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46화 (47/287)

< 협상(1) >

“반갑습니다. 김성민 선수. 코스크만 코퍼레이션의 탐 콜린스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연락 드렸는데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아닙니다. 감사는 무슨. 마린스 소속 김성민이라고 합니다.”

“이거,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크시군요.”

큰 키에 짙은 금발. 훤칠한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

무언가 운동을 한 것 같은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옆에 그보다 많이 왜소한 동양인 남성이 그의 말을 통역했다.

-코스크만이면 좋은 회사지.

필 니크로의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려던 성민이 되물었다.

‘잠깐만요. 영감님 은퇴하신 지 벌써 50년쯤 지났는데 여기가 괜찮은 곳인지 아닌지는 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야 은퇴한지 50년이나 지난 늙은이가 알만한 회사면 크고 좋은 회사 아니겠냐.

‘그러니까 들어본 곳이니까 좋은 곳이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7년 전에 앤드류 알렉산더 녀석이랑 계약했던 회사다.

‘앤드류 알렉산더? 어떤 선수였습니까?’

-중간에 어깨가 망가져서 너클볼러로 전향했던 녀석이야. 결국, 빅리그까지 올라가지 못했지만 참 성실했던 녀석이지. 코스크만은 녀석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었어. 의리가 있는 곳이었지.

‘의리라. 요즘 같은 세상에서 대기업치고는 조금 특이한 곳이네요.’

시작은 성민에 대한 칭찬이었다.

지나간 경기들, 그리고 바로 어제 경기를 직접 보면서 매우 놀라웠다는 말을 양키답게 거대한 제스쳐를 덧붙여서 떠들었다.

저 거대한 덩치가 풍부한 표정으로 ‘와우!!’ ‘판타스틱!!’ ‘어메이징!!’ ‘오 마이 갓!!’을 연발하는데 마음속으로 열 번까지 세고 세는 것을 관뒀다.

계약을 위해 기분을 띄워주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진짜인 것 같은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괜히 대기업이 아니다.

“또한, 저희 쪽 정보에 따르자면 NPB 쪽과 이야기 중이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저희의 장점이 있습니다.”

“장점이요?”

“네, 물론 NPB와 계약할 생각인데 미국 에이전시가 웬 말인가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일본지사는 일본의 모든 에이전시 가운데서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물론 총 계약 금액에서는 몇몇 에이전시에 비해 부족합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미국에 본사를 둔 회사가 일본 시장에서 이만한 활약을 보인다는 점. 그리고 최상위권 선수들의 경우 오히려 일본의 에이전시가 아닌 저희를 택한다는 점에 주목해주셨으면 합니다.”

성민이 팔짱을 꼈다.

“흥미롭군요. 왜 최상위권 선수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지 이유가 있겠죠? 코스크만 코퍼레이션만의 장점, 그러니까 예컨대 사무실에 가면 공짜 쿠키가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 말이에요.”

“물론 공짜 쿠키라면 물론 언제든지 제공됩니다. 하지만 저희 코스크만 코퍼레이션의 장점은 고작 공짜 쿠키 정도가 아니죠. NPB 역시 최상위권의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바라는 것은 KBO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해외진출이죠.”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탐 콜린스가 자신의 패드와 연결된 영상을 띄웠다.

“최근 10년 동안 저희 코스크만 코퍼레이션이 미국에서 맺었던 계약의 현황입니다. 물론 총액 기준으로는 저희보다 훨씬 높은 그룹도 세 개나 되죠. 하지만 이걸 보시죠.”

“이건 외국인 선수의 계약 총액이로군요.”

“맞습니다. 이게 바로 NPB의 선수들이 저희와 계약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물론 단순히 계약 총액만이 저희의 유일한 장점은 아닙니다. 이것도 한 번 보시죠.”

성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저희가 빅리그를 권유하는 선수들은 무척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수들입니다. 저희의 자체적인 판단으로는 빅리그에서 충분히 성공할 만한 선수들이죠.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본래 데이터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죠. 이건 무슨 이유건 간에 그 데이터대로 돌아가지 못했던 선수들의 자료입니다.”

“데이터대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말은?”

“네, 빅리그에 안착하지 못했던 선수들의 자료라는 뜻입니다.”

“흐음······.”

성민의 신음에 탐 콜린스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당장 실패의 사례를 듣는다는 것은 기분 나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단 저희는 성민 선수의 성공을 확신합니다.”

“그런데요?”

“하지만 외국에서 뛴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된 일입니다. 같은 야구지만 세부적인 룰이 다르고, 암묵적인 규칙이 다릅니다. 사회의 문화가 다르고, 하다못해 음식이나 물맛도 다르죠.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 실패를 부를 수 있는 요소가 매우 많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저희는 오랜 노하우로 그 부분을 최대한 도와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만약, 아주 만약 실패한다면 그땐 이 데이터가 꼭 필요한 데이터가 될 겁니다.”

탐 콜린스가 펼친 것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리턴한 선수들의 연봉에 관한 데이터였다. 코스크만 코퍼레이션 소속 선수들의 정보, 그리고 그렇지 못했던 선수들의 정보다.

“보시면 전반적으로 매우 유의미한 차이를 보입니다. 심지어 이 준이치로 선수 같은 경우는 본인의 본래 구단으로 돌아가기를 고집했음에도 저흰 이 만큼의 성과를 거뒀죠. 제가 듣기로는 김성민 선수도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팀을 대표하는 로컬 프렌차이즈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한국으로 복귀한다면 다시 본래 팀을 원하시겠죠. 그럴 때 저희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필 니크로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악마야.

탐 콜린스가 말을 이어갔다.

