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칰꼴라시코(4) >
투수의 스탯 중에는 Win(승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웃긴 스탯이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고, 그렇기에 경기에 승리한 영광이나 패배한 오욕을 한 명의 투수가 차지하는 것은 불합리 그 자체다.
다만 그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이 승리라는 스탯은 야구라는 종목이 성립한 이후 정말 오랜 시간 동안 투수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 활용됐다.
물론 현대 야구에 이르러서는 그 중요성이 크게 희석되긴 했다. 구시대적이라 평가받는 KBO의 연봉 고과에도 승리는 선수의 이미지로밖에 사용되지 못할 만큼 말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같은 값이면 승리가 많은 투수가 우대받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수상에 있어서 그러했다. NPB의 경우 아직까지 사와무라상 조건에 15승이 빠지지 않았고, MLB 역시 사이 영 상에 이닝과 평자책. 그리고 삼진과 승리를 고려한다.
KBO 역시 마찬가지다. NPB의 사와무라상처럼 15승 달성이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KBO의 최동원 상 역시 15승을 후보자의 충분조건으로 한다. 또한, 투수 골든글러브에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스탯 역시 승리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승리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선수 본인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막 이후 6연승.
현재까지 평균자책점 0.56.
그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성민의 일곱 번째 승리가 날아가게 된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마린스 덕아웃의 분위기가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가만히 있어도 괜찮겠어? 분위기 개판 같은데? 이전에 하던 것처럼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내가 보기엔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다니까요. 어차피 야구 저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요.’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이번에 제일 크게 실수한 애가 정엽입니다.’
-그런데?
‘걔 부경고 121기에요.’
실점에 가장 큰 지분이 있는 김정엽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늘 벤치에서 대기 중이던 박태경이 김정엽의 어깨를 두들겼다.
“인마, 인상 펴라. 누가 보면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줄 알겠다.”
“하지만······.”
“마, 성민이한테 미안하면 어떻게든 뒤집을 생각을 해야지. 죽상만 하고 있다고 뭐가 생기겠냐.”
정엽이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성민이가 너 4년 후배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신경도 많이 써줬는데 실수해서 그게 더 미안해서 그러냐?”
“······네.”
“선배가 후배 밥 사주고 하는 건 당연한 거지, 뭐 그런 거로 미안해하고 그러냐. 그리고 성민이 저 새끼는 내가 역전 쓰리런 날린 직후에 3자책으로 경기 다시 뒤집어놓고 실실 웃으면서 역전에 재역전으로 영웅이 될 찬스를 만들어줬다고 우긴 새끼야.”
“성민 선배가요?”
“그래, 물론 지놈 딴에는 엄청 미안했는지 나중엔 술 좋은 거 사면서 고맙다고 울더라.”
“성민 선배가 울었다고요?”
“뭘 놀라고 그래. 쟤라고 애송이 시절이 없었을 것 같냐? 그리고 내가 그 경기 다시 2타점 적시타로 뒤집어줬는데 울어야지 그럼. 솔직히 그 때 저 새끼 그때 나 아니었으면 아주 역적 됐을 거야.”
말을 끝낸 박태경이 여전히 울상인 정엽의 얼굴을 양손으로 끌어올렸다.
“자, 저기 성민이 좀 봐라. 저게 경기 포기한 얼굴이냐? 너도 쟤 지금까지 평자책 몇 점인지 알지? 0.5점대야 0.5점대. 쟤가 여기서 더 점수 줄 것 같아?”
“아뇨.”
“그래. 쟨 이제 점수 절대 안 줄 거다. 옛날에 내가 재역전 해줬던 것처럼 저 새끼도 저기서 점수 절대 안 줄 새끼라고. 그러니까 너도 지금은 뻔뻔하게 고개 들어. 그리고 나중에 새꺄, 고맙다고 비싼 술 사면서 징징 짜면 되는 거야. 처음부터 전부 다 잘하는 새끼가 어딨겠냐. 후배가 똥 싸면 선배가 그거 좀 닦아주고 서로서로 그러면서 가는 거지.”
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 니크로가 묘한 눈으로 성민을 바라봤다.
성민이 서둘러 변명했다.
‘미리 말하지만 운 적 없습니다. 저거 완전 뻥카에요. 애초에 저 그날 경기에서 7이닝 4실점밖에 안 했다고요. 솔직히 선발 투수가 7이닝 4실점 했으면 그게 욕먹을 성적은 아니죠.’
