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33화 (34/287)

< 공통의 목표(4) >

그리핀즈의 해리 본이 KBO에서 부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심판이 낮은 코스의 커터를 잡아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이라고 심판이 그의 공을 꼬박꼬박 잡아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드문드문 아슬아슬한 코스의 공에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왔다. 그리고 그 정도면 마린스 타자들을 상대로 충분했다.

그 보기 드문 정직한 판정이 5회에도 마린스의 타자들을 막아냈다.

그리하여 6회 초.

성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성민답지 않게 진지함으로 가득한 표정에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표정이 너무 굳은 거 아니야?

‘원래 기록을 앞뒀으면 표정을 이 정도는 굳혀 줘야 하는 겁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만약에 기록이 깨진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퉷, 재수 없게 그런 가정은 왜 하고 있어.

‘아니, 그러니까 만약에요.’

-그래, 만약 깨졌다고 치자.

과연 성민의 입에서 또 어떤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나올까? 필 니크로가 궁금함을 듬뿍 담아 그를 바라봤다.

‘제가 방실방실 웃고 있다면, 아마 사람들은 이럴 겁니다. ‘저 새끼 방심하다가 털렸네.’ 내가 저럴 줄 알았다. 그런데 만약 제가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털리잖아요? 그러면 ‘아!! 성민이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구나.’ 이런단 말이죠.’

-그건 또 무슨······. 야, 지금 기록을 세우는 와중인데 그딴 생각, 그러니까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다고?

‘이미지 관리라기보다는, 원래 프로야구라는 게 엔터테인먼트잖습니까.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도 배려해야죠.’

-그러니까 지금 관중 반응을 신경쓰고 있다. 이 말이네?

필 니크로가 인상을 썼다.

지금 좋은 분위기로 던지고 있는데 저지를까? 말까?

성민이 우쭐하며 말을 이어갔다.

‘네, 그게 바로 프로정신 아니겠습니까. 프로정신.’

이 미친 마린스는 10년을 생활한 애새끼에게 프로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정신 한 가지는 확실하게 심어줬다.

‘팬이 없으면 선수도 없다.’

분명 그것은 프로 스포츠의 근본 그 자체다.

하지만 잘못됐다. 목적은 옳다. 그러나 방향이 틀렸다.

시즌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필 니크로는 MLB와 KBO의 이질성. 그리고 마린스의 막장성과 그걸 헤쳐나가는 성민의 처신에 연신 감탄해왔다.

그래, 어쩌면 지금 이런 생각 역시도 그런 처신들의 연장선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이번에는 성민이가 틀렸다.

필 니크로가 결심했다.

그래, 하자.

설사 오늘 한 경기를 망치더라도 이건 지금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멍청한 새끼!!

필 니크로가 손바닥으로 성민의 등짝을 후려쳤다. 물론 영혼의 손바닥이 살아있는 육체를 때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저 필 니크로의 분노를 보여주는 행동일 뿐이었다.

-배려? 프로정신? 그 말들을 고작 그따위로 써먹지 마라. 그 말들은 그런 데 쓰라고 있는 말들이 아니야. 프로야구는 엔터테인먼트다? 그래 맞는 말이다. 결국, 프로야구는 보는 사람들이 즐겨야지 존재할 수 있는 산업이지. 하지만 넌 대체 사람들이 왜 프로야구를 즐긴다고 생각하는 거냐.

‘······.’

-그건 내가 최선을 다해 응원하는 팀이, 오직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부딪힌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응원이 선수들에게 힘이 되고, 선수들은 그 응원하는 우리를 대표해서 싸워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소리다.

나도 상대방도 모두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싸움이다. 그렇기에 승리하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필 니크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가 이 빌어먹을 마린스에서 10년을 뛰었다는 건 이해한다. 그렇기에 팬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이 승리가 아닌 그런 팬서비스가 됐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성민아. 너도 이제는, 지금은. 그런 팬서비스 말고 다른 거로 보답할 수 있잖냐.

‘그렇죠······.’

보통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당하면 변명을 한다. 뻔뻔한 사람은 화를 낸다.

성민 역시 변명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 조금 팬을 배려했을 뿐이다.

하지만 성민은 변명 대신 납득을 했다. 필 니크로의 권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이 필 니크로의 이야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없는 애새끼였지만 그렇기에 늙은 어른의 완고한 고집을 갖지 않았다.

일부러 침착하게 잠재웠던 성민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것은 언제나의 성민이었다.

6회 초, 7번부터 시작되는 하위 타순.

성민의 101km/h 너클볼이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부웅

“스트라잌!!”

이어지는 속구에 파울과 볼.

그리고 마지막 몸쪽을 파고드는 119km/h의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필 니크로가 만족했다.

괜히 경기 잘 하는 녀석에게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녀석은 흔들리지 않았다. 분명 성민은 군데군데 손이 많이 가고, 잔소리가 좀 필요한 녀석이긴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재목이다.

