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50화 (51/287)

< 다승왕-유료 첫 화 입니다. >

오직 자기 힘만으로 등판하는 경기마다 승리하는 투수는 있을 수 없다.

설사 9이닝, 아니 10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낸다고 해도 승리는 결국 타자가 점수를 얻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승리는 선발 투수 혼자의 힘으로 얻어낼 수 없다.

하지만 승리의 반대편에 선 어떤 기록만큼은 선발 투수 혼자의 힘으로 일궈낼 수‘도’ 있다.

패배.

일반적으로 승리의 반대말은 패배다. 하지만 선발 투수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말은 곧 패배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디시전.

승패 없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승리의 요건을 갖추고 마운드를 내려갔음에도 팀이 패배하던지, 혹은 패배의 요건을 갖추고 내려갔지만 팀이 승리를 하던지, 아니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갔을 때 주어지는 기록이다.

더위가 가장 극성을 부리는 8월의 중순.

시즌의 8할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8회 초 성민이 마지막 공을 뿌렸다.

146km/h의 속구.

-부웅!!

“스트라잌!! 아웃!!”

타자의 방망이가 헛돌았고, 성민은 오늘 경기 여덟 번째 삼진을 잡아냈다.

점수는 6:2.

사직구장의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어!! 오늘은 이거 무조건 이긴 거다.”

“워워, 진정해. 아직 9회 남았어.”

“4점 차이인데 솔직히 이건 이긴 거지.”

“지난 경기 기억 안 나? 7회에 8점 차이로 내려갔는데 노디시전 됐었잖어.”

“그거야 상대가 브레이브스였으니까 그랬던 거고. 오늘은 피닉스잖아.”

“저번에는 7회에 4점 차이 엘리츠였는데 역전이었던 경기도 있잖어.”

“아이참, 그건 7회였으니까 그렇지. 진명규 그 샹놈새끼가 불펜으로 올라와서 불 질러서 그런 거잖아. 9회니까 마무리로 원직이가 올라올거 아녀. 그래도 원직이는 믿을만하지.”

“하기사, 아홉수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졌으면 이제는 올라갈 만하지?”

오늘까지 성민이 등판한 경기는 총 24경기.

승리는 투수 혼자 힘으로 일궈낼 수 없다. 하지만 패배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그것 역시 수비와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8월 중순, 성민이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24경기 선발 등판.

19승 무패.

-괜찮냐?

‘뻔히 보이시면서. 지금 괜찮아 보입니까?’

-하긴, 좀 힘들긴 힘들지.

시즌을 치르면서 아프지 않은 선수는 없다.

성민의 경우는 그래도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사정이 나았다.

그의 곁에는 걸어 다니는 MRI 필 니크로가 존재했다. 덕분에 성민은 자신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피칭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체력적으로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즌의 80퍼센트가 진행된 지금 35도를 웃도는 기온 속에서 공을 던지는 것은 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8회에는 자세도 많이 무너졌어.

‘심각한가요?’

-아니, 내가 보기에는 그냥 지쳐서 다리에 끌고 나가는 힘이 안 들어간 것 뿐이기는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다시 체크하자. 나쁜 버릇이 들면 안 되니까.

힘이 떨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덜 쓰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현대의 영상 장비는 그 사소한 것을 철저하게 잡아낸다. 하지만 옆에서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을 한올한올 지켜보는 필 니크로 쪽이 훨씬 훌륭하다.

“저 그러면 먼저 좀 씻고 오겠습니다.”

“응? 지금 씻겠다고?”

“네, 땀이 너무 많이 나서요.”

오늘 경기, 4회 이후로는 1이닝 끝날 때마다 언더웨어를 갈아입어야 할 만큼 땀이 쏟아졌다. 팔에 아이싱을 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차가운 물로 몸을 개운하게 씻고 싶었다.

라커룸에서 시원한 물로 깨끗하게 씻고, 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후 덕아웃으로 나갔다.

경기는 9회 초.

점수는 여전히 6:2

원아웃 주자 1루 상황.

마운드에는 마린스의 마무리투수 신원직이 올라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외부 FA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마린스가 재작년 4년 42억에 데리고 온 올해 34세의 마무리 투수다. 전성기에 비하면 조금 부족했지만, 그래도 제법 믿을만한 불펜이다.

-딱!!

