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38화 (39/287)

< 칰꼴라시코(3) >

처음에는 그저 성민의 피칭만 눈에 들어왔다.

“이건 조금 심하군요.”

하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민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의 ‘수준’이었다.

“분명 배트 스피드는 나쁘지 않아요. 달리는 것도 제법 빠르고요. 그런데······.”

“수비가 문제지.”

“네. 그겁니다.”

제프 미야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프리 켄트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KBO와 MLB간에 가장 큰 격차를 투수라고 생각하지만, 난 오히려 수비 쪽이 더 크다고 생각해. 뭐 그건 NPB쪽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지.”

“물론 오늘 경기가 엉망이긴 합니다만 그 정도인가요?”

“그래, 너도 동아시아 쪽 전담을 하려면 이 부분은 확실히 생각해둘 필요가 있어. 물론 MLB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비가 종종 나오지. 특히 요즘 보스턴을 보면 아주 엉망진창이야. 거긴 그린 몬스터를 전담할 좌익수를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답이 없으니까. 하지만 똑같은 엉망진창이라도 수준이 달라. 왜일까?”

조프리의 질문에 제프가 답했다.

“글쎄요. 타구 속도?”

“타구 속도라. 뭐, 반은 맞았어. 그리고 거기에 하나 더 하자면 주자의 속도도 다르지. 그건 결국 뭐다?”

“수비의 난이도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군요.”

“그래, 수비의 난이도가 다르지. 지금 저 친구들 수비는 과장 조금 보태서 리틀리그 수준이야.”

“하긴, 조금 전에 외야 플라이로 1점을 내줬던 리틀리그 홈런을 보면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네요.”

조프리 켄트의 이야기처럼 KBO 아니 NPB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야구와 MLB의 가장 큰 수준 차이는 수비에서 발견된다.

NPB나 KBO 최고의 유격수가 메이저로 갔을 때 평균 이하의 유격수 수비를 기록하고 삼루수나 이루수로 전환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수를 평가할 때는 기록보다 조금 더 깐깐하게, 그리고 투수를 평가할 때는 기록보다 조금 더 후하게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 특히 BABIP 관련해서.”

“에이, 근데 그건 스탯캐스트 이전 시절 이야기잖습니까. 어차피 요즘은 그걸로 다 평가하니까······.”

“멍청하기는. 그걸로만 평가할 수 있으면 우리가 여기 와서 이럴 필요가 없지. 너도 그랬잖아. 숫자로만 야구를 보는 것들은 꼭대기에 가면 안 된다고.”

“그건 그렇죠.”

“오늘 경기만 보더라도 그래. 아마 기록만 본다면 오늘 우리가 느꼈던 감정을 절대 느낄 수 없을 거란 말이지.”

“예컨대 지금 투수의 표정 같은 거 말씀이신 거죠?”

“그래, 바로 그거야.”

그들의 눈이 마운드로 향했다.

등 번호 27번.

모자를 고쳐 쓰는 성민이 하늘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방금 있었던 최악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성민아,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웃는 거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기뻐하라. 사람들이 너를 찾으리라. 인생의 쓴 잔은 혼자 마셔야 하는 법이다.

‘아, 영감님. 지금 상황에서 그런 명언 같은 거 하셔야겠습니까? 그리고 영화 대사 슬쩍 고쳐서 명언인 척하셔봐야 하나도 멋없거든요?’

-이런 무식한 놈이? 윌콕스도 모르느냐?

평생 야구만 해온 성민이 미국의 여자 시인 따위 알리가 만무하다.

‘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제 어쨌거나 4:3이라 이 말이네요.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그래, 성민아 역전당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넌 아무 잘못이 없어.

‘당연하죠. 뭐 제가 납치범한테 사랑 느끼는 스톡홀름 증후군도 아니고. 여기에 책임감을 왜 느낍니까. 이게 다 저 새끼들 잘못인데.’

-그, 그래. 그건 그렇지······.

성민의 시선이 야수들을 스쳤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약 80미터 떨어진 좌측 외야로 향했다.

이곳은 청주구장

좌측 담장까지 거리가 고작 100미터인 주제에 펜스 높이가 2.3미터 밖에 안 되는 치명적인 구장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불과 12분 전.

선두 타자 삼진 이후 두번째 타자의 내야땅볼.

마린스의 이루수인 정엽이 공을 더듬으면서 시작됐다.

1에러 출루.

그리고 후속 타자의 내야 땅볼. 동엽이 공을 잡았다.

사람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다. 5만 원짜리 로또 4등만 당첨돼도 날아갈 것처럼 몸 상태가 좋아지는 게 사람이다. 앞선 이닝 인사이더 파크 여관을 세웠던 동엽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가 판단했다.

가능하다.

공을 잡아 그대로 이루수인 정엽에게 토스했다. 글러브에 담긴 공을 오른손으로 뽑지 않고 던져버리는 그야말로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법한 멋진 플레이였다.