녀석에게는 투수에게 꼭 필요한 무심함이 존재했다. 성민은 조금 전의 잔소리 따위 이미 머릿속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이어지는 두 번째 타자.

성민의 148km/h 속구가 존을 파고들었다.

-부웅

“스트라잌!!”

그리고 이어지는 101km/h의 느린 너클볼.

-딱!!

힘없이 굴러가는 땅볼이 1루 라인을 타고 흘러갔다. 성민의 몸이 빠르게 1루를 향해 질주했다. 팀의 투수 가운데 가장 빠른, 야수를 다 포함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주력다운 완벽한 1루 커버였다.

공을 주워든 일루수의 송구가 조금 높다. 성민이 팔을 높게 쭉 뻗었다.

-뻐엉

“아웃!!”

지금, 대단한 기록이 이어지는 순간에 그 쉬운 송구를 실수했던 일루수 정현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성민이 웃으며 괜찮다고 그의 등을 두들겼다. 그 대범함에 정현은 더 몸 둘 바를 몰랐다.

“괜찮아요. 괜찮아. 자, 침착하게 하나 더 갑시다.”

경기를 지켜보던 마린스의 팬들이 자기 팀의 야수를 이겨내는 에이스에게 환호했다.

-오늘의 김성민은 ‘무적’이다. 녀석은 이미 ‘마린스의 야수’들을 넘어섰어.-

-하지만 마린스의 불펜이 출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불펜의 차례가 오기 전에 속공으로 끝낸다. 그것이 오늘 김성민 ‘무적 모드’의 비결이지.-

-근데 진지 빨고 정말 이게 될까? 솔직히 너클볼러가 수비 도움 없이 기록을 어떻게 세움?-

-어디 수비 도움만 없으면 다행이게? 지금 방해하는 거 자력으로 이겨내는 광경 안 보이냐? 현정현 쟤는 어떻게 저 쉬운 송구를 높게 보내냐고. 아마 현정현 저 새끼가 저 자리 있었으면 저 송구 백퍼 못 받았음.-

-인정. 저 새낀 자기 미트에서 공 조금 벗어나면 못 받는 새끼임. 솔직히 일루수가 미트질 좀 똑바로 하는 애였으면 박동엽 에러도 2개는 줄었을걸?-

-네, 만루에 방망이 세 번 휘두르고 삼진 아웃된 박동엽 씨 그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통틀어 너클볼러가 퍼펙트를 기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마이너를 통튼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너클볼이 그나마 퍼펙트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것은 호이트 빌헬름이 1958년 요기베라와 미키맨틀의 양키스를 상대로 기록했던 노히트 정도다.

하지만 사실 야구 150년의 역사 속에서 프로리그에서 퍼펙트가 나온 경우는 한, 미, 일을 통틀어 채 40회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너클볼러가 전체 투수의 한 줌도 채 되지 않음을 고려할 때 이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애초에 이상한 일을 따지자면 야구에서 투수가 9이닝 동안 27명의 타자를 단 하나도 1루에 내보내지 않는 일 자체 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 경기, 성민이 6회 초까지 그 이상한 일을 이어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삼진!! 김성민!! 이번 경기 무려 아홉 번째 삼진입니다!!]

그리고 6회 말.

대기 타석.

박동엽이 조금 전 있었던 현정현의 잔소리를 기억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수를 내겠다는 생각으로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했지?’

마린스의 팬들은 종종 동엽에게 상황에 상관없이 영웅스윙만 하는 개자식이라고 했다. 팀배팅? 그래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되는 타자나 하는 짓이다. 자기 스윙으로도 안타를 못 만드는데, 의도적으로 공을 밀어쳐라?

그건 높은 확률로 병살이다.

박동엽은 주제파악은 확실하게 하는 남자였다. 2군의 타격 코치였던 이형진은 동엽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시프트를 피해서 공을 밀어치는 건 메이저 타자들도 못 하는 일이야. 물론 거기 애들이 KBO에 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다만. 어쨌거나 비슷한 리그 수준의 투수를 상대로 공을 밀어치겠느니 뭐 하겠느니 하는 건 존나 힘들단 이야기야. 이건 거기 통계로도 나온 이야기다? 그러니까 넌 그냥 타석에서는 다 쌩까고 네가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걸 하면 돼.”

“그래도 공을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켜보기는. 존에서 어림없이 빠져나간다 하는 건 당연히 안 휘두르는 거지만, 존 근처에 왔다. 내가 칠 수 있겠다 싶으면 휘둘러야지. 그걸 그냥 보고 있어? 인마 전성기 푸홀스는 3-0에서 매일 방망이 휘둘렀어.”

“그거야 푸홀스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뭐, 그건 그렇지.”

선두 타자 삼진아웃.

동엽의 차례가 돌아왔다.