141km/h의 커터가 땅볼을 유도했다. 무더위에 지친 야수들의 동작이 조금 굼떴다. 하지만 굼뜬 것은 상대 타자 역시 마찬가지다.

유격수 박동엽이 공을 잡아 이루수 김정엽에게.

이루수 김정엽은 다시 일루수 현정현에게

병살타.

마운드의 신원직이 포효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환호성이 관중석에서 울렸으며, 그 환호를 넘어설만큼 성대한 폭죽이 사직의 전광판 위를 수놓았다.

[김성민 20승!!!]

전광판 위로는 성민의 사진과 함께 20승이라는 글귀가 크게 떠올랐다. 8월 중순에 20승.

이제 성민이 남은 경기에 모조리 패배하고, 공동으로 다승 2위를 달리고 있는 돌핀스의 김준성과 재규어스의 바비 메일러, 그리고 마린스의 닉 해리슨이 전승을 거둔다고 해도 공동 다승왕이 확정이다.

성민이 덕아웃의 선수들에게 둘러 쌓인 채 그라운드로 걸어 나왔다.

-이걸로 다승왕은 확정인가?

‘에이, 아직 경기 좀 남았잖아요. 팀 별로 한 30경기씩 남았는데 중간계투가 갑자기 전부 다 등판해서 승리하거나 하면 다승왕 날아가는거죠.’

-왜? 그냥 UFO가 등장해서 야구장을 날려버린다고 가정하지 그러냐?

‘흐흐. 하긴 좀 비현실적인 이야기죠?’

성민이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카메라를 대동한 방송국 캐스터가 성민에게 다가왔다. 역시 방송국 스포츠 캐스터답게 예뻤다.

“안녕하세요. 김성민 선수. 20승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8월 중순. 24경기 만에 20승이라니. 이거 역대 최소경기 20승 기록인 건 알고 계시죠?”

“네, 사실 원래는 몰랐는데 TV에서 누가 이야기 해줘서 알았습니다. 이전 기록이 25경기 20승이라고요.”

성민의 얌전한 인터뷰에 필 니크로가 투덜댔다.

-누가 이야기 해줘서 알기는. 너 22번째 등판 때부터 최소경기 20승 기록이라며 난리 쳤었잖아. 그래서 애들이 승리 날려 먹어서 노디시전 됐을 때 거의 울었으면서.

‘아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럽니까. 그건 그냥 너무 화나서 얼굴에 열이 올랐던 거죠.’

캐스터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정말 대단한 기록입니다. 24경기 20승 무패. 사실 김성민 선수가 작성 중인 기록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한 경기, 한 경기가 모두 기록이라고 할 수 있죠. 아,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너무 부담을 드렸나요?”

“어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에 부담을 느껴서야 프로 못 하죠. 게다가 기록에 크게 연연하는 성격도 아니라서요. 시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팀의 우승입니다. 기록은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부산물에 불과하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팀이 이기는 겁니다. 그렇기에 오늘 승리는 저의 20승보다 팀의 74번째 승리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참 좋은 말이었습니다. 오늘 승리로 마린스와 재규어스의 승차가 다시 0.5경기 차이로 줄어들었는데요······”

캐스터가 말을 이어가던 그 때.

“선배님!!”

“어? 어? 야, 야!!”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동엽이 커다란 바스켓을 번쩍 들어 뒤집었다.

찰랑거리던 이온음료가 성민의 몸을 흠뻑 적셨다. 그리고 그걸로 모자라 옆에서 함께 인터뷰하던 캐스터 역시 피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슬쩍 다가왔다. 덕분에 그녀의 옷 역시 이온 음료로 흠뻑 젖었다.

그 순간 성민의 시선이 슬쩍 캐스터의 몸으로 향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나이의 본능이었다.

‘빨강 레이스?’

역시 뭐를 좀 아는 캐스터다. 사실 오늘 인터뷰 중에 이온음료 샤워가 있을 것은 뻔했다. 저 빨강 레이스는 그녀의 고심이 담긴 선택이었다.

“선배님, 20승!! 축하드립니다!! 마린스!! 가을 야구 가즈아!!”

박동엽이 여자 캐스터에게 이온 음료를 부은 주제에 뭐가 그리 좋은지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성민이 혁준에게 슬쩍 손가락질을 했다. 역시 시즌 내내 성민과 공을 주고받은 탓일까? 혁준이 그 손가락질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는다.

