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47화 (48/287)

< 협상(2) >

부르르 떨린 스마트폰이 권 여사의 메시지를 뱉어냈다.

-옷 좀 잘 입고 와. 작년에 엄마가 사준 정장이랑 타이 있지? 그리고 신발도 운동화 신지 말고 구두 신고 오고. 알겠어?-

성민이 인상을 구겼다.

“아, 소개팅이네.”

-소개팅?

“비싼 밥집에 갑자기 나오라 그러고 이유는 안 알려주는데 잘 차려입고 나오라면 뻔하죠. 아, 엄마가 소개해주는 여자들은 별론데.”

-뭐 어떻길래?

“지난번에 보셨잖아요. 우리 엄마 소개팅은 최소 페더급에서 시작이에요.”

-페더급이면 126파운드, 그러니까 57kg이니까 딱 건강한 여성 아니냐?

“복싱 말고 종합격투기 기준이거든요.”

종합격투기의 페더급은 145파운드. 65.8kg이다.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머니께서 손자로 엘리트 체육인을 원하는 게 분명하군.

“아 쫌!!”

권여사가 원하던 옷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에이전트를 만난다고 정장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성민이 차를 몰아 고깃집으로 향했다.

“보세요, 고깃집 가보면 백 퍼센트 엄마는 보이지도 않고 웬 처음 보는 여자가 떡 하니 나와 있을 겁니다.”

성민이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고깃집의 입구. 익숙한 실루엣이 성민을 맞이했다.

“성민아!!”

“엄마?”

-백 퍼센트라며.

‘그러게요.’

권 여사의 눈이 성민을 훑었다.

“내가 사준 정장 입고 오라니까, 또 이거 입었네. 이거 5년 전 옷이라서 요즘 유행이랑 완전히 동떨어졌다니까.”

“아, 정장이 정장이지. 유행이 어딨어요.”

“하여간, 지 아빠 닮아서 옷도 매일 편한 것만 대충 입으려고 그러고. 넌 진짜 엄마한테 감사하다고 큰절 백번은 해야 해. 내가 이 정도로 번듯하게 낳아놨으니 그따위로 입어도 봐줄 만한 거지 그거 아니었으면 넌 어디서 얼굴 들고 다니지도 못했어.”

“감사는 아빠한테 해야지. 엄마가 그랬잖아. 나 엄마 안 닮고 아빠 닮았다고.”

“그러니까 엄마한테 감사해야지. 너희 아빠 꼬신 게 엄마잖아.”

뭔가 이상한데 묘하게 맞는 말이다.

성민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넌 엄마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랬니. 얼른 이리 와. 다른 건 어쩔 수 없다고 치고 타이라도 이걸로 바꿔 매자.”

권 여사가 백에서 넥타이 하나를 꺼내 성민의 목에 감았다.

“어차피 타이가 다 그게 그거지.”

-성민아, 내가 보기에도 그게 그거는 아닌 것 같다.

타이 하나에 인물이 확 살아나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성민이 대충 골라 입은 것보다 훨씬 괜찮다.

성민이 볼멘소리로 권 여사에게 항의했다.

“엄마, 분명히 내가 올해 FA 대박 내면 소개팅 이야기 다시는 안 한다고 했잖아. 나 요즘 엄청 잘 나가고 있고, 이대로면 약속한 거 충분히 가능할 텐데 이건 반칙이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지금 소개팅 잡은 거잖아.”

권 여사가 인자한 얼굴로 성민의 머리를 매만졌다.

“아들.”

“그렇게 부드럽게 불러도 나 화 안 풀리거든.”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엄마가 소개팅을 주선했다고 치자. 그러면 약속 장소를 옷에 냄새 안배이고 우아하게 칼질하는 곳으로 잡을까, 아니면 이렇게 구워 먹는 고깃집으로 잡을까?”

“그러면?”

“우리 아들이 엄마에 대한 신용이 이렇게 없다니. 엄마가 막 섭섭해지려고 그런다? 요즘 엄마 핸드폰이 뚜쟁이들 전화로 아주 불이 날 지경인데. 어떻게? 이 섭섭함을 한번 풀어줘?”

“아니, 엄마가 막 용건도 이야기 제대로 안 해주고, 정장 입고 나오라고 하니까 당연히 소개팅인 줄 알았지. 그러면 대체 뭔데?”

