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 스타(1) >
2032년 현재.
KBO의 왕조는 서울 재규어스다. 그들은 2015년 이후 현재까지 열일곱 번의 시즌에서 여덟 번 우승했다. 대단한 기록이다. 심지어 그 열일곱 번의 시즌에서 가을야구를 하지 못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울 재규어스를 왕조라고 하는 것은 아직 이견이 분분했다. 앞선 1986년부터 1997년까지 11년 동안 무려 8번의 우승을 차지했던 광주 호크스나 2010년대 통합 4연패 그리고 페넌트시리즈 5연패를 달성했던 대구 그리핀즈처럼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그들 역시 누구나 인정할만한 왕조가 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단 한번도 잡지 못했다. 그들은 17년 동안 여덟 번이나 우승하는 동안 단 한 번도 3번 연속으로 우승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KBO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리그의 정상에 군림했던 팀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왕조라고 확실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팀.
그렇기에 재규어스는 리그의 최강자임에도 항상 목이 말랐다.
한국에서 가장 넓은 야구장인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속칭 잠실 구장.
1982년에 개장하여 이제 50주년을 맞이하는 이 구장은 재규어스와 엘리츠 두 팀이 모두 홈으로 사용하는 조금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지어진 지 매우 오래된 건물인 만큼 신축에 관한 이야기는 20년 전부터 나오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회, 정치적 문제로 인해 지어진 지 50년 된 이곳에는 여전히 두 개의 프로팀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어우, 여긴 진짜 올 때마다 싫다니까.”
“마, 그래도 이거 조금 나아진 거다. 7년 전에는 진짜 어휴.”
“맞아. 그때는 진짜, 짬밥 되는 선배들만 라커룸에 짐 풀고 우린 복도에 짐 내려놓고 그랬었어.”
“그래도 이왕 리모델링 할 거면 좀 제대로 하지. 뭔가 어설프네요.”
“그때도 뭐 새로 지을꺼다 뭐다 말이 많았으니까. 솔직히 7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공사계획만 붙잡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그거 알았으면 리모델링 지금보다는 더 제대로 했겠지.”
사실 잠실의 공간이 특별히 좁은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구장 자체는 정상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두 팀이 홈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문제다.
본래라면 원정팀이 사용해야 할 라커룸 하나가 홈 라커룸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2013년 리모델링과 2025년 리모델링을 통해 그 부분을 개선하여 세 번째 라커룸을 마련하긴 했지만, 구장의 구조적 한계상 그 크기는 매우 작았다.
보통 선수들이 4시경에 갖는 늦은 점심이 라커룸에 케이터링 되는데, 음식이 놓인 공간을 제외하면 선수들이 앉을 공간 자체가 부족할 정도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의자라도 놓여있잖냐. 우리 때는 진짜 바닥에 앉아서 밥 먹었다니까.”
“근데 성민 선배는 어디로 간 거예요?”
“그 형은 잠실에서 등판하는 날에는 쪼그려 앉아서 밥 먹기 싫다고 따로 준비해온 샌드위치만 먹잖아.”
“근데 성민 선배 정도면 이제 라커룸에서 드시지 않아요?”
“지금이야 그렇지만, 예전엔 아니었으니까. 뭐 이제 루틴이 된 거지. 다른 팀은 그날 선발은 그래도 무조건 배려해주고 그런 거 있었다지만, 우리 팀은 그런 거 얄짤 없잖냐.”
필 니크로가 말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메이저 갈 거 생각하면 여기서 등판할 때만 아니라 평소에도 이렇게 싸가지고 다니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을 거로 생각한다. 음식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선발같이 중요한 날에는 자기가 직접 챙기는 편이 좋은 법이지.
“무슨 60년대도 아니고 이렇게 나오는 음식이 훨씬 잘 나옵니다. 괜히 직접 싸 가지고 다니다가 상할 확률이 더 높을 거예요.”
-빅리그의 투수들 상당수가 그렇게 하는 건 다 그런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거야 거긴 마이너 시절부터 자기 밥 싸가지고 다니는 게 습관 돼서 그게 루틴이 돼서 그런 거죠. 그리고 사람은 원래 얼굴 보고 밥 먹으면서 친해지는 겁니다. 음식도 좀 나눠먹고 그러면서요. 자기 샌드위치 싸다가 그거 먹는 거 그거 정 없어요.”
