-흥, 그거야 뭐 공이 그쪽으로 가봐야 확인할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2회 초.
아쉽게도 그들이 빡세게 긴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5번 타자 초구 내야 뜬공 아웃. 그리고 이어지는 6번 타자 역시 내야 땅볼 아웃. 두 번의 타구를 모두 완벽하게 처리한 동엽이 성민을 향해 두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 성민이 동엽의 머리를 헝크러주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늘 시원하게 이기고 냉채 족발이나 한 사바리 하자.”
동엽의 눈이 빛났다.
1군 최저연봉을 받는 동엽이다. 드래프트 상위 라운더이기는 하지만 계약금으로 받았던 1억 4천만원은 이미 부모님 아파트 대출금 상환에 전부 들어갔다. 가뜩이나 먹는 양도 많은 판국에 한 접시에 5만 원씩 하는 족발 같은 음식은 먹고 싶다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2회 말.
엘리츠의 수비 이닝.
마리아노 멜라우가 또 한 번 마운드에 올라왔다.
-뻥, 뻥, 뻥, 뻥.
그리고 스트레이트 볼넷.
엘리츠의 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답이 없다.
“진명이 올려.”
미리 준비해뒀던 패전처리용 롱 릴리프 박진명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이번 시즌 37경기 그중 2경기에 선발로 출장했고 64.1이닝 ERA 4.76.
-뻐엉!
139km/h의 연습구가 미트를 두들겼다. 직전 마리아노 멜라우의 150km/h대 공에 비하자면 느리기 짝이 없는 공이다.
최근 연승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던 엘리츠의 팬들이 하나, 둘씩 TV 채널을 돌렸다.
“오늘은 성민이가 좀 편하게 승리 챙겨가겠네.”
“오늘 경기 이기면 이제 다섯 경기 남는 거지?”
“미쳤다. 한 시즌 무패 투수라니. 내가 그걸 직접 보고 있다니.”
마운드의 박진명이 투구를 시작했다.
-딱!!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힘없는 땅볼 타구.
병살타.
그리고 이어지는 외야 플라이 아웃.
2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싱겁게 종료됐다. 괜찮다. 뭐 그럴 수 있다. 병살과 범타는 적극적인 타격의 안 좋은 결과일 뿐이다. 애초에 공에 스치지도 못했다면 병살이나 범타는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3회, 4회 또 5회.
성민은 경기를 훌륭하게 잘 틀어막았다. 압도적이다.
박진명은 꾸역꾸역 운 좋게 점수를 주지 않았다. 불안하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양 팀 모두 추가점 없이 5회 말이 끝났다.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언가 유명한 법칙들이 떠올랐다.
일명 헬꼴라시코의 법칙
‘투수가 꼭 볼질을 한다.’
‘에이스급 투수가 경기 초반 대량실점 이후 강판, 이어지는 별 볼일 없는 투수가 이상하게 인생투를 펼친다.’
경기가 계속됐다.
< 헬꼴라시코(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