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51화 (52/287)

< 복수 >

그동안 성민에게 접촉했던 에이전시는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한국과 일본의 에이전시들 역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달콤한 조건들을 들이밀며 성민을 유혹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에이전시들은 아무리 계약 조건이 좋다고 해도 현실적인 역량에서 문제가 많았다.

성민이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성민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큰 가치가 있는지, 어떤 부분에서 약점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치를 부풀리고 약점을 감출 것인지. 그를 가장 비싸게 사줄 구단은 어디고,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단은 어딘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에이전시는 많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온 에이전시는 있었다. 하지만 성민이 원하는 것은 그런 포장이 아닌 실제 구단들과의 협상에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의 자료였다.

메이저리그 구단의 전력분석팀은 이미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닿아있다. 그곳은 구글이나 애플, 테슬라등에 취업해야할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최고의 인재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스탯을 가공하고 판단하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그들과 협상할 때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료만큼이나 세밀한, 하지만 그들과 다른 관점에서 자료를 해석한 설득력 있는 분석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오직 MLB에서 MLB의 구단들과 싸워온 현지의 에이전시뿐이었다.

물론 미국의 대형 에이전시라고 해서 무조건 후보로 남겨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현재 성민은 바닥에 떨어진 돈과도 같다. 이게 무슨 돈인지 제대로 알아보기 전에 일단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본다.

성민은 그런 자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능력과 의욕이 충분히 있는 자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도 성민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자들. 결국 마지막까지 후보로 남은 것은 성민에게 가장 먼저 접촉했던 코스크만 코퍼레이션과 모리츠 그룹이었다.

두 후보.

코스크만 코퍼레이션과 모리츠 그룹은 어떤 의미에서 양극단에 서 있었다.

두 에이전시 모두 성민에게 가장 먼저 접촉한 에이전시 답게 성민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했고, 시장의 상황 역시 확실하게 파악했다.

코스크만의 경우 전통 있고 거대한 에이전시답게 각 구단의 내부 사정에 대해 빠삭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구단들의 움직임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것에 강점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예의와 품격이 있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었다.

다만 그런 만큼 조금 뻔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성민 본인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부분이었고, 그 부분들을 숫자로 조명했을 뿐이었다.

코스크만 코퍼레이션과 비교했을 때 모리츠 그룹은 신생이었다. 그들은 여러 구단의 내부적인 움직임을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성민 자신조차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성민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파고들었다. 그런 예리한 분석이야말로 이 시장에서 모리츠 그룹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일 것이다. 물론 그들은 천박했으며, 자신과 계약한 선수들을 그저 숫자로만 대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저희를 선택하실 줄 알았습니다.”

빅터 모리츠가 환히 웃으며 성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민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코스크만 쪽이 너에게 더 알맞은 선택이야.

필 니크로의 말에 성민이 반문했다.

‘왜요? 걔들이 막 인간적이고 정도 있고, 실패한 선수도 막 챙기고 그래서요?’

-그것도 그렇지만, 얘들 하는 짓을 좀 봐라. 너도 박경효인가 하는 그 양아치한테 들었잖아. 네 정보를 대가로 자기들이랑 계약한 마이너 선수의 정보를 넘겼다고. 너라고 그런 취급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다고 생각해?

‘네.’

-응?

성민의 단호한 대답에 필 니크로가 잠시 당황했다.

‘이게 생각해보면 결국 단순한 문제거든요. 자원은 한정적입니다. 거기서 누구에게 더 투자를 하느냐예요. 잘 나가는 애들이 조금 희생해서 못 나가는 애들을 배려해주느냐, 아니면 잘 나가는 애들한테 집중적으로 투자하느냐. 물론 도덕적으로 보면 전자가 더 멋지죠. 더 가진 사람이 약간을 희생해서 못 가진 사람에게 베푼다. 훌륭해요. 하지만 우리 비즈니스잖아요.’

-······.

