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45화 (46/287)

< 슈퍼 스타(3) >

-하아

‘갑자기 웬 한숨입니까.’

-상황을 봐라.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나.

‘에이, 그래도 에러는 없었잖아요.’

-그래서 더 한숨이 나오는 거다. 이게 에러조차 아니라니.

애초에 에러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다. 에러를 정하는 것은 기록원이고 결국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못 받은 공을 에러로 처리한다.

즉, 수비범위가 넓은 야수들은 터무니없는 공을 에러로 둔갑시키고, 그 반대의 경우는 당연한 범타를 에러조차 아닌 안타로 둔갑시킨다는 의미다.

그리고 오늘 마린스의 우익수인 김호섭과 이루수인 박창명은 후자였다.

-차라리 김정엽인가 그 애송이가 낫겠군.

‘창명 형을 정엽이랑 비교하기에는. 정엽이야 아직 어려서 경험이 좀 부족해서 그렇지 야구 잘하는 애예요.’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오늘 저 녀석처럼 엉망진창은 아니었지.

‘요즘 계속 선발로 뛰었잖아요. 아직 어린 애인데 좀 쉬어줘야죠.’

-그래, 쉴 때도 있어야지. 그런데 왜 하필 네가 선발인 날에 쉬는 거냐.

‘감독님이 그렇게 판단했는데 뭐 별 수 있나요.’

사실 오늘 마린스의 수비에 에러는 없었다.

단지 그 에러 없는 수비라는 것이 필 니크로의 마음에 차지 않을 뿐이다.

[자, 5회 말, 원아웃 주자 2루. 재규어스의 7번 타자 박차현 선수가 들어옵니다. 앞선 타석 기록은 내야 땅볼 아웃이군요.]

성민이 피칭을 준비했다.

초구 너클볼.

느리게 날아가든 그 공을 향해 박차현이 번트를 시도했다.

5회 1사 2루. 예상치 못한 타이밍의 번트였다.

물론 단순히 타이밍만 생각한다면 상대는 야수의 실책이 아니면 거의 점수를 주지 않는 무적의 투수다. 번트가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민은 너클볼러인 동시에 150에 가까운 속구를 뿌리는 괴물이다. 존안에 공이 들어간다고 전제해도 가장 번트를 대기 힘든 공을 구사한다.

-딱!!

운 좋게도 박차현의 배트가 성민의 공을 건드리는데 성공했다.

박차현의 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루 주자를 진루시키는 보내기 번트의 방향으로 가장 좋은 곳은 3루 방향. 물론 성민의 너클볼은 타구의 방향을 조절할 만큼 만만한 공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저 행운이었다.

완벽하게 힘이 죽은 타구가 3루 파울라인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마린스의 삼루수 김진명이 공을 쫓았다. 그 사이 박동엽이 빠르게 3루로 커버를 들어갔다. 공을 잡은 진명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1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좋은 선택이었다. 3루는 이미 늦었다. 나빴던 것은 딱 하나, 굴러오는 공을 줍기까지 걸린 시간뿐이었다.

“세이프!!”

1사 주자 1, 3루.

재규어스의 감독이 움직였다.

대타 카드.

큼지막하게 퍼올린 타구가 희생 플라이로 이어졌다.

1:1

성민이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

“좋군. 투수가 흔들리지를 않아. 보고서에 있던 것처럼 예전 KBO 출신의 그 선수를 연상케 하는군.”

코스크만 코퍼레이션 소속. 탐 콜린스가 성민을 평가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런 야수들을 등 뒤에 두고도 평균자책점이 극도로 낮습니다. 단순히 기록된 수치 이상으로 좋은 투수죠.”

“지금 NPB쪽이랑 이야기가 되고 있다고 했나?”

“네, 현장에서 도는 소문에 의하면 선수 본인도 NPB쪽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조금 아쉽군.”

“아닙니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어차피 당장 MLB로 간다고 해도 KBO출신에 더군다나 너클볼러라는 점을 고려하면 금액적으로는 크게 차이 나지도 않죠. NPB를 걸쳐서 MLB에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하긴, 게다가 우리 입장에서는 나쁠 것도 없지.”

빅리그만 따진다면 코스크만 코퍼레이션은 업계 3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메이저 에이전시에게 NPB는 MLB로 진출할 선수를 가려내기 위한 사무소 수준에 불과했다. 현재 NPB에서도 손에 꼽히는 협상력을 자랑하는 코스크만 코퍼레이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면 일단 이번 경기를 끝내고 협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준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

마운드로 올라가는 성민의 얼굴이 싸늘했다.