흥분해 미쳐 날뛰는 동엽이 머리 위로 시원한 얼음물이 한 사발 끼얹어졌다.

-하, 8월 중순에 다승왕 확정이라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확정은 아니지. 아직 30경기 남았는데-

-선발 2위들이 남은경기 전부 승리하고 김성민은 전부 승리 못해도 공동 1등. 불펜 최다승 하는 애가 남은 경기 전부 다 나와서 절반을 승리해도 다승왕 확정인데 이 정도면 확정이지-

-그러면 지금 성민이 투수 4관왕 가능한 거지? 승률은 이미 지지난 경기에 확정이고, 다승도 오늘로 확정이라고 봐야하고 탈삼진은 바비 메일러랑 19개 차이나고 평자책도 압도적으로 1위잖아.-

-내가 볼 때 탈삼진까지 삼관왕은 거의 확정이고 평자책도 서너 경기 이상 크게 말아먹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함.-

-야 근데 난 소름 돋는 게 마린스 오늘로 74승인데 그중 20승이 김성민이 했다는 거야. 이거 김성민 없었으면 우리 54승이라는 건데 그러면 6위잖아.-

-그건 무슨 짱깨식 계산이냐 20승을 왜 다 빼. 적당한 투수 올라왔어도 5~6승은 했을 텐데.-

-근데 좀 설득력 있음. 김성민 빠지고 그 승수만큼 다른 팀들이 가져갔다고 치면 우리 진짜 가을 야구도 못 하는 등수였을 수도 있다.-

-8월에 3관왕 거의 확정된 선발 투수 데리고 아직도 2위밖에 못하는 마린스에선 소름 안 돋냐?-

-그게 뭐? 난 그런 투수 하나 있다고, 마린스 주제에 2위나 하는 게 더 놀라운데. 김성민 빼고도 54승이나 했다는 거 아냐.-

-지금 닉 해리슨이 14승으로 다승 3위다. 게릭 벨도 9승이나 하고 있고.-

-박동엽 그 새끼 왤케 꼴불견? 누가 보면 지 때문에 경기 이긴 줄? 거기다가 가만히 있던 캐스터한테 포카리는 왜 붓고 지랄?-

-비호감 인정. 걘 진짜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왜? 박동엽도 어제 경기 정도면 나쁘지 않게 했지. 5타수 2안타에 3타점이잖아.-

-난 그것보다 3삼진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 지금 성민이가 탈삼진 타이틀 딸 가능성보다 그 새끼가 삼진왕 딸 가능성이 더 큼. 삼진머신 새끼.-

등판 바로 다음 날.

제법 비싼 돈을 주고 산 보충제를 꿀꺽꿀꺽 삼키며 성민이 러닝을 준비했다.

“KBO 최초 무패 선발 투수. 연승 기록. 4관왕.”

-개인 타이틀 관심 없다며.

“아니, 그거야 그냥 하는 이야기죠. 인터뷰에서 누가 ‘네, 전 팀의 승패보다 제 개인기록에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기록들을 꼭 세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럽니까. 메이저도 보니까 죄다 팀 스피릿 어쩌고 립서비스 하드만.”

-그야 그렇지만.

“태도가 조금 더 공손했던 건, 원래 국가간 정서 때문에 그런겁니다. 원래 우리나라 미덕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예요. 어중간한 놈이 겸손을 떨면 무시할 수도 있지만, 나만큼 잘 나가는 놈이 겸손을 떨면 더 대단하게 본다 이 말입니다.”

-끄응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가 안 그래도 미국버전도 준비하고 있으니까. 아마 거기였다면 ‘전혀요. 전 최고의 투수입니다. 지금은 그저 그런 것 신경 안 쓰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최고의 투수가 최선을 다한다면 기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겠죠? 그저 바라는 것은 저의 활약이 팀의 우승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렇게 답했을 겁니다.”

-와, 아직 에이전시 계약도 안 끝낸 녀석이 미국 인터뷰를 준비한다고?

“안 그래도 그거 슬슬 도장 찍을 생각입니다.”

-드디어?

“네, 그 쪽 드래프트도 끝났겠다, 건방지게 쫄따구나 보냈던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도 직접 찾아와서 이러고 있는데 이제 결정 내려야죠.”

< 다승왕-유료 첫 화 입니다.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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