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41화 (42/287)

< 에이전트(2) >

김현정 같은 얼치기가 아닌, 물 건너 진짜 제대로 된 에이전시.

작년 총 2억 7천만 달러 치의 계약을 달성한 거물 에이전트 빅터 모리츠가 부하직원 한센에게 물었다.

“어떻게 돼가고 있어? 조사 결과는?”

“그게 저희가 아직 한국 쪽에는 라인이 없는지라, 일본 쪽 직원을 동원해서 급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과가 어떻냐고.”

“그게, NPB 쪽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만 아직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고 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NPB 쪽이라······.”

“이번에 메츠 쪽에서 흘러나온 데이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선수, 올해 들어 갑작스럽게 좋아지긴 했습니다만 운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세부적인 데이터가 워낙 좋아요. 충분히 경쟁력 있습니다.”

“그런가?”

“네, 실제로 메츠뿐만 아니라 몇몇 빅리그 팀에서도 물밑으로 접촉하려고 한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희가 NPB 쪽 지부에는 NPB 팀과의 계약을 담당할만한 직원이 없다는 점입니다. 기껏해야 NPB의 선수들을 파악하기 위한 현장직원 몇이 전부죠. 만약 선수가 NPB에 가려고 한다면 케어해줄 방법이 없습니다.”

부하 직원의 말에 빅터 모리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소리.”

“네?”

“빅리그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팀이 있는데 NPB는 무슨 NPB야.”

“하지만 선수의 의지라는 것이.”

“그.러.니.까 그걸 케어하는 게 에이전트가 할 일이잖아.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그 비싼 연봉을 주는 이유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당장 한국행 비행기나 준비하도록 해.”

“직접 가시게요?”

모리츠는 문득 멍청하게 묻는 직원의 얼굴에 손에 들고 있는 펜을 집어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그런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다.

-퍼억

모리츠의 손에서 날아간 펜이 한센의 이마를 가격했다.

“멍청한 소리 하고 있네. 기껏해야 1000만 달러짜리 선수야. 지금 드래프트가 코 앞인데 내가 가긴 어딜 간다는 소리야. 이봐 한센. 생각을 좀 하라고. 생각. 생각. 생각!!!”

한센이 바닥에 떨어진 펜을 허겁지겁 주워들었다.

“펜 여기 있습니다.”

“이봐, 한센. 우리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자. 1라운드들 계약금이 평균 팔백만이야. 게다가 그 친구들 잘 관리해서 FA까지 가면 그게 또 수천만, 아니 어쩌면 작년에 해리슨처럼 억 단위가 될지도 몰라. 그런데 뭐? 기껏해야 천만짜리 선수를 직접 보러 갈 생각이냐고? 이제는 간단한 산수도 못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가는 길 조심하고. 가서 계약 꼭 따오라고. NPB 같은 건 전혀 생각도 못 하게 빅리그가 얼마나 좋은지를 머릿속에 확실히 박아 넣으란 말이야.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그럼 뭐해?”

“네?”

빅터 모리츠가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알았다며. 알았으면 당장 움직여야 할 거 아니야.”

“네. 넵!!”

***

사건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서울 원정 3차전 경기를 끝낸 저녁.

광주 호크스의 선수들이 홈으로 내려갈 팀 버스를 향해 털래털래 걸었다. 패배는 있을 수 있다. 심지어 상대는 우승 후보인 서울 브레이브스였으니까. 하지만 스윕패라니.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야구는 본래 3번을 싸우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 순위를 결정짓는 것은 나머지 한 번의 승패에 달렸다.

실제로 같은 리그를 뛰는 수준의 선수들끼리 경기를 한다면, 대체선수급의 선수로만 팀을 구성해도 승률은 33%가량 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3연전을 모조리 패배하는 스윕패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호크스의 타자 김기철은 브레이브스와의 3연전에 모두 선두 타자로 출장해서 14타석 13타수 1안타라는 굴욕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가방도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면 안 됐다.

“규리야. 저기, 너 좋아하는 김기철 선수도 있네.”

“아빠, 그냥 아빠가 대신······.”