권 여사가 성민의 손을 잡아끌었다.

예약된 방에는 뜻밖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갈색 머리. 왜소한 체격. 굵은 뿔테 안경. 그리고 제법 정확한 한국어.

“안녕하십니까. 한센 릴로우라고 합니다.”

***

바로 며칠 전 이야기다.

“박경효 씨?”

“누구?”

“아, 저는 모리츠 그룹의 에이전트 한센 릴로우라고 합니다.”

“모리츠 그룹이요?”

박경효가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모습에 한센이 쓴웃음을 지었다. 모리츠 그룹이 동아시아 쪽 기반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야구 에이전시만 따진다면 총액 기준으로 열다섯 번째 정도는 되는 그룹이다.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다는 것은, 모리츠 그룹의 유명세 문제가 아닌 저 박경효라는 스카우트의 문제라고 봄이 타당했다.

“에이전시 그룹입니다. 지난겨울 오토 람머마이어 선수의 계약을 체결했었죠.”

“아!! 오토 선수. 하하, 제가 워낙 일본통이다 보니 미국 쪽은 좀 생소해서. 그런데 미국 에이전시에서 저는 무슨 일로?”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제가 좋은 술집을 하나 알고 있는데 거기로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흐음. 그게 제가 요즘 상당히 바빠서요.”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대화일 겁니다. 아, 맞다. 작년에 KBO에서 빅터 마르테 선수를 알아봤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선수도 아마 저희 에이전시 소속이라죠?”

박경효가 침을 삼켰다.

빅터 마르테라면 지난겨울 KBO의 여러 팀에서 노렸던 용병이다. 97마일 이상의 속구가 약점인 타자로 40인급의 선수다. 여러 가지 조건에서 KBO를 폭격할 수 있다고 평가되지만, 선수 본인이 한 번 더 메이저에 도전해보기를 원했기에 데려올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볼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박경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김성민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접촉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한센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네? 어머니요? 분명 김성민 선수는 에이전트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공식적으로는 없죠. 하지만 성민이가 매번 연봉협상 때마다 가져오는 자료를 보면 진짜 대단하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성민이가 그런 걸 잘 아는 줄 알았어요. 근데 알고 보니 그 어머니가 그런 걸 다 준비하는 거더라고요.”

“그렇군요.”

“거기다가 성민이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둘이 자라서 그런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보통이 아니에요. 매일 입으로는 툴툴거리는데 뭐 좋은 것만 있으면 항상 제 엄마 거부터 챙기는 놈이에요 그놈이.”

한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머니라······.”

“근데 성민이 어머님도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얼마 전에 나랑 친한 선배도 연락했었는데 아주 단칼에 거절을 당하고 수신 거부까지 당했다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선배라는 분은 어머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하셨답니까?”

“아, 그게 예전에 성민이 신인 때 제가 복날이라고 삼계탕 한 번 사준 적 있었는데 어머님이 고맙다고 저에게 기프티콘을 보내주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번호가 있습니다.”

뭔가 쓸데없는 정보들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어쨌든 유익한 만남이었다.

***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성민 선수. NPB를 원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김성민 선수가 NPB를 거쳐 가는 건 낭비입니다.”

“그렇군요.”

석 달 전에 12만 원 하던 한우가 13만 원으로 올랐다.

맛은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성민은 자신의 돈을 내고 먹는 것이 아니라 그런지 만원만큼 더 맛있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저희 모리츠 그룹은 사소한 부분들에서 다른 에이전시보다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프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만큼은 저희가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한센 릴로우가 제시한 지표들은 코스크만의 탐 콜린스가 제시했던 것과 또 달랐다.

탐 콜린스가 보장을 이야기했다면 한센 릴로우는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또한, 더 많은 돈을 얻어내기 위해 그들이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돈, 돈이야말로 가장 명료한 지표죠. 보시다시피 저희 모리츠 그룹은 최근 에이전시 가운데 가장 빠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3년 전 드래프트는 과거 스콧 보라스의 독립리그 사건 이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평가받고 있죠. 이렇듯 저희는 고객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항상 최선을 다합니다.”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곳이군. 구단들은 바보가 아니야. 물론 무시할 수 없는 빅네임이라면 울며 겨자 먹기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선수라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어.

