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통의 목표(3) >
가오슝에서 있었던 마무리 캠프에서 필 니크로가 성민의 몸을 사용해서 던졌던 가장 완벽한 너클볼은 129km/h의 속도로 날아간 주제에 투수의 손끝에서 포수의 미트까지 고작 0.27번밖에 회전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몸에 익힌 채, 필 니크로의 지도 아래 성민이 던지던 너클볼은 평균 120km/h의 구속과 2.3번의 회전수를 보여줬었다.
이것은 RA 디키가 던졌던 고속너클볼과 팀 웨이크필드가 던졌던 평범한 너클볼의 중간 어디 즈음에 있는 공이다.
그리고 이 공이야말로 당장 성민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시간만 조금 더 있었더라면 이런 야매 같은 방식 말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지고 올라갔을 텐데 말이야.
사실 다니엘 버튼이 생각한 것 정도는 필 니크로도, 그리고 성민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성민은 빠른 속구와 너클볼 모두를 욕심내는 욕심쟁이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곁에 있는 필 니크로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필 니크로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경험을 그의 몸에 때려 박았다. 하지만 그것을 활용하기 위한 훈련은 필요했다. 무엇보다 그의 몸은 아직 너클볼을 던질 준비가 다 되어있지 않았다.
좋은 속구를 던지기 위해서는 공을 채는 힘을 키워야 한다. 반대로 좋은 너클볼을 던지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공을 밀어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당기는 힘과, 미는 힘. 근육의 사용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팔꿈치 부상을 회복한 성민은 너클볼을 제외한다고 해도 KBO에서 그럭저럭 선발 한 자리 정도는 노려볼만한 투수다. 그리고 어차피 성민이 당장 뛰어야 하는 곳은 KBO였다. MLB는 그 이후의 일이었다.
당장의 몸으로 즉시 활용 가능한 수준의 너클볼부터 익혔다. 너클볼의 위력이 조금 떨어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KBO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마냥 그 상태로 만족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120km/h짜리 너클볼이 몸에 적당히 익은 이후, 그러니까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의 중반부터는 너클볼의 기초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몸에 익혀나갔다.
-구속은 신경 쓰지 마. 최대한 회전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자고.
손가락으로 공을 채지 않는 상황에서 구속을 더하기 위해서는 결국 몸통의 회전과 팔의 스피드를 올려야했다. 등과 목. 그리고 어깨의 근육을 혹사하는 작업이다. 또한 그것에 신경쓰다보면 결국 손가락으로 공을 밀어내는 데 신경이 덜 쓰일 수밖에 없다.
필 니크로는 성민에게 가볍게 캐치볼을 하듯이, 하지만 순수하게 손끝의 감각만을 신경 쓰는 것을 훈련시켰다.
그렇게 2개월. 본래라면 가장 먼저 익혀야 했던 형태의 너클볼에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역시 몸 하나는 타고났어.
“너클볼로 세계 최고가 될 가능성을 지닌 투수는 세계를 통틀어 오직 나뿐이었다면서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하여간, 칭찬은 절대 안 까먹지.
구속에 신경 쓰지 않았음에도 성민이 던지는 너클볼의 구속은 무려 100km/h를 상회했다. 그것은 최고 157까지 던질 수 있도록 타고난 그의 튼튼한 어깨 덕분이었다.
아마 보통의 사람이 성민과 같은 방식으로 공을 뿌렸더라면 70km/h 혹은 80km/h 남짓한 구속이 한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프로에 너클볼러가 적은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리 극심하게 변화하는 공이더라도 70km/h. 80km/h로는 깜짝 쇼 용이 아닌 이상 절대 프로에서 써먹을 수 없다.
“근데 이거 이대로도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63마일은 너무 느린 것 같은데.
“에이, KBO에는 속구 평속 80마일인 투수도 선발로 뛰는데요 뭘.”
-······.
그렇게 단순히 너클볼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시작했던 훈련에서 당장 실전에서 써먹을 만한 공이 탄생했다.
느린 공, 빠른 공.