-그러는 너도 오늘은 이렇게 싸가지고 왔잖느냐.
“그야 저도 여기선 그러는 게 루틴이 된 거죠. 게다가 이제와서 제가 들어가 앉아 밥 먹으면 이제 자기도 잠실에서 테이블에서 편히 밥 먹을 짬 된 녀석이 저 형은 지금까지 매일 저렇게 먹다가 왜 갑자기 저러나 하고 원망 품고 그러잖습니까. 루틴 깨고, 굳이 원망까지 받을 필요는 없죠. 기껏해야 일 년에 서너 번인데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나아요.”
성민이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무엇보다 이 샌드위치가 이제 우리 엄마가 유일하게 잘하는 요립니다. 뭐 사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아들한테 밥 만들어주고 뿌듯해하는 유일한 순간인데 이제 와서 뺏긴 좀 그렇죠.”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민의 어머니인 권 여사는 요리를 매우 잘했다. 하지만 요리라는 것은 결국 기술의 영역이고, 기술은 쓰지 않으면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홀로 성민을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 성민이 하던 것은 야구였고, 야구라는 종목은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드는 종목이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어머니에게 요리를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민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한창 자라는 청춘, 심지어 운동까지 하는 성민에게 급식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프로에 와서 더는 귀찮게 도시락 싸줄 일이 없어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묘하게 섭섭해하더라고요. 근데 또 짬밥 안될 때는 따로 싸온 밥 먹겠다고 나서는 것도 힘들었단 말이죠. 근데 이 좁아터진 잠실에 선발 경기인 날은 좋은 핑곗거리였어요.”
성민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따라 샌드위치 소스의 맛이 더 선명했다.
컨디션이 좋다는 의미다.
-좋은 이야깃거리구나.
“뭐, 저도 잘 압니다. 나중에 자서전 같은 거 쓰면 꼭 넣을 겁니다. 원래 성공한 선수의 이야기에는 이런 신파도 하나 정도는 있어 줘야 아름다운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잠실에서 던지는 날에는 항상 잘 던졌다든지 그런 이야기도 있는 거냐?
“뭐, 보통은 그렇죠. 잠실은 KBO에서 가장 투수 친화적 구장이니까요.”
-그렇다면 좋은 이야깃거리는 이야깃거리겠구나.
“물론 제 폭망의 시작이었던 2027년에 2.1이닝 4피홈런 폭풍 강판도 여기서 하긴 했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성민은 이미 지난 등판에서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하지만 뭐 원래 이런 이야깃거리는 역경도 있어야 더 풍성한 법 아니겠습니까.”
잠실의 넓은 그라운드.
1회 초 마린스의 공격이 마린스답게 끝났다.
그리고 그라운드의 가장 높은 곳에 현시점 KBO에서 가장 강력한 투수가 섰다.
***
화요일 저녁.
평일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잠실의 2만 5천 석에는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상당수는 작년 우승팀이자 현 KBO의 최강팀인 재규어스를 응원하는 팬들이었다.
하지만 마린스의 팬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마린스의 팬들은 팀이 꼴찌를 달릴 때도 순위권의 관중 동원력을 보여주던 사람들이었다. 하물며 작년에는 3위를 기록했고 더군다나 오늘 경기는 이번 시즌 무적의 포스를 자랑하는 에이스의 등판이었다.
“지금, 지금 나오고 있어!!”
“어디? 어디?”
“저기, 저쪽.”
하지만 오늘 경기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풍경이 있었다.
마치 기자들이나 사용할법한 거대한 망원렌즈를 단 카메라들. 속칭 대포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경기장 곳곳에 포진했다.
“와, 실물로 보니까 진짜 존잘이네. 망원렌즈로 잡는데도 얼굴 각이 살아있어.”
“비율 실화? 거기다가 지금 공 잡는 손가락 좀 봐봐. 길쭉한게 진짜 예술이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새롭게 합류한 성민의 팬들이었다. 그 요란스러운 카메라와 탄성에 몇몇 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마운드에 서서 가볍게 공을 뿌리는 성민의 동작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1회 말 마린스의 수비 이닝이 시작됐다.
작년 서울 재규어스는 가장 높은 팀 OPS를 기록했다.
즉 작년 그들은 KBO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타자진을 보유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2032시즌 슬래시라인 0.311/0.407/0.386.