-괜찮냐?

‘괜찮겠습니까?’

분명 에러는 없었다. 하지만 야수들의 수준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도 이전의 실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투수로서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비가 시원찮다면 빠따라도 괜찮던지, 그것도 아니다. 득점 지원도 영 시원찮다. 여섯 번의 공격 동안 고작 1점이라니. 물론 이관호도 나쁜 투수는 아니었지만, 지금 성민과 비교하면 한 수, 아니 두 수는 떨어지는 투수다.

-어쩌겠냐. 이런 팀에서 뛰는 네 업보라고 생각해야지.

‘저 빅리그 갈 때는 진짜 팀 꼼꼼하게 골라서 갈 겁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빅리그 어디를 가더라도 마린스보다 수비가 떨어지는 팀은 없다. 하지만 타구의 속도가 다르고 선수들의 움직임이 다르다. 그렇기에 빅리그 역시 작년 에러 100개를 넘긴 팀이 10개 팀. 마린스의 기록적인 127에러를 넘긴 팀도 4개나 된다.

물론 경기 숫자가 144경기와 162경기로 차이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빅리그 갈 때는 제발 팀 꼼꼼하게 골라서 가도록 해라. 직접 뛰는 너도 답답하지만 매일 그 꼴을 지켜보는 나도 죽을 맛이니까.

짜증은 짜증.

경기는 경기다.

마운드 위에서 로진백을 두들기고 공을 움켜쥔 성민의 얼굴이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지치지 않고 성민을 찍어대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보여준다.

6회 말.

재규어스의 타순은 다시 1번부터였다.

-세 번째 타순이다.

필 니크로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조심해라.

평균적으로 봤을 때 선발 투수가 세 번째 타순을 상대할 때 피OPS는 첫 번째 타순을 상대할 때보다 0.07가량 높아진다. 덕분에 최근 빅리그에서는 진짜배기 에이스가 아니라면 세 번째 타순까지 맡기는 것을 꺼린다.

물론 성민의 수준은 명백히 KBO를 넘어선다. 그는 KBO를 기준으로 세 번째 타순을 감당 가능한 진짜배기 에이스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번째 타순은 조심해야한다.

심지어 오늘 성민의 상대는 재규어스.

10개 구단을 통틀어 가장 높은 타격 생산성을 보이는 구단이었다.

재규어스의 1번 타자 김규찬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의 앞선 두 타석은 모두 내야 땅볼을 기록했다.

두 번 다 느린 너클볼에 당했다.

‘타이밍은 이제 슬슬 알겠는데, 이게 영 어렵단 말이지.’

앞선 두 번의 타석은 그의 완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본래 3할만 쳐도 훌륭한 것이 타자다. 그에게는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고 그것을 그냥 내다 버릴 생각은 없었다.

초구.

무엇이 올지는 뻔하다.

너클볼이다.

하지만 이게 참 어렵다. 무슨 공이 올지를 알아도 게스 히팅이 안된다. 던지는 본인도 어떤 궤적으로 날아갈지 모르는 공인데 게스 히팅이 될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성민의 경우는 너클볼이 두 종류나 된다. 골치 아프다.

‘이 녀석 보통 제일 잘 통하는 공을 초구로 집어넣는 경향이 있어.’

오늘 그에게 제일 잘 통한 공은 100km/h의 느린 너클볼.

성민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딱!!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김규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리던 공이 아니었다. 좋은 코스로 들어오기에 무의식적으로 휘두르기는 했지만 100km/h대의 느린 공을 기다리던 방망이다.

하지만 정작 들어온 공은 149.8km/h의 빠른 공.

성민이 웃었다.

[내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야 뜬공 아웃!! 6회 말, 김성민이 선두 타자를 공 하나로 잡아냅니다.]

‘저 녀석, 저거. 아주 눈 굴리는 것 좀 봐요. 하여간 고등학교 시절부터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애쓴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세 번째 타순에 상위 타자인데 복판에 냅다 속구를 꼽아버리는 건······.

‘저 자식 느린 너클볼 기다리는게 뻔해 보였는데요. 뭘. 게다가 규찬이 놈은 어차피 한가운데 대줘도 홈런 칠 깜냥이 안 돼요. 10년 동안 잠실에서 홈런 3개 친 녀석이에요.’

