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52화 (53/287)

< 헬꼴라시코(1) >

8월의 막바지.

상위권 세 팀은 이미 가을 야구가 확정된 지 오래고, 4, 5위 다툼을 하는 4팀은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맞붙고 있으며, 가을 야구 탈락이 결정된 두 팀은 고춧가루 부대라는 이름으로 다른 팀들의 발목을 잡는 계절이다.

KBO 최고의 인기 팀 중 하나인 엘리츠.

그들은 엘리츠, 마린스, 호크스 가운데 비교적 가장 최근에 우승을 경험했다.

물론 그 우승은 시즌을 예상했던 전문가들도, 시즌을 지켜본 팬들도, 시즌을 뛰었던 본인들도 믿기 힘든 기적과도 같은 우승이었다.

그야말로 온 우주의 정기가 오직 엘리츠만을 돕는 것 같았던 그런 우승.

그리고 2032년 지금.

아쉽게도 온 우주의 정기는 엘리츠를 완벽하게 외면했다.

44승 2무 69패.

[엘리츠표 고춧가루의 매운 맛!! 엘리츠, 블레이즈의 발목을 잡아채다!!]

[탈꼴찌 서울 엘리츠 9위 탈환!!]

[서울 엘리츠. 시즌 막판 매운 고춧가루 부대 변신!! 내년 시즌이 기대되는 이유]

[‘우승 결정자는 나야 나’ 최근 경기 4연승 상승세의 서울 엘리츠, 마린스와의 맞대결!!]

“엘리츠랑 우리 경기치고는 느낌이 좀 이상하긴 이상하네.”

“난 엘리츠랑 경기라서가 아니라, 그냥 요즘 우리 팀 경기가 전부 다 이상해. 내가 말했지. 나 어제도 꿈꿨다고.”

“알지. 너 갑자기 새벽에 전화해서 지금 우리 팀 몇 위냐고 물어봤잖아. 나도 깜짝 놀라서 지금까지 내가 꿈꾼 건가 하고 다시 찾아봤고.”

“우리 진짜 이러다가 한국시리즈 직행하는 거 아닌가 몰라.”

“모르기는 뭘 몰라. 지금 1위랑 한 게임 차이고 남은 일정 보면 우리가 훨씬 유리한데. 이만하면 한국시리즈 직행이라고 봐야지.”

“크, 생각만 해도 짜릿하네. 한국시리즈 직행이라니. 만약 그러면 우리가 우승 하겠지?”

“당연하지. 원래 포시는 투수 싸움이라고. 우리 성민이에 닉 해리슨까지 리그 최강 원투펀치인데 질 수가 없지.”

아직 더위가 다 가시지 않은 8월 말의 금요일 저녁.

마린스의 팬들이 삼삼오오 사직으로 모여들었다.

성민의 등판 경기답게 표는 진작에 매진. 경기장 앞에는 온라인으로 구매한 암표를 직접 받아가는 사람들까지 드문드문 보일 지경이었다.

-뻐엉!!

“좋습니다!!”

혁준이 미트를 두들겼다.

성민이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냈다.

오후 다섯 시. 현재 기온 32.7도.

조금 내려가나 싶던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선배님.”

공을 받았던 혁준 역시 땀이 송골송골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무거운 장비를 걸치고 있는 만큼 성민보다 더 더우면 더웠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커룸에 케이터링 된 늦은 점심을 챙겨 먹었다.

더위 탓인지 입맛이 없다. 몇몇 선수들 같은 경우 아예 간단한 음료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성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오늘 경기를 책임 질 선발 투수고, 한 경기를 뛰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만만치 않다. 성민이 의무감으로 적정량의 식사를 끝냈다.

“자자, 늘어지지 말고 다들 조금만 더 힘 내자.”

더위도 그의 입맛을 뺏을 수는 없었는지, 벌써 밥을 세 그릇이나 먹은 태경이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래, 다들 알잖아. 지금만 넘기면 또 좀 할 만해지는 거.”

호섭이 그의 말에 한마디를 보탰다.

맞는 이야기다.

9월 확장 로스터가 되면 2군 선수들이 올라온다. 그러면 보통은 지금보다 조금 여유가 생겼었다.

몇몇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아닐 확률이 높겠지만 말이야.’

-왜? 아무리 순위 경쟁 중이더라도, 일단 지는 게 확실해진 경기에 2군 선수들을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생기잖아.

‘어지간한 점수 차이로는 그러기 힘들 거에요.’

-뭐 때문에?

