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너머 >
성민의 마지막 공이 혁준의 미트에 박히는 바로 그 순간.
하나라도 많은 트래픽을 얻기 위해 0.01초를 다투는 속도로 수백 개의 준비된 기사들이 업로드됐다.
[김성민 KBO 최초의 퍼펙트 달성!!]
[너클볼 투수가 퍼펙트를? 너클볼 투수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게임!!]
[20세 데뷔 신인왕. 24세 국가대표 1선발 아시안게임 금메달. 27세 팔꿈치 수술. 그리고 너클볼 투수로 재기. 김성민이 걸어온 발자취를 알아보자.]
[퍼펙트게임까지 총 103구. 그중 너클볼의 숫자는 81구. 하지만 같은 너클볼이 아니다? 김성민의 새로운 너클볼에 관하여.]
스포츠 섹션의 메인은 물론이거니와 포털의 메인 페이지들까지 성민의 퍼펙트 기사들이 범람했다.
보통 포털의 메인페이지에 스포츠 기사가 오르면 가장 많은 공감을 얻는 댓글은 악플들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성민의 퍼펙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달랐다.
-내가 50대 중반이 돼서 눈물이 많아진 탓일까? 오늘 야구를 보다가 울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 일곱 살 때 무쇠팔이 우승하는 걸 본 탓에 이 팀의 팬이 돼버렸다. 92년에 안경 에이스가 오른팔 빠갤 때 알게 됐다. 난 이제 평생 이 팀의 팬일 수밖에 없겠구나. 그리고 그 덕분에 40년이 힘들었다. 때론 나를 이 팀의 팬으로 만든 무쇠팔이랑 안경 에이스를 원망도 했다. 하지만 오늘 이 경기로 다 괜찮아졌다. 마린스. 우리가 최고다.-
-오늘 마린스가 마침내 야구를 했다.-
-김호섭 그 돼지 새끼가 뛰는 모습이 왜 이렇게 찡하던지. 그래, 그 새끼도 10년 전에는 날아다녔었지.-
-박동엽 Out. 공 감독 니가 뇌가 있으면 내 말을 들어라. 이 새끼 스탯 죄다 분식이다. 이 개새끼는 만루에서는 포풍같이 3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주자 없을 때나 뽀록으로 홈런 치는 개놈이다. 5타수 1안타 3삼진이 말이냐?-
-35세 모솔이다. 일 년에 사직 적어도 30번은 간다. 오늘 엄마가 소개팅 해줘서 못 갔다. 집에 오는 길에 마린스 퍼펙트 소식 들었다. 눈물 난다. 내일 애프터 취소하고 사직 가려는데 미친 짓이냐?-
-일단 30대 넘어서, 하물며 엄마가 해줬으면 소개팅이 아니라 맞선이고요. 어차피 애프터 해봤자 안될 테니 그냥 사직 ㄱㄱ 추천함.
오랜 시간을 참아온 마린스의 팬들이었다. 게다가 마린스는 그 어떤 팀보다 에이스에 대한 향수가 짙었다. 그들이 기록했던 두 번의 코리안시리즈 우승은 모두 당대 최고의 에이스 팔을 갈아서 올린 금자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민의 퍼펙트 소식은 단순한 퍼펙트를 넘어 그들을 기대케 했다.
어쩌면. 정말로. 드디어 올해야 말로!!
5월 12일.
부산의 술집과 모텔이 거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준하는 호황을 맞이했다.
***
-툭
그리고 등판 바로 다음 날.
가벼운 달리기로 몸을 풀던 성민에게 누군가가 음료 하나를 건넸다.
닉 해리슨이었다.
‘이 싸가지가 이건 왜?’
성민이 이게 뭐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어제 경기는 좋았다. 이런 팀에서 그런 대단한 피칭이라니. 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투수 같더군.”
“이런 팀?”
성민의 반문에 닉 해리슨이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재수 없는 새낀데, 이런 팀은 솔직히 맞는 말이지.
‘아, 왜요. 어제는 괜찮았잖아요.’
-글쎄다. 어제도 너 아니었으면 퍼펙트는커녕 지는 경기 아니었을까? 점수지원은 2점에 현정현인가 그 녀석 송구는 네 키가 5cm만 작았으면 못 받을 송구였어. 너도 어제 속으로는 엄청 뭐라고 그랬었잖아.