“어휴, 부끄러워하기는. 그러지 말고 얼른 가서 ‘사인 하나 해주세요.’ 해봐.”

이제 막 열살 즈음 됐을까?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귀여운 여자아이 하나가 머뭇거리며 기철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저 싸인 하나만 해주세요.”

물론 변명거리는 많았다.

패배로 기분이 좋지 않았고, 짐은 무거웠으며, 구단 버스는 이제 다시 광주까지 먼길을 가야 했다.

또한, 그 근처에 있는 아이는 그 아이 하나 만이 아니었고, 이 아이 하나에게 사인을 해주면 그 뒤의 다른 아이들을 거절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버스에는 기철보다 나이 많은 선수들이 일찌감치 자리 잡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

아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철이 그 표정을 외면한 채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는 구단 버스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가장 커다란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에 글 하나가 올라왔고, 그 글은 수많은 추천과 댓글을 받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전 광주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광주에서 다녔습니다. 다행히 공부는 제법 한 덕분에 대학은 서울로 진학했고 취업도 서울에서 했죠. 열심히 일했고, 결혼도 했습니다.

딸도 하나 있어요. 다들 그렇듯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광주라고는 할머니 할아버지 보러 일 년에 두어 번 내려가는 게 전부인 아이입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지 광주 호크스의 열렬한 팬입니다.

일에 치이느라 이제는 주전 선수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빠 대신에 선수들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응원가까지 하나도 안 틀리고 다 외우고 있어요.

오늘 마침 고척에서 호크스 경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평일에는 야구장은커녕 딸아이랑 제대로 놀아주기도 힘듭니다. 일 끝나고 집에 오면 여덟 시에요. 씻고 밥 먹고 하면 딸은 어느새 자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 모처럼 아빠 노릇 제대로 해보겠다고 딸내미 손 잡고 고척에 갔습니다. 솔직히 오늘 경기 엉망이었어요. 경기 보는데 웃음밖에 안 나더군요. 그래도 딸내미는 뭐가 그리 좋은지 9회까지도 아주 포기하지 않고 응원하더라고요. 9회 초에 외야플라이에 어찌나 실망하던지.

경기 끝나고 잠깐 버스 근처에서 대기했습니다. 혹시나 사인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야구공이랑 유니폼도 준비했고요.

하, 선수들 빠르대요. 주루를 그렇게 했으면 오늘 경기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속도였습니다. 거의 마지막으로 김기철 선수가 나오더군요. 딸내미가 제일 좋아하는 선숩니다. 틈만 나면 김기철 응원가를 불러대서 제 귀에 아주 못이 박혔어요. 그놈의 날쌘돌이인지 뭔지. 딸내미가 유니폼 들고 가서 사인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야구공도 아니고 자기 유니폼인데, 어지간하면 잠깐 사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근데 매몰차더라고요. 게다가 자기 응원가처럼 날쌘돌이는 맞더군요.

오는 길에 딸내미가 어찌나 우울해하던지.

물론 선수도 퇴근길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퇴근길에 잔업 생기면 엄청 싫거든요. 근데 말이죠. 잔업 맡긴 거 못하겠다고 하면 회사가 나 짜르거든요.

그러니까 나도 이제 내 마음에서 호크스 짤라도 되는 거 맞죠?]