-그래, 알겠어. 근데 그건 둘째치고 너만 그런 줄 알았더니 쟤는 또 왜 저래? 너희들은 야구 할 시간에 야구 안 하고 무슨 스피치 학원에 다니냐? 너희들 대체 정체가 뭐야? 야구 선수가 맞긴 한 거야?
‘에이, 태경이 형 프로 짬밥만 14년 찹니다. 게다가 리더십 있다고 소문 난 사람이에요. 저 정도는 해야죠. 물론 좀 갈라치기로 자기 사람만 챙기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필이 성민의 마지막 말을 대신했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려고 했지. 넌 그 갈라치기 안쪽에 속해있으니까 말이야.
‘이제는 말 안 해도 잘 아시네요.’
-빌어먹을. 하여간 이 팀은 죄다 썩었어.
‘뭐, 그렇다고 그렇게 썩었다고 표현하실 것까지는······.’
-파벌에 따라서 어떤 놈은 실책 해도 괜찮다고 격려해주고 어떤 놈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이게 팀이냐?
‘에이 그건 그냥 사소한 기 싸움이죠.’
-사소한 기 싸움?
‘저기 보면 정현이 형도 정엽이 탐탁잖게 보고 있잖아요.’
-그래도 다르지. 예전에 동엽이라는 녀석이 실수했을 때는 이렇게 공공연하게 대놓고 두둔해주는 녀석이 없었잖아.
‘그거야······.’
-그거야?
말꼬리를 흐린 성민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아!!
‘뭐 그런 거죠.’
사회 어디를 가건 통용되는 법칙이 있다. 어설픈 실적은 인맥으로 묻을 수 있다. 하지만 인맥으로 묻을 수 없는 압도적인 실적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다.
프로 야구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커리어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현재의 폼이다. 그리고 현재 폼에서 성민은 팀 내, 아니 KBO 전체를 통틀어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이 녀석은 인맥까지 튼튼하다.
본래도 성골과 비주류의 팀 내 파워는 6.5:3.5 정도로 성골 쪽이 우세했다. 거기에 계파를 초월할 만큼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녀석이 더해졌다.
하물며 오늘 실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성민이 같은 계파다. 아무리 엉망진창인 실수라고 해도 현정현이 나서서 질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경기가 계속됐다.
이전 이닝까지 마린스의 정상적인 수비를 지켜보던 팬들은 쌓여가는 마일리지에 불안해했었다.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무려 40년이나 우승하지 못한 팀의 팬이자, KBO 예능의 정점을 노리는 팀의 팬이라면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렇다면 피닉스는 어떨까?
“시발, 이제 6회인데 벌써 역전했네.”
“야, 좋은 일에 왜 욕을 하고 그래?”
“너 이 경기 이길 것 같냐?”
“왜? 못 이길 것도 없지.”
“야, 넌 피닉스 팬질이 몇 년인데 아직도 피닉스를 모르냐?”
“너야 말로 피닉스 팬질이 몇 년인데 재수 없는 소리 그만 하고. 그냥 지금을 즐기라고. 일단 이기고 있잖아.”
당연히 피닉스의 팬들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엘리츠, 마린스, 호크스와 함께 야구가 아닌 예능으로 KBO 정점을 노리는 팀의 팬이었다. 지고 있을 때는 그것대로 화가나고, 이기고 있을 때는 그것대로 불안하다.
-딱!!
장진철의 126km/h 슬라이더가 제대로 두들겨 맞았다.
우중간을 꿰뚫는 밀어친 타구.
마린스의 용병타자 맷 데이비스가 이루를 밟았다.
“아오, 정감독 이 돌탱이는 대체 뭐 하는 거야. 장진철 저 새낀 안된다니까? 당장 투수 교체하라고. 130도 안 되는 똥볼이 지금 말이냐?”
관객들이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가 아니더라도 피닉스의 정병호 감독 역시 진철의 강판을 진지하게 고려 중이었다.
5이닝 동안 3실점.
퀄리티 스타트에는 미치지 못해도 이번 시즌 진철의 평균자책점이 5점 후반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훌륭한 기록이다.
물론 그 훌륭함이 진철의 피칭보다는 마린스의 어처구니없는 영웅스윙과 주루사 그리고 병살타에서 나온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5회의 4점은 그야말로 행운 그 자체였다.
정병호 감독의 시선이 마린스의 덕아웃을 향했다.
김성민.