‘스포츠는 좀 빠이팅이 있어야 한다는 이미지가 아직 있어서, 불펜 투수들이야 뭐 어쩔 수 없는 거 다들 이해한다지만, 우리가 야수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면 욕 오지게 먹을 겁니다. 안 그래도 지금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정규 시즌 우승 노리는 상황이잖아요. 감독님도 여기까지 왔으면 재계약 진지하게 노리실 테고, 여론 등지기 힘들죠.’

-어렵군.

‘그러니까 우승 최대한 빨리 확정 짓고 코시까지 좀 길게 쉬어야 합니다. 재규어스 같은 곳은 뎁스 탄탄해서 9월에 체력도 좀 안배하면서 여유롭게 갈 수 있다지만, 우리는 1군 2군 실력 차가 커서 그거 힘들어요.’

태경과 호섭의 이야기가 이뤄지기 힘들다는 것을 아는 다른 선수들 역시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야기를 하는 태경과 호섭 역시도 다 알고 하는 이야기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들이 젖먹던 힘을 쥐어짜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경기가 시작됐다.

6시 30분.

아직 해는 떨어지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성민이 모자를 고쳐쓰고 가볍게 로진백을 두들겼다.

[자, 프로야구. 부산 마린스와 서울 엘리츠의 1차전. 마운드에 김성민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이번 시즌 명실상부한 KBO 최고 투수죠? 24경기에 등판해서 20승 무패. 현재까지 평균자책점 0.86. 그야말로 21세기 KBO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KBO 역사 속에서 20승 이상 투수 가운데 가장 적은 패배가 3패였거든요. 김 성민 선수 남은 경기가 여섯 경기고,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고려할 때 이건 갱신했다고 봐야겠죠. 아니 어쩌면 그걸 넘어서 지난 2013년 NPB의 다나카 선수가 기록했던 프로리그 유일의 무패를 경신할 수도 있습니다.]

[선발 투수 4관왕도 매우 유력한 상황이죠. 다승과 승률은 이미 결정됐고, ERA도 2위와 1.73 차이라면 이것은 거의 확정이라고 봐야죠. 남은 것은 삼진 정도군요.]

[맞습니다. 만약 김성민 선수가 4관왕을 한다고 하면 공식적으로는 역대 두 번째, 삼진 타이틀이 없어 공식 4관왕이 아니었던 선 태양 감독님의 경우까지 더한다면 역대 다섯 번째 기록입니다.]

타석에 엘리츠의 1번 타자 박효경이 들어왔다.

이미 가을 야구는 물 건너간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기록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연봉 협상은 개인기록이다.

무엇보다 가을 야구도 끝장난 상황에서 남은 경기까지 개판 친다면 팬들의 여론을 감당할 수 없다. 내년을 기대하게라도 해줘야 그나마 버틸 수 있다. 구단의 홍보팀이 가을 야구에 탈락한 이후 더 바빠진 이유다.

박효경이 방망이를 굳게 잡았다.

초구.

빠른 너클볼.

-뻐엉!!

박효경이 공을 지켜봤다.

“스트라잌!!”

젠장, 긁히는 날이다.

요즘 더위 때문인지 비교적 비실비실한 날도 좀 있었는데, 하필 오늘 공이 제대로 긁힌다. 끝까지 지켜봤는데 날아오는 도중에 세 번이나 흔들렸다.

타석에서 잠시 물러나 침을 뱉고 헬멧을 고쳐썼다.

잠깐 그라운드에 서서 공만 지켜봤을 뿐인데 머리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버티자.’

더운 날씨.

타자는 번갈아가며 타석에 나온다지만, 투수는 마운드에 서서 꾸준히 공을 던져야 한다. 누구의 체력이 더 소모가 될지는 뻔하다.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박효경이 마음 속으로 너클볼의 박자를 헤아렸다.

하나, 두 –뻥!!

“스트라잌!!”

146km/h의 속구가 시원하게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몇몇 괴물 같은 새끼들은 슬슬 폼을 보면 속구일지 너클볼일지 대충 감이 올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놈들도 있지만 박효경에게는 먼 세상 이야기다.

완전히 똑같은 폼에서 나오는 속구와 너클볼. 구분할 수 없다.

세 번째.

빠른 너클볼 하나, 속구 하나. 다음은 뭘까?

머리를 굴려보려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볼카운트 0-2다. 지금 머리를 굴릴 때가 아니다. 가장 빠른 공을 노리는 타이밍으로 어떻게든 공을 걷어내겠다.

마운드의 성민이 세 번째 공을 뿌렸다.

하나, 두울, 셋. 그리고 넷. 다섯.

방망이는 돌아가고, 공은 나풀나풀 날아온다. 어떻게든 방망이를 가져다 대려다 보니 자세가 완벽하게 무너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어떻게든 버텨보겠다 결심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결심이었는지를 확실하게 실감했다. 같은 폼에서 들어오는 세 가지 타이밍, 그것도 모두 20km/h씩 차이난다. 게다가 모두 확실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고, 심지어 그중 두 개는 너클볼이다.