-아직도 안 짤랐음?-

-역시 갓크보. 오늘도 크보가 크보했을 뿐이다.-

-이건 그래도 쫌 너무하네. 어린 애가 해달라면 그깟거 좀 해주지.-

-그래 이래야 사인에 ‘희소 가치’가 있지. 잘한다 갓크보.-

-왜 한국 프로 스포츠 중에서 유독 야구만 더 이럴까? 언론 타면 그때만 반짝이지 바뀌지를 않네.-

-배가 덜 고파서 그럼. 비인기 종목들 가 봐라. 자주 가잖아? 팬 이름도 기억해줌.-

-근데 이것도 구단별, 선수별로 편차가 좀 있음. 그냥 쟤들이 유독 더 저러는 거임.-

-하긴 수도권 구단은 그래도 좀 잘 하더라. 솔직히 엘마호 중에서 엘리츠는 잘 해주는 편임.-

-갑자기 마린스 스플뎀 무엇?-

-거기도 팬 서비스 개판이기로 유명하잖아. 오죽하면 용병도 사인 안 하고 튀는 구단 아님? 얼마 전에도 그거 글 올라왔었잖아.-

-와, 그 글을 또 그렇게 해석하네? 그거 결국 김성민이 훈훈하게 잘 마무리 해준 사건 아님?-

-닉 해리슨 개새끼.-

-마린스 10년 전인가 그걸로 한번 크게 터지고 분위기 싹 바뀌었잖아. 이제는 선수들 대부분 사인 잘 해주는 편임.-

-맞아. 나 4년 전에 식당에서 김성민 봤었는데. 솔직히 그때 김성민 존나 못해서 욕 오지게 하던 시절이었잖아. 근데 사인해달라고 A4 내미니까 씩 웃더니 자기 차 트렁크에서 공 가져다가 거기 사인 해주더라. 내가 그날 이후로 불지른 날에도 걔 기사에 악플 조심스럽게 담.-

-달긴 단다는 소리네?-

-불지른 날에 패드립 안하는 게 어디냐.-

-그건 ㅇㅈ-

-근데 용병이 튀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임?-

-3월인가? 닉 해리슨이 공항에서 사인 안 하고 튀었었음. 그것도 그 애 아빠가 여기 글을 올렸음. 주소는 https://blog.munpia.com/kjy5601/novel/181655/page/1/neSrl/2826180.-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촉발된 팬서비스 관련 기사가 일파만파로 번지기 시작했다. 커뮤니티에서 인터넷 기사로, 인터넷 기사에서 이제는 TV의 뉴스로.

사실 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KBO의 팬서비스가 개판인 게 하루, 이틀 이야기도 아니고, 이건 본래 잊을 만하면 정기적으로 터지는 일종의 정기행사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특별한 점이 있었다.

“아니, 이건 진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요. 보세요. 얼마나 선수 관리를 안 하면 용병으로 온 선수마저도 이럽니까.”

“맞습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저 선수 사인 꼬박꼬박하던 선수거든요. 근데 1년 지났다고 저렇게 됐다? 이건 KBO의 팬 서비스 문화 자체가 아주 개판이라는 소리예요.”

지금까지 팬 서비스가 문제가 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최소한 외국인 용병이 그 문제의 중심에 선 적은 없었다.

그렇게 호크스 선수가 지른 불이 3월에 있었던 닉 해리슨에게까지 화르륵 번졌다.

***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게 그러니까 닉 해리슨 선수가 공항에서 사인을 안 해준 일 때문에······.”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십니까? 나도 테레비 보고 사는 사람이에요. 테레비 틀기만 하면 아주 지긋지긋하게 나오는데 설마 그걸 모르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지 말고, 죄송할 시간에 대책을 내놔야 할 거 아닙니까. 그냥 그렇게 계속 죄송만 할 생각입니까? 윗선에서 지금 뭐라고 하는지나 아십니까? 대체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겁니까. 대체 지금 어쩔 생각이냐고요.”

“그, 그게 그러니까.”

마린스의 김호산 사장의 호통에 이학준 단장이 쩔쩔매며 답을 하려 했다.

물론 김호산은 지금 당장은 대답보다 화를 낼 상대가 더 필요했다. 그의 호통이 이어졌다.

“요즘 성적이 그래도 좀 괜찮게 나와서 윗선에서도 흡족해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 하나 수습도 못 하고 말이야. 대체 팀이 성적을 내고 있으면 프런트는 그걸 돕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구설수나 퍼지게 하고.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그 죄송할 시간에 대책을 내놓으라고 몇 번을 이야기합니까.”

“죄, 죄송합니다.”

“에잉, 이만 나가 보세요. 나가서 어떻게든 책임지고 일 수습하세요. 알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 3월에 있었던 일이 이런 식으로 터지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관리를 하라는 말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내리누르며 팀장급들을 회의실로 소환했다.

학준의 속이야 어떻건 지금은 일단 벌어진 일을 해결할 시간이었다.

< 에이전트(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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