괴물이라는 단어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투수다.
과연 5회와 같은 행운이 또 찾아올 수 있을까? 정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마린스가 불펜을 올리지 않는 이상 추가점은 힘들다. 하지만 마린스 야수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지금의 1점 차이를 지키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 준비 됐냐?”
“네. 아까 5회 때부터 몸 풀고 있었답니다.”
“그러면 진철이 내리고 민우 올리자.”
올해 22살의 젊은 불펜 투수.
194cm의 큰 키에서 나오는 최고 149km/h의 속구가 일품인 피닉스의 불펜 김민우가 올라왔다.
쌓아 온 커리어는 훌륭했지만, 현재의 폼이 엉망인 진철이었기에 고작 6회 안타 하나를 두들겨 맞았음에도 찍소리조차 하지 못한 채 마운드를 양보했다.
-뻐엉!
147km/h의 강력한 속구가 미트를 두들겼다.
“그래, 이거지. 장진철 똥볼 보다가 이거 보니까 이제 속이 좀 시원하네.”
“모처럼 정 감독이 제대로 움직였네.”
맷 데이비스에 이어지는 마린스의 6번 타자는 오늘 경기 2타수 무안타 1삼진임에도 여관을 하나 세운 덕분에 1득점을 기록 중인 박동엽이었다.
‘동엽이 형 정도야 뭐.’
마운드의 김민우가 가볍게 공을 움켜쥐었다. 2군 무대에서 김민우가 박동엽을 상대로 13타석을 던지는 동안 허용한 안타는 단 하나. 그나마 단타밖에 없었다. 자신을 가질 만하다.
초구.
노리는 곳은 몸쪽 낮은 코스 빠른 공.
물론 몸쪽 낮은 코스를 노렸다고 거기로 공이 펑펑 들어간다면 최고 149km/h를 던지는 투수가 KBO에서 불펜을 할 이유는 없다.
한가운데 높은 코스.
컨디션이 가장 좋은 박동엽의 방망이가 김민우의 공을 후려쳤다.
-딱!!!
내야 땅볼.
피닉스의 이루수가 몸을 날렸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그의 글러브 끝을 두들긴 타구가 불규칙하게 굴절되어 바깥으로 흘렀다. 또 한 번 투수와 상관없는 빅 이닝이 시작됐다.
하지만 앞선 이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마린스가 예능을 벌이던 시점에서 마운드에 선 투수는 마린스에서만 10년째 뛰고 있는 김성민이었다면 피닉스의 마운드에 선 투수는 고작 22살. 1군 무대라고는 작년 확장 로스터 때 6경기. 그리고 이번 시즌 11경기를 뛴 것이 전부인 김민우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예능에 반응하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에러가 나고 볼질을 하고 두들겨 맞아서 점수가 나고 투수가 무너졌다.
투수가 교체되고 또 점수가 나고 또 투수가 무너졌다.
그리고 패전처리 조가 올라와 장작을 쌓고 불을 질렀다.
그렇게 3이닝이 더 흘러갔다.
“정 감독 이 개새끼야!! 투수 교체를 그따위로 하니까 다 이긴 경기를 지는 거 아니야.”
“진철이 오늘 어? 꾸역꾸역이지만 잘 막고 있었는데, 2루타 하나 내줬다고 김민우 그 새가슴을 마운드에 올리냐? 니가 제 정신이야?”
“아주 시발, 불펜이라곤 죄다 유리 멘탈들만 모여서. 에러 좀 했다고 볼질이나 해대고. 이게 야구냐!! 이게 야구야?”
“야수 이 새끼들도 그래. 내가 야구를 하랬지 배구를 하라고 그랬냐? 왜 공을 안 받고 토스만 하냐고 토스만!!!”
생수병에 담아온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어르신들이 불콰한 얼굴로 고함을 질러댔다.
전광판의 점수는 17:10으로 그사이 피닉스 역시 6점을 추가했다. 물론 그중 오직 1점만이 성민이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올라왔던 7회 말에 내준 무자책 1점이었다.
사실 오늘 피닉스와 마린스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두 팀 모두 야구 대신 예능을 선택했다.
단지 차이라면 마운드에 선 투수가 그 예능에 무너졌느냐, 혹은 무너지지 않았느냐 뿐이었다.
7이닝 5실점 0자책 시즌 7승.
성민이 또 한 번 마린스의 예능을 이겨냈다.
< 칰꼴라시코(4)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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