‘아니, 뭐 솔직히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습니다만?
‘내가 우리 팀을 까는 건 괜찮지만, 남이 우리 팀을 까는 건 참을 수 없다고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닉 해리슨이 성민의 말에 답하는 대신 자신이 건넨 음료를 설명했다.
“미국에서 가져온 특제 드링크다. 그거 한 병에 150달러야. 나도 등판 바로 다음 날에나 먹는 비싼 드링크라고.”
“그건 됐고, 이런 팀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젠장. 너도 잘 알잖아. 이런 팀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수비는 개판이지, 점수는 안 나지. 이게 야구냐? 예능도 이것보단 덜 웃기겠다.”
필 니크로가 닉 해리슨의 말에 공감했다.
-맞는 말을 하는군.
‘아 쫌, 지금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마린스 반대편.
닉 해리슨이 단언했다.
“어제 하루 좋았던 건 인정한다. 뭐 군데군데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래도 어제는 마린스답지 않았어. 하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갈까? 하루? 이틀? 천만에. 난 당장 오늘부터 마린스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한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 물론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 잠깐. 뭐라고? 맞다고?”
“어, 맞아. 하루 그런 분위기가 됐다고 팀이 휙 변해서 모두 우승을 향해 이글이글하고 막 각성해서 홈런 빵빵치고 그러면 그건 8세 미만 아동용 애니메이션이지. 솔직히 요즘 12세 미만 관람가만 되도 그런 멍청한 스토리는 사양이라고.”
닉 해리슨이 지금 이 녀석이 영어를 잘못 배운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저승 번역기가 도와주는 성민의 영어는 버퍼링은 조금 있을지언정 완벽했다.
“이봐 닉. 너 산을 넘어가면 뭐가 나오는지 아냐?”
“갑자기 그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불교에서 한다는 그 신비한 문답이야?”
“산을 넘으면 말이지.”
***
그리핀즈와의 2차전 경기가 시작됐다.
오늘 선발은 마린스의 두 번째 외국인 투수인 게릭 벨. 반면 그리핀즈의 경우 이제 프로 4년 차의 토종 선발인 박규환이었다.
바로 어제 퍼펙트를 거둔 팀의 기세. 그리고 선발의 무게감을 생각할 때 마린스의 두 번째 승리가 예상되는 경기였다.
-딱!!
그리고 사직은 언제나와 같았다.
[꽁꽁 얼어붙은 마린스의 타선. 그리핀즈와의 2차전 7:1 완패!!]
-개새끼들. 이럴 줄 알았다. 마린스가 야구는 무슨 야구를 한다고.-
-어제 퍼펙트를 보면서 울었다던 아재다. 내가 48년 동안 마린스의 팬을 한 보람이 있다고. KBO 최초의 퍼펙트가 마린스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했었지. 근데 오늘 경기를 보면서 깨달았다. 퍼펙트는 마린스가 한 게 아니라 김성민이 한 거라는 사실을. 마린스 이 개잡놈들.-
-박동엽 Out!! 공 감독 이 개새끼야. 내가 박동엽 내리라고 말 했지. 시발 두 경기 통틀어서 9타석 9타수 1안타 6삼진이 말이 되냐? 이게 사람이냐?-
-박동엽 개새끼. 득점권만 가면 귀신같은 삼진이라고 말하기에, 이 새끼는 득점권 아닐 때도 맨날 삼진임. 존나 어쩌다 뜬금포로 홈런 한 방씩 날리는 거 말고 이 새끼가 하는 게 대체 뭐가 있냐.-
-어제 울었다던 35세 모솔이다. 오늘 소개팅 애프터 대신 사직 왔다. 경기 보는데 눈물이 흐르더라. 어제 나한테 사직 가라고 추천했던 새끼 다음에 꼭 사직에서 보자. 죽이삔다.-
-쏴리. 근데 다시 말하지만, 엄마가 해준 소개팅은 소개팅이 아니라 맞선······.-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린 2차전.
닉 해리슨이 성민의 말을 곱씹었다.
“산을 넘어가면 원래 또 다음 산이 있는 거라고?”
그 절망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상큼한 표정으로 내뱉는 성민에게 닉 해리슨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대체 산을 넘은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넘었잖아.”
“그래봤자 다음 산이 기다리고 있다며.”