두 개의 선택지에 더 느린 공이 추가됐다. 심지어 느린 공과 더 느린 공은 알아도 치기 힘든 너클볼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다니엘 버튼의 방망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스윙 삼진.
대구 그리핀즈의 타자들이 악몽을 경험했다.
물론 악몽을 경험한 것은 대구 그리핀즈의 타자들만이 아니었다.
‘미치겠네.’
성민의 공을 받는 권혁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120짜리 좀 덜 변하는 너클볼에도 온몸에 멍이 들어가며 고생하던 혁준이었다. 구속은 줄었다고 하지만 공의 변화는 더 심해졌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꾸역꾸역 잡아내는 것은 앞서 120짜리 너클볼을 받으며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혁준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딱!!
[초구 타격!! 높게 뜬 타구!! 하지만 내야를 넘기지 못 합니다. 권혁준 내야 뜬공 아웃!!]
수비 이닝에 대한 부담 때문일까? 도무지 방망이가 힘을 쓰지 못했다.
“어휴, 박동엽도 박동엽이지만, 권혁준 저 새끼는 더 나빠.”
“너무 그러지 마. 내가 이번에 너클볼 특집 기사 봤는데, 너클볼이라는 거 받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하더라. 메이저에서도 너클볼 전용 포수는 원래 타석에서 똥이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0할대 타율이 말이 되냐? 쟤 지금까지 여섯 경기 선발로 출장해서 십팔 타석 십팔 타수 1안타야. 이런 십팔. 뭐 원래부터 구 푼이었다지만 오 푼은 좀 심하잖아. 아니, 심지어 오늘 경기 이대로 가면 반올림해서 0할 타자 탄생이야.”
“그 대신 성민이 평자책도 반올림해서 0점대 가려고 하잖아.”
“솔직히 김성민이 마린스 다른 투수들에 비해 득점 지원 약한 건 권혁준 저 새끼가 매일 공격에 맥을 툭툭 끊어놔서 그런 거라고.”
혁준을 강하게 비난하는 친구를 향해 마린스의 팬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아니지. 애초에 마린스는 권혁준이 끊어놓을 맥조차 없어. 그리고 솔직히 성민이만 득점 지원 부실한 것도 아니잖아. 얘들은 그냥 총체적 노답이야.”
“그런가?”
“그래, 좀 보라고. 시발. 다 죽어가던 해리 본조차도 살려내는 우리 마린스의 매직을.”
1회 초.
원아웃 만루까지 허용했던 해리 본은 이후 마린스의 공격을 꾸역꾸역 잘 막아냈다. 안타와 볼넷은 제법 자주 나왔다.
하지만
-딱!!
[아!! 유격수 빠르게 공을 잡아 2루에!! 2루에서 다시 1루로!! 더블 아웃!! 4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때마다 번번이 해리 본의 커터가 땅볼을 유도했다.
전광판의 점수가 1:0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평소였다면 그 터질 듯 터지지 않는 변비 같은 타선을 대신하여 마린스 팬들의 속이 펑펑 터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5회 초. 1:0. 1점차 리드.
평소 패턴대로라면 이제 슬슬 역전 당할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 시점이다.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초구, 120km/h의 너클볼.
-딱!!
[다니엘 버튼!! 빗맞은 타구, 유격수 박동엽 빠르게 달려듭니다.]
동엽이 빠르게 달려나가 글러브로 공을 잡아냈다. 공을 뽑아내는 동작까지 물 흐르듯 완벽했다. 평소였다면 힘있게 일루를 향해 공을 던질 타이밍. 그가 짧게 날숨을 내뱉었다.
그리핀즈의 4번 타자 다니엘 버튼은 느리다.
그러니 침착하게.
지금은 절대 실수할 수 없다.
그의 송구가 정확하게 일루수의 미트에 틀어박혔다.
“아웃!!!”
[초구 내야 땅볼 아웃!! 김성민 선수가 공 하나로 다니엘 버튼 선수를 잡아냈습니다.]
[5회 초. 원아웃. 이걸로 김성민 선수의 평균자책점은 0.69. 드디어 0.7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물론 아직 시즌 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거의 여섯 경기째를 치르는 상황에서 이건 매우 놀라운 기록입니다.]