‘게다가 둘의 차이는 코스크만의 CEO가 특별히 더 도덕적이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코스크만은 이미 충분히 큰 회사에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로또도 잔뜩 긁어볼 여력이 있죠. 그리고 그렇게 해도 대어급 선수가 알아서 계약할만한 이름도 있어요. 아니, 심지어 대어급 선수라고 해도 실패에 대한 불안이 있는 선수라면 코스크만을 선택할겁니다.’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모리츠는 아니에요. 여긴 이제 성장하고 있는 회사고 될만한 선수들을 어떻게든 영입해서 덩치를 불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될만한 선수들에게 더 좋은 걸 제공해야죠. 그러면 짜잔!! 안될 놈들에게 투자할 여력이 사라지네요.’

부족한 사람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성민 역시 지나가다 구세군 냄비가 있으면 지갑을 뒤지고, 껌이나 초콜릿을 파는 할머니가 있으면 꼭 구매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전 될 놈입니다. 아시잖아요. 그러면 답은 뻔하죠.’

하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빅터 모리츠가 내민 손을 성민이 맞잡았다.

[김성민, 모리츠 그룹과 계약 체결!! 이번 시즌을 끝으로 빅리그에?]

[김성민과 계약한 모리츠 그룹을 알아보자.]

[모리츠 그룹 대표, 빅터 모리츠. 김성민과의 계약을 위해 비밀리에 내한!!]

[빅터 모리츠 ‘김성민 선수는 다저스의 에이스인 디아고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좋은 선수다.’]

-모리츠가 누구임?-

-최근에 메이저에서 잘 나가는 에이전트임. 작년에 1억 8천만짜리 계약했던 오토 람머마이어도 모리츠 작품임. 아주 개새끼임.-

-시발, 람머마이어가 이 새끼 작품이었음?-

-왜? 뭔데?-

-재작년이랑 작년에 37홈런이랑 31홈런 쳤던 삼루수인데 50홈런 포텐셜 삼루수라고 언플 존나 해놓고 올해 2할 3푼에 17홈런 깠음. 나이도 31살인데. 아주 개먹튀 예정임. 예상 금액이 한 5년에 1억 초반이었는데 멍청한 보스턴 새끼들이 통 크게 7년에 1억 8천 질렀음.-

-이야기 들어보니까 에이전트는 능력이 있나 본데? 성민이가 계약은 잘한 듯.-

-근데 소문으로는 저 에이전트 A급은 엄청 신경 쓰는데, 그 밑으로는 좀 대충한다는 이야기가있음.-

-어차피 성민이면 A급이잖아. 현지에서도 이번 2033년 FA 시장 선발 2순위 정도로 보고 있던데.-

-지금까지 성적만 보면 그렇기는 한데, 아직 시즌이 좀 남았잖아. 성민이가 이전부터 꾸준히 보여준 게 있으면 모르겠는데, 얜 올 시즌 보여준 게 충격적인 거라서, 지금 기록 못 이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네, 메뽕 이야기 잘 들었고요. 지금까지 24경기에서 이런 걸 보여줬는데 남은 여섯 경기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A급이 위태롭다고? 진짜 얼탱이가 없네.-

***

-우우웅

집 문을 여는 순간 들려오는 소음에 성민이 직감했다.

엄마다.

“아들 왔어?”

“아, 뭐야. 또 왜 온 거야.”

“왜 오기는. 엄마가 몇 달 바빠서 집에 못 왔다고 장식장에 먼지가 허옇게 그득그득 쌓인 게 폐병 걸리기 딱 좋더라.”

“바쁘기는. 그냥 엄마가 잘못한 게 있어서 피한거면서. 그리고 먼지는 내가 말했잖아. 쌓인 먼지는 그냥 내버려 두면 계속 소복하게 쌓이기만 하는 거라고.”

“헛소리는 그만 하고, 얼른 씻고 와서 앉아. 밥 해놨으니까.”

“밥? 엄마 설마 요리 했어?”

“걱정하지 마. 내가 한 거 아니고, 내 친구 미자 알지. 걔네 사위가 이번에 추어탕 집을 오픈했는데 그게 아주 진국이더라. 엄마가 특별히 포장해서 가져왔어. 1인분씩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놨으니까 챙겨 먹고.”