마운드의 해리 본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공이 날아든다.

이전 타석 헛스윙만 세 번해서 삼진을 당했던 바로 그 공이었다.

그리고 저 공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떨어지고, 훨씬 빠르다.

하지만 그 궤적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그 기억하는 궤적을 향해 몸에 익은 스윙 그대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물론 기억한다고 다 치면 타자는 죄다 푸홀스다.

그리고 동엽은 푸홀스만큼 대단한 타자가 될 수 없었다.

초구 스윙 스트라이크.

동엽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두 번째.

해리 본의 공이 날아든다.

이건 아무리 동엽 자신이라도 알아볼 수 있다. 빠지는 공이다.

-뻐엉!!

“스트라잌!!!”

망할, 잘 못 봤다. 공이 떨어지지 않았다. 속구였다.

볼카운트 0-2.

마운드의 해리 본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푸홀스는 3-0에서 매일 방망이를 휘둘렀다.

해리 본의 공이 날아온다.

이건 들어오는 공이다.

하지만 볼카운트는 0-2. 여기서 또 휘두르면 또 삼구삼진이다. 하지만 동엽의 머릿속에 그런 걱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타석에 서는 순간만큼은 온갖 잡념을 버리고 오직 공만을.

이번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스윙으로!!

동엽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박동엽!! 박동엽!!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담장, 담장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갔습니다!!]

[6회 말, 박동엽의 솔로 홈런. 마린스가 1점을 더 앞서나갑니다.]

마린스의 선수와 코치들이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오는 동엽을 향해 우르르 달려나갔다. 달려나가는 코치 가운데는 강용구 수석 코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공 감독이 미소를 띠었다. 물론 고작 이걸로 팀이 진짜 하나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이번 경기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린스도 공동의 목표를 향해 뛰는 진짜 팀이었다.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모자를 고쳐 쓰고 힘차게 공을 뿌린다. 안그래도 어려운 것이 퍼펙트다.

하지만 너클볼러는 다른 투수들보다 퍼펙트가 더 어렵다. 퍼펙트는 에러를 포함한 어떤 이유로도 1루에 주자를 내보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포수도 공을 뒤로 빠트려서는 안된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혁준이 성민의 공을 받아냈다.

그리고 또 받아냈다. 실시간으로 표정은 죽어갔다. 물론 죽은것은 표정만이 아니었다. 방망이 역시 완전히 죽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미트는 죽지 않았다. 혁준의 미트는 오늘 마지막까지 자신의 몫을 해냈다.

거듭 말하지만 퍼펙트는 어렵다.

하물며 마린스와 같은 환경에서 퍼펙트는 더더욱 어렵다.

역대 MLB의 모든 퍼펙트 가운데 가장 많은 삼진을 기록했던 경우도 삼진은 고작 14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 13개의 공을 야수들이 받아냈다는 의미다.

8회 초.

그리핀즈의 용병 타자 다니엘 버튼의 세 번째 타석.

그가 노리는 것은 가장 타이밍이 맞는 120km/h의 너클볼.

그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두들겼다.

-딱!!!

물론 정확히 맞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불끈한 근육이 타구에 힘을 더했다.

우측 외야로 날아가는 빠른 타구.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발!! 제발!!!

마린스의 우익수인 김호섭은 7년 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수비보다는 공격에 높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럭저럭 수비가 되는 선수였다는 의미다.

타구를 판단하는 능력은 여전히 나쁘지 않았다. 그건 애초에 타고나는 거니까.

하지만 늙어가는 몸으로 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근육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그의 달리기는 매우 느려졌다.

그의 수비 범위가 줄어든 이유다.

타자의 공이 성민의 공을 두들기는 순간, 김호섭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7년 전 아직 팔팔했던 전성기 시절처럼.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느리다. 하지만 마음은 그때보다 더 간절했다. 거의 4년 전, FA를 1년 앞뒀던 그 시절만큼 간절했다.

본래라면 안전하게 한번 튕긴 공을 잡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호섭은 과감히 몸을 날렸다.

잡는다. 이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잡는다.

전성기보다 17.8kg 불은 육중한 몸이 부웅 날아 철푸덕 떨어졌다.

[김호섭, 김호섭!!]

호섭의 뱃살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푸른 잔디 위를 가르던 하얀 점은 더 이상 없었다. 그 대신 호섭의 글러브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웃!!!”

성민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미래에 자기 밑에서 투수코치를 할 성민을 향해 호섭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마린스의 야수는 형편없다.

하지만 오늘 그 형편없음을 이겨내는 기적을 보여줬다.

그렇기에 남은 것은 이제 성민 자신의 몫 뿐이었다.

2032년 5월 12일.

김성민.

9이닝 103구. 0피안타 0사사구 14삼진.

그리고 퍼펙트.

그 이상한 기적의 순간 마린스는 하나의 팀이었다.

< 공통의 목표(4)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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