‘젠장.’

1회 초.

성민이 엘리츠의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두 개 포함 공 11개로 막아냈다.

“크, 역시 우리 성민이야.”

“아주 보기만 해도 더위가 싹 가시네. 싹 가셔.”

“이 양반아 더위가 가시는 건 맥주가 시원해서 그런거고. 아니 무슨 야구장만 오면 매일 술이야.”

“기분이 좋아서 그래. 기분이 좋아서.”

“그러면 재작년이랑 재재작년에는 왜 마셨는데.”

“그땐 기분이 나빠서 그랬지.”

덕아웃으로 돌아온 성민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았다.

‘후, 좀 살겠네요.’

-덥다고 너무 에어컨 쪽으로 가서 앉지 말고. 음료도 너무 많이 마시지 마. 그냥 한 모금만 마셔. 그리고 얼른 투수용 외투 걸쳐라. 덕아웃 공기가 차다.

‘아니, 무슨 유령이 춥고 더운 것도 압니까?’

-사람들 체온 보고 아는 거야. 이 인간들은 적정 온도도 모르나. 덥다고 에어컨을 뭐 이리 빵빵하게 틀고 있어.

새로 지어진 구장답게 덕아웃에는 천장형 에어컨이 붙어 있었다. 성민이 어깨와 팔꿈치를 위해 투수용 외투를 걸치고 에어컨에 먼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운드에 서울 엘리츠의 선발 투수가 올라왔다.

엘리츠의 1선발 용병 투수 마리아노 멜라우. KBO 2년 차의 투수로 최고 154km/h의 속구를 던지는 파워피쳐였다.

-뻐엉!!

초구 151km/h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텍사스에서 야구를 했던 마리아노 멜라우다. 31도의 기온 정도는 그저 따뜻한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습도.

이 불쾌하기 그지없는 끈적끈적한 기운만큼은 올해로 두 번째임에도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볼, 파울, 볼, 볼, 스트라이크. 그리고 마지막 볼.

선두 타자로 출장한 김정엽이 1루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2번 타자를 상대로 스트레이트 볼넷.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이봐, 멜라우. 너 오늘 공 좋아. 그러니까 너무 피할 필요는 없어. 조금 더 과감하게 가자고. 오케이?”

“O.K.”

멜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가 계속됐다.

3번 타자.

타석에 지명 타자 박태경이 들어왔다.

오랜 포수 생활로 무릎에 물도 차고, 말하기 부끄러운 포수의 질병도 있는 탓에 잘 뛰지 못하는 박태경이지만 그래도 타자로는 여전히 경쟁력이 있었다.

그리고 KBO 2년 차의 멜라우 역시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초구 바깥쪽 낮은 코스 속구.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공을 받는 포수가 피하지 말고 과감하게 집어넣으라고 요구했다.

‘시발, 누가 거기 던지고 싶어서 던진 줄 아나.’

끈적한 더위, 마음대로 가지 않는 공. 과감하게 공을 던지라 잔소리하는 포수.

높아진 불쾌지수에 멜라우의 참을성이 폭발했다.

‘시발, 그래 아주 한가운데로 던져주마.’

지금까지 멜라우가 던진 공들은 노리던 곳을 크게 벗어났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됐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세상일이라는 것이 안 풀릴 때는 꼭 더럽게 안풀리는 법이다.

멜라우가 던진 공이, 정확하게 자신이 노린 코스로 날아들었다.

타석에 선 타자는 마린스 선수단 성골 라인의 정점 박태경.

프로선수의 세계에서 큰소리를 친다는 것은 그 커리어, 혹은 폼이 큰소리를 칠만큼 훌륭하다는 의미다.

비록 이제는 장점 만큼이나 약점도 넘치지만 그럼에도 박태경에게는 한가닥 치던 가락만은 남아 있었다.

박태경의 방망이가 중앙으로 완벽하게 몰린 150km/h의 속구를 놓치지 않았다.

1회 말.

멜라우의 참을성과 함께 경기가 폭발했다.

그리고 인터넷 게시판 역시 함께 폭발했다.

-킁킁 이거 대첩냄새가 나만 나냐?-

-시부럴, 헬꼴라시스코인데 1회에 또 대량득점이야?-

-진정해, 오늘 경기 그래도 성민이 경기잖아.-

-그러니까 더 시부럴이지. 이 새끼들 성민이 연승 기록 건드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

대량 득점의 불안감 속에서 헬꼴라시코가 시작됐다.

< 헬꼴라시코(1) > 끝

ⓒ 묘엽

작가의 말

응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연재 시간은 저녁 8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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