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칰꼴라시코(1) >
청주구장은 대전 피닉스의 2 홈구장이다.
사실 KBO의 경우 광역 연고제가 아닌 도시 연고제를 채택하고 있는 관계로 엄밀히 말하자면 연고 지역 밖의 중립구장이라고 봄이 타당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 그런 탁상공론보다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실제가 더 와닿는 법이다.
1986년부터 2032년인 지금까지 청주구장은 피닉스의 2 홈구장이었고, 그것은 앞으로 몇 년이 지나더라도 변치 않을 사실이었다.
“그래서 엿 같은 거야. 다른 팀들 좀 보라고. 대체 누가 2 홈구장 같은 걸 운영하냐고.”
“마린스랑 그리핀즈요?”
“야, 걔들은 지어진 지 한 10년 된 신삥 야구장에서 그냥 몇 경기 뛰어주는 거잖아. 우리랑은 다르지.”
“하긴, 우린 시설이 좀 그렇긴 하죠?”
1979년 지어진 청주구장은 2000년대 들어 몇 번의 리모델링과 보수작업을 거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설 자체의 근본적인 노후화는 어쩔 수 없었다. 팬들의 눈에 보이는 부분도 후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선수들을 위한 시설은 더 후졌다.
불평 거리는 시설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피닉스의 선수들에게 안 좋은 것은 홈 경기가 홈 경기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대전에서 청주까지 거리는 약 1시간.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집에서 나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출근하기에는, 그리고 출근 이후 경기를 뛰기에는 변수가 많은 거리다.
덕분에 청주구장에서 경기를 뛰는 날에는, 홈팀 임에도 불구하고 단체로 호텔에서 합숙해야 했다. 여러모로 피닉스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다만 대전 피닉스 선수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민에게 좋으냐 하면 사실 그것도 아니었다.
-야, 여기 프로 구장 맞아?
‘맞아요.’
-작기로 유명한 엔젤스타디움도 이것 보다는 훨씬 넓은 것 같은데?
‘대신 펜스를 좀 높였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할 만한 규모가 아닌 것 같은데?
청주구장의 다른 별명은 한국의 쿠어스.
그야말로 투수들의 무덤과도 같은 구장이다. 물론 고고도이기에 구장의 크기는 가장 넓은 쿠어스와는 정반대 의미에서 투수들의 무덤이기는 하다.
청주의 좌우 펜스는 100m로 그래도 과거 작기로 유명했던 목동구장 수준의 크기는 됐지만, 중앙펜스까지 거리는 고작 115미터에 불과했다. 이건 목동보다 3미터가 더 짧다. 게다가 목동의 경우 안양천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홈런의 파크팩터가 구장 크기에 비해 매우 낮은 편에 속했는데 청주구장은 그런 것도 없다. 거기에 심지어 잔디까지 인조 잔디다.
-이 정도면 빗맞은 외야 플라이도 홈런이 될만한 크기잖아. 오늘 힘들겠는데?
‘딱히, 청주구장 아니더라도 맞으면 힘든 건 마찬가지잖아요. 최대한 안 맞아봐야죠.’
-이런 마린스가 만든 긍정의 괴물 같으니.
‘그리고 시설은 나쁘지만, 그래도 여기 꽤 괜찮은 구장이에요.’
-시설이 나쁜데 괜찮다니? 대체 무슨 헛소리야?
‘으음,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메이저리그의 펜웨이파크 같은?’
-야, 내가 담쟁이 놈들 싫어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펜웨이파크랑 여기 시설이 같은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아니, 시설 말고요.’
-그러면? 대체 뭐가?
물론 야구장에 좋은 시설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청주구장은 엉망이다. 하지만 야구장에 중요한 것이 오직 시설만이 아니다. 사실 시설은 포장지다. 중요한 것은 그 안을 채우는 내용물이다.
성민이 예를 들었던 펜웨이파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거대한 녹색의 괴물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뛰는 위대한 보스턴의 선수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열광적인 팬들이 100년도 더 된 낡은 펜웨이파크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오늘 경기 전 좌석 매진까지 2분 걸렸대요.’
-2분?
물론 최대 10500석. 청주구장의 크기는 작았다.