다만 문제는 여긴 메이저리그가 아니었고, 공을 받아야 하는 이루수는 그런 플레이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잘만 이뤄졌다면 병살타. 그냥 무난하게 갔더라도 진루타 정도로 끝났을 땅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1사 1, 2루.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탄식했다.

역시 이 팀은 너무 대단한 플레이를 해도 안 되는 팀이다.

하지만 성민의 멘탈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것은 너클볼로 충분하다.

그의 공이 춤을 췄다.

1사 1, 2루. 오늘 처음 경험하는 위기상황에서 성민은 조금 더 최선을 다해 공을 던졌다.

위력적인 피칭이 내야 인플라이를 이끌었다.

이제 2사에 1, 2루.

다섯 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역시 느린 너클볼.

성민의 100km/h의 느린 너클볼은 평균 1.4회전을 기록한다.

하지만 득점권에 주자가 가 있는 위기 상황에서 성민의 집중력이 한층 더 예리하게 빛났다.

그리하여 성민이 지금 던진 99km/h의 느린 너클볼은 홈플레이트까지 고작 0.9회의 회전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 춤추듯 날아오는 너클볼이 너무 위력적인 탓이었을까?

공을 받아낼 혁준의 눈동자와 미트가 공과 함께 춤을 췄다.

[빠, 빠졌습니다!! 포일!! 포수 포일!!]

하지만 야구에서 좋은 공, 특히 좋은 너클볼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패스트볼(passed ball). 일명 포일. 방망이를 헛돌렸던 타자가 1루를 향해 질주했다.

순식간에 2사 만루의 상황.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환장할 부분은 그 만루까지 투수의 잘못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시발, 마린스 야수 새끼들이 어쩐 일로 잘한다 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음.-

-야, 불길이니 마일리지니 이야기했던 놈들 나와라. 니들 때문에 부정탔잖아.-

-박동엽 저 새낀 하여간 안 될 새끼임. 거기서 겉멋 수비를 왜 함? 존나 글러브에서 공을 정상적으로 뽑아서 던져야지 그딴 플레이를 왜 하냐고.-

-야, 여기서 박동엽 까는 건 좀 아니지. 저건 솔직히 김정엽만 똑바로 했으면 하이라이트감 아니었냐?-

-권혁준 쟤는 지금까지 잘하다가 왜 이런 상황에 공을 흘림? 아, 진짜 마린스 시발.-

-박동엽한테 묻혀서 그렇지, 김정엽도 존나 야구 진짜 아. 빡치네.-

-아니, 왜 우리 팀은 3경기 중에서 1경기는 꼭 예능으로 가냐고. 그냥 시즌 내내 다큐멘터리로 가면 안 되냐?-

-3경기 중에서 1경기꼴이라니. 마린스 경기를 너무 띄엄띄엄 본 거 아니냐? 얘들은 50% 확률로 예능으로 간다.-

-야, 그래도 오늘 상대 피닉스잖아. 그리고 투수도 성민이고. 잘 할거야. 7승 가야지.-

타석에 피닉스의 4번 타자. 박도명이 들어왔다.

KBO 커리어 8년.

외국에 진출하기에는 미묘하게 부족한 성적이지만, 매년 꾸준하게 순위권에 드는 성적을 기록하는 KBO의 학살자. KBO 누적 WAR 기준으로 8년 만에 역대 30위를 넘보는 피닉스의 간판타자였다.

-저 친구는 배트가 따라 나오는 타이밍이 다르더군.

‘맞아요. 쟤도 진짜 대단한 애죠.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그때부터 클래스가 달랐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전 외국 나갈 줄 알았어요.’

-그러기엔 약점이 너무 뚜렷하더군.

‘그러니까 뭐, 그냥 고등학교 때 그랬다는 이야깁니다.’

183cm에 107kg.

박도명은 매년 20개에서 30개의 홈런을 치는 강타자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굳이 분류하자면 거포가 아닌 똑딱이라는 사실을.

분명 그는 매년 20개가 넘는 홈런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홈런이 2025년 완공된 KBO 최고의 타자 친화 구장. 대전 드림파크에서 기록한 홈런이었다. 좌측 펜스까지 98.5m. 3미터짜리 펜스가 쳐져 있다고는 하지만 터무니없이 짧은 펜스다.

‘고등학교 때는 공 잘 보고 발 빠른 교타자에 가까웠어요. 근데 프로 오더니 저렇게 몸을 불리더라고요. 여전히 몸 크기에 비하면 발도 빠르고 장타도 늘긴 했지만, 원래 리드오프로 컸어야 할 녀석이 4번에 있는 상황이죠.’

-딱!!

박도명의 배트가 성민의 공을 두들겼다.

내야 관중석을 직격하는 파울.

그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다시 타석에 들어선 그를 향해 성민의 너클볼이 117km/h의 속도로 춤을 추듯 날아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공.