KBO 최고의 타자가 초구 내야 땅볼에 힘없이 물러나는 모습에 마린스의 형편없는 공격에 꽉 막혀가던 팬들의 속이 뻥 뚫렸다. 물론 삼진도 아니고 내야 땅볼 하나에 팬들의 속이 뻥 뚫린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야 땅볼로 물러난 타자가 그리핀즈의 중심타자이자, KBO에서 가장 위협적인 타자 중 하나인 다니엘 버튼이기 때문에?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5회 초, 선두 타자가 그리핀즈의 4번 타자인 다니엘 버튼이었다는 점이었다.
5회 원아웃까지 총 13개의 아웃카운트를 잡기까지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숫자는 정확히 13명.
대구 그리핀즈의 타자 가운데 아직 1루를 밟은 타자는 없었다.
“됐어!!! 다니엘 버튼 잡았으면 이번 이닝은 끝난거나 다름 없지 뭐.”
“야, 괜히 불길한 소리 하지 마라.”
“뭐가? 맞잖아. 솔직히 그리핀즈 타선도 버튼과 여덟난쟁이지 뭐.”
“그건 그런데, 지금 수비하는 애들도 우리 마린즈거든. 난 방금 박동엽이 공 잡는 순간 또 내야로 송구하지 않을까 가슴이 쿵덕거리더라.”
물론 5회는 아직 설레발 치기에 많이 이르렀다.
하지만 올해로 50년이 되는 KBO의 역사에 퍼펙트게임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심지어 근 10년을 통틀어 퍼펙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기록도 지난 2022년의 7회 투아웃까지가 전부다.
노히트 노런 기록의 경우 총 19회.
그나마 그중 9회는 외국인 용병 투수의 기록이고, 토종투수의 노히트 노런은 2000년 이후 단 한 번도 기록되지 못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이번 시즌 5경기에 등판하여 5승을 거두고 지금까지 평균자책점 0.69를 기록 중인 투수다.
그렇기에 아직 설레발 치기 많이 이른 5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마린스와 그리핀즈의 대결에 모여들었다.
-에이 시발, 내가 호크스 경기를 보느니 그냥 마린스랑 그리핀즈 경기를 보고 말겠다.-
-난 지금 호크스 파크에서 VR로 마린스랑 그리핀즈 경기 보고 있음. 경기장에서 이러고 보니까 사직에 직관 온 것 같고 좋네.-
-근데 다들 마린스랑 그리핀즈 경기는 갑자기 왜 본다는 거야?-
-사직에서 김성민이 5회까지 퍼펙트 기록 중임. 지금 그리핀즈 팬들 난리 남. 아주 개박살이야.-
-시발, 그래 김성민. 내가 너 잘 던지는 건 알겠어. 평자책 0.69. 대단해. 아주 선태양 재림이야. 근데 꼭 하필 우리랑 할 때 꼭 그렇게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권혁준 넌 나가 있어.-
KBO의 인기팀인 마린스의 평균 시청률은 1.1% 내외. 상대가 마찬가지로 KBO의 인기팀인 호크스나 엘리츠일 경우에는 2%까지도 상승한다.
그리고 지금 성민의 호투가 0.9%에 머무르던 마린스와 그리핀즈의 시청률을 0.3%나 끌어올렸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아웃!! 내야 땅볼 아웃, 외야 플라이, 그리고 삼진!! 5회 초, 김성민 선수가 또 한 번 그리핀즈를 삼자 범퇴로 막아냅니다.]
5이닝 퍼펙트.
덕아웃으로 돌아와 조용히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성민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묵직했다. 마린스의 타자들 역시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불과 50분 전만 하더라도 오늘 당장의 1승이라는 명제로 희미하게 이어지던 마린스의 덕아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렸다.
2000년 이후로 32년 동안 토종 투수는 단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KBO 창설 이후 50년 동안 단 한 번도 기록되지 못했던 대기록이 될지도 몰랐다.
그 압도적인 무게감 앞에서 마린스의 파벌 싸움은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
5회 말.
마린스의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갔다.
< 공통의 목표(3)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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