“저희의 강점은 그게 끝이 아닙니다. 저흰 모든 에이전시 가운데 동아시아 삼국에 관한 가장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문화를 제대로 구분 못하는 머저리들과는 다르죠. 그렇기에 가장 알맞은 서비스를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말을 들어보면 저의 미국진출은 마치 확정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물론 NPB를 거쳐 가는 전략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긴 하지만 부상 복귀 후 첫 시즌이고, 메이저의 몇몇 보수적인 구단들, 그러니까 진짜 돈이 많은 구단은 그 1년은 쇼케이스로 충분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거든요. 무엇보다 너클볼러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늙음이 아닌 숙성이니까요. 당장 1년 혹은 2년 정도 NPB를 거쳐가는 것도 총액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일겁니다.”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마린스 리턴을 이야기하는 녀석치고는 제법 너클볼을 잘 아는 녀석이구나. 게다가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있어. 확실히 다른 문화에서 뛰는 건 매우 힘든 법이지. 나도 최근에 그걸 아주 강하게 느끼고 있다.

성민이 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일단 계약 조건을 주시면 검토해보고 말씀드리죠.”

“네. 여깄습니다.”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탐 콜린스가 마지막까지 선한 미소로 성민을 배웅했다.

그리고 성민이 사라진 직후, 그의 선해 보이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젠장, 이런 멍청한 새끼들 같으니.”

“네?”

“NPB라고? 대체 어떤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조사를 이따위로 엿 같게 한 거야? 너희들 지금 나 물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

“그럴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분명 저희 정보에 따르자면 김성민 선수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깊은 교감이 있었고 여러 가지 전략적인 측면을 봐도 NPB를 거쳐 가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게다가 방금 김성민 선수 본인도 일본에 꽤 깊은 관심을······”

탐 콜린스가 그의 말을 끊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일본에 관심 같은 소리 하네. 그 친구가 내 말에 관심을 가졌던 건 공짜 쿠키랑 한국 복귀, 그리고 NPB 선수들의 미국 진출 케이스 뿐이었어. 알아들어? 나머지는 그냥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마치 삼류 광대가 저글링 하는 꼬라지 지켜보듯이 쳐다봤을 뿐이라고.”

“하, 하지만!! 분명 카프 쪽 움직임을 보면!!”

“그건 그 머저리들도 너처럼 머리에 뇌 대신 두부를 넣고 다니나 보지. 지금 당장 본사에 연락해서 김성민 선수가 내년에 곧바로 미국 진출하는 경우로 판 새로 짜오라고 전해. 아냐, 잠깐만. 빌어먹을. 생각해보니 거긴 지금 드래프트로 정신없겠군.”

탐 콜린스가 꽉 조인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어쩔 수 없군. 일본지사 쪽 친구들 당장 날아오라고 해. 우리가 직접 짠다.”

“네, 알겠습니다!!”

데이터로 봤을 때보다 경기장에서 봤을 때 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봤을 때보다 직접 얼굴을 맞댔을 때 더욱 더 매력적이었다.

탐 콜린스의 감이 소리쳤다.

저 녀석은 스타의 자질이 있다.

물론 스포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실력이 안 된다면 스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녀석은 국가의 총규모로 봤을 때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국가의 선수다. 그리고 현재 KBO 출신의 선수 중 MLB에서 뛰는 선수는 없다.

미국의 경우를 봤을 때 평범한 한 개 주를 대표하는 수준의 선수만 되어도 선수 자체의 가치에 [email protected]를 시킬 만하다. 하물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주에 근접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라면?

“선발 로테이션에 꾸준히 들 수 있는 수준만 된다면 이건 대박이야. 무조건 잡아야 해.”

코스크만 코퍼레이션이 성민을 유혹하기 위한, 그에게 제시할 수 있는 가장 빛나는 청사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탐 콜린스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성민이 핸드폰을 펼쳤다. 부재중 전화만 무려 13통. 모조리 그의 모친 권 여사다.

“어, 엄마. 무슨 일이야?”

“어휴, 넌 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니.”

“바빴거든요? 전화 왜 했는데?”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문자 하나 할 시간이 없어? 잠깐 화장실 갈 때라도 엄마한테 어? 지금 바빠요. 이렇게 문자 보내주면 좀 좋아? 아니지. 잠깐만, 혹시 너 여자 만나니?”

“아니야. 그냥 일 때문에 바빴어. 근데 왜?”

“그래, 네 주변머리에 여자를 만나고 다닐 리가 만무하지.”

“아, 그러니까 전화 왜 했냐고.”

“됐고, 오늘 저녁에 뭐 해?”

“저녁에? 밥 먹고 예능 보다가 자려고 했는데. 왜?”

“저녁에 그때 그 고깃집 있지? 그때, 서면에 네가 맛있다고 했던 거기 있잖아.”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거기로 나와.”

“거기? 거기 비싼데? 엄마, 나 돈 없어. 그리고 거긴 법카 같은 거로 가는 곳이야.”

“너 돈 없는 거 엄마도 잘 알아. 엄마가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와. 7시까지. 알겠어?”

“어, 근데 그거 말하려고 전화 한 거야?”

-뚜뚜

자기 할 말을 실컷 끝낸 권 여사가 칼같이 전화를 끊었다.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대단하군. 인상적이야.

“뭐가요?”

-지금 통화에서 넌 전화를 왜 했는지 용건을 총 여섯 번 물어봤다.

“근데요?”

-그리고 네게 남은 건 일곱 시까지 나가야 하는 약속뿐이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정확하게 필요한 건 얻어내고 상대방이 원하는 건 하나도 주지 않았어. 지금까지 너의 비공식적인 에이전트가 어머니라고 했었나? 내가 보기엔 지금까지 네가 했던 선택 중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군.

“무슨, 원래 대한민국 엄마들은 다 이렇거든요?”

-글쎄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 협상(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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