박도명이 마지막까지 공을 노려봤다. 그를 지금 자리에 있게 해준 선구안이 이야기했다.

‘이건 최소한 존에 들어오는 공이다.’

그의 방망이가 힘차게 공을 두들겼다.

-딱!!

‘젠장!!’

하지만 마지막 순간 공의 움직임이 묘했다. 이건 스윗 스팟에 제대로 맞은 공이 아니다. 높게 뜬 타구가 두둥실 좌측 외야를 향해 날아갔다.

공을 두들긴 박도명이 슬금슬금 1루를 향해 산책하듯 걸어갔다. 마린스의 좌익수가 달렸다.

공을 친 타자도 공을 맞은 투수도 공을 잡으려던 외야수도 모두 외야플라이를 확신했다.

그리고 청주구장이 그 확신을 배신했다.

[높게 뜬 타구!! 좌익수!! 좌익수!!]

[어?]

좌측 외야까지 고작 100미터. 중앙 담장까지 고작 110미터. 펜스 높이는 2.3미터.

비거리 104미터짜리. 다른 모든 구장이었다면 외야플라이로 끝났을 초소형 홈런이 터졌다.

순식간에 점수는 4:3으로 역전.

순식간에 4실점을 허용한 성민이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에러에 에러에 에러 그리고 만루홈런을 허용한 투수가 보여주는 그 웃음에서 조프리 켄트는 확신했다.

‘이 녀석은 성공할 녀석이다.’

분노?

아니다. 만약 성민이 여기서 분노를 드러냈다면 조프리 켄트는 성민이 좋은 공을 던지는 가능성 있는 투수였을망정 성공을 확신할 투수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허탈함?

마찬가지로 아니었다. 물론 성민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더라도 조프리 켄트는 그를 이해했을 것이다. 승리가 선발 투수의 미덕이 아닌지는 오래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투수들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스탯에 집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보기에 성민의 웃음은 분노도 허탈함도 아니었다.

“저거 재밌다는 표정 맞죠?”

“어, 예전의 매드 맥스를 보는 것 같네.”

“매드 맥스라면? 설마 슈어저요?”

“그래. 뭐 저렇게 웃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그 친구도 위기에 몰리면 항상 저런 눈빛을 보여주곤 했었지.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 뭐 그런 표정이랄까?”

조프리 켄트의 입에서 나온 21세기 가장 위대했던 투수 중 하나의 이름에 제프 미야모토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맥스 슈어저라니. 좀 너무 나가신 것 아닙니까?”

“뭐라는 거야. 누가 실력이 맥스 슈어저라고 그랬어? 멘탈이 그 정도는 돼 보인다고 한 거야. 저런 상황에서도 짜증을 내거나 허탈해하는 대신 승부욕을 불태우는 워크에씩을 칭찬하는 거라고.”

“워크에씩이라면 뭐, 평소 패턴은 좀 봐야 알겠습니다만, 확실히 마운드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대단해 보이네요.”

뜻밖의 에러와 에러와 에러. 그리고 홈런에 청주구장이 달아올랐다.

투수가 아무리 완벽해도, 야구는 투수 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새삼 즐겁게 만들었다.

“박도명!! 그래, 내가 너 인마 신인 때부터 인마. 내가 어? 유니폼도 사고, 어? 악플 보면 커버도 치고. 이 새끼. 내가 넌 이런 거 할 줄 알았어.”

“와, 미쳤네. 야, 김성민 지금까지 여섯 경기 뛰면서 자책이 3점 아니었어? 지금 4실점이면 김성민이 여섯 경기 뛰면서 기록했던 실점 총합보다 더 많은 거 아니야?”

[5회 말. 투아웃. 박도명 선수의 만루 홈런. 경기는 이제 4:3. 피닉스가 1점을 리드하기 시작합니다. 이번 시즌 김성민 선수의 첫 대량실점입니다.]

[아니죠. 정확한 기록은 나와봐야 알겠습니다만 이건 제가 보기엔 무자책 4실점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하긴. 제가 너무 충격적인 장면에 잠시 넋을 잃었나 봅니다. 앞선 타자들에게 정상적인 플레이가 나왔다면 이번 이닝은 진작에 쓰리아웃으로 종료됐어야 하군요. 그렇게 되면 무자책 4실점이 맞겠네요.]

청주 야구장, TV로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팬, 인터넷 커뮤니티, 심지어 마린스의 덕아웃까지 모든 관계자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4실점에 폭발했다.

보통이라면 경기 자체가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대폭발 속에서 유일하게 폭발하지 않은 마운드의 투수가 침착하게 그 폭발을 수습했다.

그랬다.

10년 차 마린스 출신의 에이스는 고작 무자책 4실점에 쓰러지지 않았다.

마지막 타자에게 스윙 삼진.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 칰꼴라시코(3)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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