성민이 3번째 고기를 추가했다. 그리고 권 여사가 물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 성민이가 한센 씨와 계약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일을 진행할 생각인가요? NPB는 예외로 둔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MLB 직행일 텐데 지금 메이저리그에 적절한 팀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입니다. 지금 김성민 선수의 성적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수준입니다. 심지어 저희는 이 성적조차도 김성민 선수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팀은 아직은 어디라고 콕 짚어 이야기하기는 이릅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 이 바닥이니까요. 다만 저희 회사의 전력분석팀은 빅리그 구단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고 충분히 최선의 조각을 맞출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약은 그렇다고 치고, 만약 미국에 진출했을 때 성민이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실 가장 편한 방법은 구단에게 최대한 많은 옵션을 받아내는 겁니다. 통역, 숙소, 교통, 그 외에 다양한 옵션들이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센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옵션들은 결국 타협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옵션 역시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다 해결되는 일에 불과합니다. 통역이요? 1년 고용한다고 해봐야 5만 달러면 충분합니다. 비행기? 숙소? 연봉에 100만 달러만 더해도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모리츠 그룹은 그것을 이뤄드릴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최대한 많은 돈을 뜯어내고 거기에 더해 옵션을 받는 일이죠. 그리고 저희만큼 그것에 능숙한 에이전시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김성민 선수가 저희와 함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권 여사가 시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아들과 이야기를 좀 해보고 연락드리도록 하죠.”

한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잘 먹었다. 엄마 그러면 우리도 이제 일어날까? 여기 근처에 디저트로 케이크 잘하는 가게 있는데 거기 콜?”

“기다려!! 만나기로 한 사람 있으니까.”

“만나기로 한 사람? 뭐야? 또 에이전시야? 와, 이것들 뭐지? 왜 내가 아니라 엄마한테 연락하는 거지?”

“아니, 그건 아니고.”

-똑똑

“들어와요.”

스르륵 미닫이문이 열렸다.

“오래간만이에요.”

그리고 그곳에는 성민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응? 박 기자님이 여긴 어떻게?”

“내가 불렀다.”

“엄마가? 왜?”

현대의 화장기술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기에 세상에 쌩얼이 더 예쁜 여자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여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화장을 잘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화장은 얼굴의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부각한다. 심지어 화장을 안 했을 때 나올 것 같은 풋풋함조차도 화장을 통해 극대화할 수 있다.

평소 연한 기초화장만으로도 돋보이는 미모를 자랑하던 희연이었다. 그런데 오늘 작정하고 셰딩과 하이라이트까지 끝냈다. 그 결과 그 얼굴은 어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웠다.

“왜기는, 그때 내 동창회 때 괜히 계산까지 하고 갔다며. 그래서 내가 겸사겸사 커피나 한잔 대접하려고 불렀지.”

“어휴, 어머님. 커피는 제가 대접해야죠. 이렇게 좋은 선물도 주셨는데요.”

희연이 두 눈을 반짝였다. 오늘 그저 가벼운 인터뷰 정도를 생각했는데, 이건 그 이상의 수확이다.

“약간 걱정했는데 잘 받았나 보네요?”

“그럼요. 이렇게 친절하게 보내주셨는데 잘 받아야죠. 어머님 이거 제가 써도 되는 거 맞죠?”

“선물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받은 사람이 기분 좋게 써주면 보낸 사람도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니까.”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잘 쓰겠습니다.”

둘 사이에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갔다. 잠시 박 기자의 얼굴에 시선이 꽂혀있던 성민이 권 여사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선물? 엄마, 설마 그새 박 기자한테 뭐 보낸 거야? 아 쫌!! 내 주변 사람한테 기프티콘 그렇게 막 보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아휴, 기프티콘이라뇨. 성민 선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보다 어머님 식사 다하셨으면 케이크 한 조각 어떠세요? 제가 근처에 좋은 디저트 가게 알고 있거든요.”

“내가 요즘 몸매관리 때문에. 그보다 우리 성민이가 경기 때문에 좀 말라가는 것 같은데 둘이 가서 케이크 한 조각씩 해요. 난 먼저 일어날 테니까.”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권 여사를 바라보며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대한민국 평균이라고?

< 협상(2) > 끝

ⓒ 묘엽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