필 니크로가 성민의 대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김규찬이 공을 멀리 날릴 능력이 없다는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마린스의 야수들과 김규찬의 주력을 생각해볼 때, 굳이 공이 멀리 날아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장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성민은 수비가 아무리 개판이더라도 그저 투덜거리고 끝낼 뿐, 흔들리지 않는다.

성민의 피칭이 이어졌다

내야 땅볼 그리고 삼진.

7회 초, 마린스의 공격.

이관호가 또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오늘 성민이라는 강력한 투수에 대한 뜨거운 경쟁심은 그를 평소보다 한층 높은 수준으로 이끌었다.

-뻐엉!!

이미 6이닝을 던졌음에도 147km/h의 강력한 속구가 존을 통과했다.

“스트라잌!!”

심지어 제구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 이루수로 출장했던 박창명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백호창이 FA로 블레이즈에 갈 때만 하더라도 혹시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팀은 박동엽에게 자리를 내줬고, 박창명은 여전히 백업 내야수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어렵게 찾아온 소중한 출장기회다. 이렇게 허무하게 3타석 무안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이관호의 두 번째 공.

박창명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약했다. 하지만 운이 따랐다.

5회 초, 재규어스가 점수를 쥐어짜기 위해 사용했던 재규어스의 대타 카드가 독으로 작용했다. 삼루수의 글러브가 박창명의 타구를 잡아내지 못했다.

마운드의 이관호가 식빵을 구웠다. 방송으로는 나가지 못한 그 강력한 식빵이 재규어스 야수들의 귀에 들어갔다.

물론 재규어스의 야수들은 고작 이관호의 식빵 하나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린 것은 이관호 쪽이었다.

이미 6이닝을 던졌던 30대 중반의 투수에게 잊고있던 피로가 찾아왔다.

-딱!!

후속타자가 이관호의 공을 두들겼다. 잠실의 넓은 외야를 구르는 큼지막한 안타.

박창명이 힘차게 달렸다.

2루 지나 3루로 그리고 3루 지나 홈까지.

-뻐엉!!

재규어스의 야수들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나쁘지 않음은 어디까지나 KBO를 기준으로다. MLB의 몇몇 괴물 같은 외야수들처럼 외야에서 다이렉트로 홈에 송구를 꽂아넣는 괴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2:1

7회 초. 마린스가 성민에게 두 번째 득점을 안겨줬다.

그리고 성민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솔직히 이번 경기 성민이가 다 해 먹었다. 오늘도 성민이 아니었으면 폭망인 경기였음.-

-에이, 그래도 오늘은 다른 애들도 괜찮았잖아.-

-괜찮기는. 5회 쫄깃하게 만들었던 그 1실점. 시부럴 김호섭 그 돼지 새끼가 설렁설렁 뛰어서 이루타 처맞은 거 아냐. 제대로된 우익수였으면 그거 그냥 외야 플라이라고.-

-오늘 블루존에서 직관했는데 진짜 최악이었다. 무슨 대포 카메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찰칵찰칵거리는데 얘들은 야구가 어떻게 되건 아무 상관없이 그냥 사진만 찍어대더라. 원래 같이 응원하고 호응하는 맛에 직관 가는 건데. 거기다가 앞자리에서 사진 찍겠다고 시야 가리는 애는 진짜 뒤통수에 스파이크 날릴 뻔했다.-

-재규어스 얼빠들 이제 나이들 먹고 좀 잠잠해졌던 걸로 아는데, 갑자기 또 왜 그랬데?-

-오늘은 재규어스 얼빠가 아니라 김성민 얼빠였음.-

-맙소사. 잠실 경기인데 재규어스 얼빠가 아니라 김성민 얼빠라고?-

-인스타 가봐라. 지금 김성민 짤들로 난리 났다.-

***

“어이고, 이거 누구 아들인지 아주 훤칠하네.”

권 여사가 각종 해시태그가 잔뜩 붙은 인스타그램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미소지었다.

물론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는 사진은 아니었다.

#존잘#잠실직관#김성민#손에든건내선물#어깨깡패#허벅지가내허리

예쁘장한 여자가 성민 옆에 꼭 붙어 찍은 사진이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한참 인스타그램을 탐방하던 권 여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처음 보는 번호다.

“이게 누구지?”

< 슈퍼 스타(3)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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