지난 박 기자 사건 이후로 택배를 통해 보양식만 보낼 뿐, 좀처럼 집을 찾지 않던 권 여사였다.

당시에는 엄마에게 짜증이 잔뜩 났던 성민이었지만, 근 두 달 만에 이렇게 찾아와 청소하고, 빨래하고, 음식까지 챙겨 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약해진다. 가족은 어쩔 수 없는 가족이다.

“이번에 20승 하는 거 TV로 봤어. 잘하더라.”

“내가 말했잖아. FA 대박 낼 거라고. 엄마 약속은 안 잊었지? FA 대박 내면 더이상 내 연애에 신경 끊기로 했던 거.”

“당연하지.”

“미리 말하지만, 그때 박 기자 같은 그런 것도 절대 안 돼.”

“어휴, 그게 어디 엄마가 너랑 박 기자를 엮어주려고 그런거겠니? 그 타이밍에 그런 기사가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엄마가 아는 기자가······”

성민이 권 여사의 말을 끊었다.

“엄마 아는 기자 겁나 많은 거 잘 알거든? 엄마 명함첩에 기자들 명함만 수십 개잖아.”

“아니, 그러니까 네 기사를 제일 잘 써줄 만한 기자가 박 기자였다 뭐 그런 말이지.”

“됐고, 나 이제 FA 대박 내고 돈 엄청나게 벌 테니까. 내 걱정은 그만하고 이제 엄마 일하고 살아.”

“얘는, 누가 들으면 엄마 일 따로 있고, 네 일 따로 있는 줄 알겠다.”

“누가 안 들어도 따로 있는 거 맞거든요?”

“알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여기 깍두기나 같이 챙겨 먹어.”

역시 어머니 쪽이 훨씬 강하다. 성민이도 어디 가서 말빨로 지는 인간이 아닌데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아, 그리고 엄마. 그때 귀여운 아기 보고 싶다고 그랬었잖아요?”

“아기 말고 손주.”

“그게 그거지 뭐. 하여간 그래서 말인데.”

“왜? 설마 요즘 어디서 만나는 여자라고 있는 거야? 뭐 하는 여잔데?”

권 여사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아니, 만나는 여자는 아니고. 엄마 그 쥬오라고 알지?”

“쥬오면 그 결혼정보업체? 거긴 왜? 설마 거기 등록한 거야? 어휴, 성민아. 넌 거기 등록할 필요가 없어요. 엄마한테 걸려오는 뚜쟁이들 전화가 얼마나 많은데. 여기 이 번호들 보이지? 이게 다 뚜쟁이들 번호에요.”

권 여사가 스마트폰에 줄줄이 저장된 번호들을 성민에게 보여줬다.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말고.”

“너 말고?”

“요즘 황혼 재혼이 유행이라잖아. 그래서 쥬오도 황혼 재혼 전문 파트가 생겼다고 하더라고? 거기 엄마 등록하려고. 그리고 요즘 과학기술 발달한 거 알지? 엄마 할 수 있다!! 나 이제 돈도 많이 벌 거잖아. 29살 차이 나는 동생. 내가 충분히 키워줄 수 있어.”

“이, 이놈 새끼가?”

성민의 말을 그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흘려보내던 권 여사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말했잖아.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라고. 내가 보기엔 엄마는 지금 연애가 부족해. 그러니까 자꾸 날 연애 시키려고 그러지. 그러니까 엄마 우리 서로 각자 연애하면서 삽시다. 알겠죠? 엄마 파이팅!!”

“너······, 너······. 너!!!!”

그리고 그날, 성민은 자기 집에서 쫓겨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말뿐이긴 했지만 복수에 성공했다. 두 달간 막혀있던 체증이 훅하고 뚫린 기분이다.

-성민아 지금 뭐하냐?

“쥬오 앱 깔아야죠.”

물론 체증이 뚫렸다고 말로 끝낼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

8월의 끄트머리.

성민의 25번째 등판이 돌아왔다.

장소는 사직구장.

상대는 서울 엘리츠.

KBO 최고의 더비 매치. 헬꼴라시코였다.

< 복수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본래 연재 시간인 8시에 한 편 더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