재규어스의 1번 타자 김규찬이 타석에 들어섰다.
한 방의 파괴력은 없지만, 공을 잘 보고, 어떻게든 방망이에 맞추는 능력이 있는 타자다. 게다가 발 역시 빠르다. KBO에서 1루까지 4초 미만을 찍는 타자는 열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 3.7초 미만을 찍는 타자는 오직 김규찬 뿐이다.
성민의 초구가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뻐엉!!!
“스트라잌!!”
존의 깊숙한 코스를 찌르는 146km/h의 강속구.
김규찬이 고개를 돌려 심판을 바라봤다. 이게 정말 스트라이크냐는 프로 10년 차의 베테랑에게는 허용되는 가벼운 제스쳐다. 심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김규찬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뭐야? 미경아 너 방금 저 소리 들었어?”
“어, 인터넷에 영상으로 볼 땐 이 정도 아니었는데 무슨 대포 소리 같은데?”
진짜 대포가 들었다면 코웃음 칠만한 이야기였지만, 태어나 이런 굉음을 들어볼 일이 별로 없었던 그녀들에게 146km/h짜리 속구의 포구음은 충분히 놀라웠다.
마운드의 성민이 김규찬의 뻔한 행동에 코웃음 쳤다.
‘하여간, 짜식이 잔머리는. 뻔히 스트라이크였던 거 알면서.’
-저것도 선구안에 자신 있는 타자 입장에서는 타당한 심리전이지. 심판도 사람이니 선구안으로 유명한 타자가 저렇게 나오면 자기가 혹시 틀린 거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상관없습니다. 뭐 어차피 내가 보더라인 타고 다니는 공 던지는 투수도 아니고. 저런 짓 해봐야 자기만 심판한테 밉보이는 거죠.’
김규찬이 성민의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이미 두 달 전 성민을 한 차례 상대해본 경험이 있던 규찬이었다. 성민의 너클볼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 너클볼.
그의 시선이 성민의 공을 쫓았다.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공.
그가 수백 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던 바로 그 공이었다.
하나, 둘. 그리고 셋.
김규찬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하지만 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딱!!
101km/h의 느린 너클볼.
지난 경기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공이었다.
머릿속에 그런 공이 있는 것을 넣어놨지만, 머릿속에 넣어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김규찬은 KBO가 아니라 MLB에서 뛰고 있어야 했다.
빗맞은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규찬이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이야.’
방망이를 내던진 김규찬이 빠르게 1루를 향해 질주했다. 최고 기록 3.68초. 평균 3.8초대를 찍는, 메이저를 기준으로도 80점 만점의 빠른 발이다.
많은 내야 땅볼이 그의 발 앞에 내야안타로 둔갑했다. 어쩌면 오늘도 그게 가능할 수도 있었다.
[2-유간 땅볼. 유격수 박동엽 빠르게 전진합니다!!]
만약 마린스의 유격수가 10 구단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어깨를 자랑하는 유격수 박동엽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뻐엉!!!
“아웃!!”
선두 타자 내야 땅볼 아웃.
상쾌하게 경기를 시작한 성민이 1회를 마무리 짓는데 필요했던 투구 수는 고작 여덟 개.
불과 3분 41초 만에 성민이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래, 이거지!!”
“야수 새끼들이 삽질만 안 하면 우리 성민이는 무적이라고!!”
“박동엽. 너 내가 계속 지켜본다. 계속 지금처럼 똑바로 가자.”
마린스의 팬들이 그 깔끔한 플레이에 만족했다.
그리고
“뭐야? 왜 벌써 내려가? 경기 벌써 끝난 거야? 공 몇 개 던지지도 않았잖아.”
“아냐, 야구는 총 9세트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아직 여덟 번 더 올라올거야.”
“아, 그래? 그러면 방금 같은 거 여덟 번 더 하는 거야? 근데, 그래도 너무 짧은 거 같은데.”
“온라인에 규칙 찾아보니까 상대편이 공을 쳐서 1루에 나가면 조금 더 길어진다는데? 이건 울 성민이가 너무 잘해서 그런 것 같아.”
거대한 카메라를 들고 온 몇몇 팬들이 너무 짧았던 수비이닝에 불만을 표시했다.
경기가 이어졌다.
< 슈퍼 스타(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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