하지만 오늘은 평일인 화요일. 사직구장이라고 해도 1만 명을 장담하기 힘들다. 물론 최근의 경우 성민이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만큼 성민의 경기에는 그 이상의 관중이 모이기는 한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 전 좌석 매진까지 11분 걸렸답니다.’
하지만 평일 3연전 전 경기 10500석 매진. 그것도 11분 만에 매진은 정규 시즌 경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열정 넘치는 좋은 팬들이로군.
‘그렇죠.’
경기의 중요한 내용물 중 팬들이 해줄 수 있는 한 가지가 꽉 찼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경기를 뛰는 선수의 몫뿐이다.
그리고 성민에게는 오늘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마음이 충분했다.
“아, 시발.”
물론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마음만으로 무언가가 이뤄지긴 참 힘들다. 오늘도 성민은 마린스라는 물리적인 장벽과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보통 경기에서 성민을 돕는 것이 오직 필 니크로의 잔소리뿐이었다면 오늘 성민에게는 든든한 아군이 존재했으니까.
대전 피닉스.
막장도에 있어서만큼은 엘리츠, 마린스, 호크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KBO의 또 다른 막장 전문가.
헬꼴라시코에 버금가는 KBO 최고 수준의 대환장파티.
칰꼴라시코가 청주구장에서 막을 열었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1회부터였다.
대전 피닉스의 선발 투수는 작년 두 번째 FA로 4년 30억에 피닉스에 영입된 36세의 베테랑 선발 투수 장진철.
15년 동안 341경기 중 307경기에 선발로 등판하여 127승. 96패. 커리어 평균 자책점 4.37 도미넌트하게 리그를 지배한 적은 없지만, 꾸준한 성적으로 답이 나오는 투수라는 평가를 받는 노장이었다.
“시발, 오늘 경기 포기했다 이거네.”
“에이, 그냥 선발 로테이션 지키는 거지, 포기는 무슨 포기야.”
“지난 경기 우천 취소 때문에 페트릭이 지금 닷새를 쉬었는데 로테이션을 지키긴 뭘 지켜. 1선발이 닷새 쉬었으면 5선발 밀어내고 다시 마운드 올라가야지. 이건 1등마랑 5등마랑 붙인 경기는 포기하고 나머지 경기 잡겠다, 이 소리잖아.”
하지만 그 답이 나오던 시절도 재작년이 마지막이었다.
작년 피닉스에 온 첫해 장진철은 시즌 평자책 5.61이라는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고, 그것은 올해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뻐엉!!!
“스트라잌!!”
장진철의 속구가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저봐, 저봐. 장진철 쟤는 이제 선발로 뛸 상태가 아니라니까? 아무리 1회 초라지만 137이 뭐냐? 137이.”
재작년까지만 해도 140 초중반에 형성되던 그의 속구는 이제 140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속구는 모든 피칭의 기본이다.
“솔직히 이쯤 되면 쟨 중간계투로 내리고 김수현이나 김민우를 선발로 올려야지.”
-딱!!
마린스의 타자가 장진철의 슬라이더를 잡아당겼다.
우중간을 가르는 이루타.
1회 초. 마린스가 피닉스의 늙은 투수를 마구 두들겼다.
그리고 1회 말.
성민이 마운드에 섰다.
-그래, 내가 솔직히 말할게. 내가 기대 안 한다, 안 한다 했지만 그래도 나도 사람, 아니 귀신인데 그런 광경을 보면 기대가 될 수밖에 없잖아? 응?
‘기대를 대체 얼마나 했길래 그러는 거예요. 솔직히 이 정도면 잘했지.’
-이게 잘한 거라고?
‘보세요. 어쨌든 점수는 났잖아요.’
성민의 시선이 전광판을 향했다.
여덟 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가서 안타 여섯 개. 그리고 2득점.
마린스답지 않은 맹공에 마린스다운 결과물이었다.
인터넷 게시판 역시 그 아름다운 광경에 불이 났다.