“멍청아. 중요한 건 다음 산이 아니야. 일단 산을 하나 넘었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그게 대체 왜 중요한데. 어차피 산 넘어 또 산이면 그 산을 넘어도 또 산이라는 소리잖아.”
“산을 올려다만 본 사람들은 산을 보고 절망하지만, 한 번 산을 넘어본 사람들은 그다음 산도 넘기 위해 걷기 시작하거든.”
물론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해리슨. 우리 내기 하나 하자. 조건은, 그래. 호칭으로 하자. 너 새끼 내가 조사해보니까 얼굴은 졸라 90년대생처럼 생겼으면서 04년생이더라. 내가 이기면 너 나한테 형이라고 불러라. 알겠어?”
“갑자기 내기는 무슨 내기야? 어차피 너도 오늘부터 마린스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며. 게다가 얼굴은 내가 노안인 게 아니라 한국인들이 너무 어리게 생긴 거거든.”
성민이 웃었다.
“물론 우리가 태업하던 것도 아닌데.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다를 거야.”
“무슨 헛소리인지. 그래서 내가 이기면 넌 뭘 어쩔 건데.”
“글쎄. 우주 대스타이신 이 몸의 사인볼 하나 정도면 될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딴 거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필요 없거든?”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성민이 패배한다면 비싼 노트북 하나를 내놓기로 협상이 끝났다.
그리고 7:1로 처참하게 경기를 패배한 지금.
덕아웃의 닉 해리슨은 성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다르다.
지금까지는 패배를 하더라도 누군가는 야식으로 속을 풀자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보며 저런 애들 신경쓰지 말고 우리끼리 특타나 하러 가자고 떠들었었다.
하지만 덕아웃은 고요했다.
그리고 그 고요는 어색함이 아니었다.
선수들의 눈에서, 몸짓에서 분함이 느껴졌다.
7:1이라는 큰 점수 차이로 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우린 안 돼.’ 대신 패배를 분해하는 광경은 마린스에서 2년째 뛰고있는 닉 해리슨에게 너무 생소한 광경이었다.
이제 이해됐다.
한 번 산을 넘어 본 사람은 새로 생긴 산을 보고 절망하지 않는다.
물론 걷고 또 걸어도 끝나지 않는다면 금방 다시 절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린스에는 확실한 이정표가 있었다.
6경기에 등판하여 6승.
44이닝 평균자책점 0.61. 그야말로 승리의 아이콘 그 자체다.
그가 마운드에 서는 날에는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닉 해리슨이 쓰게 웃었다.
“젠장. 이거 꼼짝없이 형이라고 부르게 생겼군. 그냥 노트북으로 퉁치자고 하면 안 받아주려나?”
***
“놉!!”
“성민, 이거 정말 좋은 녀석이야. 최신형 그래픽카드까지 달린 거라고.”
“놉!!”
“솔직히 나 생일 지나서 나이도 너랑 동갑이잖아. 형은 좀 아니지.”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고, 한국에 오면 한국 나이를 따르는 법이야. 자 다정하게 불러보자. 형아.”
“제, 젠장!!”
***
같은 시간.
“너클볼러?”
“어, KBO에서 6경기 44이닝 0.61을 기록 중이라더라. 삼진도 56개나 되고 사사구도 7개밖에 안 돼.”
“데이터 좀 줘봐.”
“여기.”
안경을 쓴 남자가 건낸 데이터에 그가 짜증을 냈다.
“뭐야, 이 원시적인 기록들은. 데이터 달라고. 데이터.”
“그 친구 KBO에서 뛰는 친구라니까.”
“알아. 들었어. 근데 거기도 구버전 스탯 캐스트정도는 도입했잖아.”
“이봐. 존. KBO 구장에 스탯캐스트가 있다고 해도 거기가 우리 구장도 아니고, 애초에 크게 교류도 없는 구단인데 하루 사이에 그걸 어떻게 구해오겠어.”
“망할. 이야기를 꺼내려면 그 정도는 구하고 이야기를 해야지. 그게 아니면 애초에 이야기를 꺼내지 말고.”
존의 이야기에 안경을 쓴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그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한국의 구단쪽이랑 협상을 해야하고, 그 협상을 제안하려면 네 허락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이봐 존. 넌 이제 전력분석팀장이 아니라고. 네가 우리 단장이란 말이야.”
인상적인 기록이 큰물의 시선을 부르기 시작했다.
< 산 너머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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