-주자 뇌 있는 거냐? 대체 거기서 홈까지 뛰긴 왜 뜀?-
-주자 탓하지 말자. 3루 꼴무원 개새가 거기서 팔 존나 돌렸다.-
-시발, 안타가 여섯 개에 이루타도 있는데 왜 득점은 2점임? 이게 야구냐?-
-이 와중에 박동엽 혼자서 삼진임.
-야, 마지막 김호섭 타구 방향 못 봤냐? 그거 투아웃이라서 그냥 이닝 종료지, 원아웃이면 무조건 병살 각이었음.-
-내야 땅볼이냐, 삼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안타, 2루타(주루사), 안타(1타점), 안타, 안타(만루), 삼진, 안타(1타점), 내야 땅볼 아웃.
매우 잘 친 것 같은데 분명 매우 잘 친 것도 맞는데, 이상하게 답답한 공격.
‘그래도 2점이잖아요.’
-그래, 어쨌든 2점은 2점이지.
청주 구장의 팬들이 성민을 바라봤다. 의외로 일 년에 대여섯 번 이상 직관을 다니는 팬 중에서는 다른 팀의 선수는 중심타선, 혹은 에이스급 선발이라도 스탯은커녕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로 이전 경기에서 KBO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를 한 투수를 모르는 팬은 존재하지 않았다.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116km/h의 너클볼이 존 밖으로 절묘하게 빠져나갔다.
스윙 스트라이크.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이 눈을 끔벅였다.
98km/h, 118km/h.
두 개의 다른 너클볼이 추가로 더 들어갔다.
그리고 네 번째.
-뻐엉!!!
146km/h의 빠른 속구.
“스트라잌!! 아웃!!”
선두 타자의 시원한 루킹삼진.
“잘 한!! 아니, 아니지. 타자 이 새끼 너 똑바로 안 보냐? 그걸 그냥 보내?”
“근데 확실히 투수가 잘 던지기는 잘 던지네.”
“그게 보여? 난 영 잘 모르겠는데. 너클볼이 마구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깐 영 모르겠단 말이지.”
“집에서 TV로 한번 봐봐. 막 꿈틀꿈틀 거리면서 들어오는 데. 진짜 마구는 마구여. 거 외인구단에서도 손가락 자른 그 선수가 저 공 던지잖어.”
“아, 너클볼이 그 공이었어?”
KBO 최초의 퍼펙트를 기록한 투수를 상대로 5선발을 내놓은 팀의 결정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청주의 팬들이 저도 모르게 타자가 아닌 성민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그런 기류를 느꼈기 때문일까?
마운드에서 공을 뿌리는 성민이 조금 흥을 냈다.
-뻐엉!!
“스트라잌!!!”
148km/h의 속구.
-워워, 성민아 너 지금 너무 흥 내고 있다. 이제 1회야.
MRI를 따위라고 할만한 성능의 눈을 가진 유령의 눈에 재작년 겨울 수술했던 성민의 팔꿈치 인대가 평소보다 조금 더 꼬이는 것이 들어왔다.
그가 성민을 만류했다.
‘제가 너무 신을 냈네요.’
-천천히 가자고. 어차피 이제 경기는 시작했을 뿐이니까.
1회. 14구. 삼자범퇴. 그리고 3삼진.
성민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내가 어지간하면 우리 타자 놈들 욕하는 맛에 경기장 오는 사람인데. 이건 투수를 칭찬해야겠어. 퍼펙트 투수라더니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네.”
“150 다 되는 공이랑 100짜리 공이 같은 폼에서 숭숭 들어오는데 저걸 어떻게 치겠어.”
“요즘 인터넷 보니까 벌써 해외구단들이 관심갖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려, 저런 투수는 국위 선양을 위해서라도 대승적 차원에서 외국으로 방생해야지. 아주 KBO에서 생태계 교란하고 그러면 안 될 투수여.”
그리고 마운드에 또다시 장진철이 올라왔다.
“그러면 쟤는?”
“쟤는 우리 팀을 위해서 대승적 차원에서 다른 팀으로 방생했으면 좋겄어. 아주 내 마음이 교란되서 죽겄어.”
다섯 명의 타자에게 안타 두 개. 그리고 볼넷 하나. 무실점.
2회까지 8안타 1볼넷 2득점.
하지만 칰꼴라시코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 칰꼴라시코(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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