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31화 (32/287)

< 공통의 목표(2) >

대구 그리핀즈의 강 단장이 열을 올렸다.

“미치겠군!! 이봐 한 팀장. 이번에는 정말이라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단장님.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쇼. 해리의 AAA 통산 성적이 4.37입니다. 심지어 그중 2/3는 타고투저였던 퍼시픽코스트리그에서 뛰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선수가 대체 왜!! 어째서!! 한국에서 꼴랑 1승밖에 못하고 있냐고. 뭐, 음식이 입에 안 맞기라도 하대? 미국 남부 가정식 식당이라도 차려 줘야 해?”

“아뇨, 밥은 맛있다고 잘 먹는데.”

“이봐, 지금 누가 진짜 밥 이야기 하는 것 같아?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게 해리가 스트라이크 존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치겠군. 작년부터 아주 그놈의 존, 존. 아니 심판들이 외인한테 존을 깐깐하게 적용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그래서 올해는 컨트롤 엄청 좋은 애로 데리고 온 거라며.”

해리 본의 최고 구속은 94마일. 151km/h. 우완투수의 151km/h는 KBO를 기준으로는 강속구 투수지만, MLB를 기준으로는 평균 미달에 불과하다. 그보다 빠른 공을 던지는 AAAA급 우완투수는 널렸다.

그럼에도 굳이 그를 용병으로 뽑은 것은 작년 구속만 보고 뽑았던 어느 투수의 볼질 때문이었다. 최고 98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주제에 밀어내기 볼넷으로 점수를 내줬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통이 터진다.

미국에서 해리 본은 볼넷을 적게 주는 투수였다. AAA에서 4시즌 73경기 427.1이닝을 뛰는 동안 볼넷이 고작 42개. 통산 BB/9가 0.89밖에 되지 않았다. 심지어 MLB에서 27경기 1승 4패 5.11의 성적을 거두는 동안에도 BB/9는 0.96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낮은 코스 커터가······.”

“그게 뭐!!”

“분명 존 안으로 들어오는 커터인데도 심판의 판정이 너무 짜다고······. 상대 팀 타자들도 전부 그걸 알아서 커터에는 방망이를 내밀지 않는답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아뇨, 그런 문제를 이미 파악했고, 수정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해리의 경우 성격도 좋고 적극적으로 KBO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조금만 더 지켜보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말 작년에 박 팀장이 했던 거 기억해?”

“네, 넵!!”

“그러면 그 박 팀장이 지금 뭐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겠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자신인 만큼 너무 잘 알고 있다. 한 팀장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최선 다 안 해도 되니까, 우리 결과를 가지고 오자고. 결과를. 응?”

***

1회 말. 아직 더위가 찾아오지 않은 5월의 저녁.

마운드의 해리 본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원아웃 만루.

타석에 5번 타자 맷 데이비스가 들어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린스에서 뛰고 있는 용병 타자다. 0.276/0.341/0.491. 작년의 타격 성적만 보자면 재계약이 살짝 아리까리한 수준이지만 중견수로 수비능력이 매우 준수하다. 무엇보다 공감독이 좋아하는 한 방이 있는 타자다.

-뻐엉!!!

[포수 맷 데이비스의 체크 스윙 여부를 묻습니다.]

[일루심이 방망이가 돌지 않았다고 판정하네요. 볼, 볼입니다.]

[맷 데이비스 선수 같은 경우 이미지와 다르게 참을성이 상당히 강한 선수에요. 작년 성적을 보면 631타석을 섰는데 삼진이 91개밖에 되지 않거든요. 볼을 고를 줄 아는 타자예요.]

무엇보다 박동엽과 다르게 존을 빠져나가는 공에 방망이를 참을 줄 아는 선구안을 가졌다. 그럼에도 빅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컨택 능력.

하지만 KBO와 MLB 타자들의 가장 큰 차이는 컨택이다. 공 감독은 수많은 용병 후보 가운데 컨택 툴이 가장 부족했던 맷 데이비스를 선택했고 그것은 올바른 선택으로 드러났다.

-뻐엉!!!

[2구 연속 볼!! 해리 본, 이거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요.]

파울, 볼. 그리고 다섯 번째.

-뻐엉!!

[아, 심판 손 올라오지 않습니다. 밀어내기 볼넷. 1회 말, 해리 본의 밀어내기 볼넷입니다.]

-밀어내기 볼넷? 지금 이게 야구냐?-

-아니, 무슨 용병 투수가 1회에 밀어내기 볼넷을 하냐고!!-

-나 왜 이런 광경을 이미 본 것 같은 기분이지? 설마 데자뷰?-

-데자뷰는 무슨. 작년에 심심하면 보던 광경 이잖아.-

-우리는 왜 매일 볼질 하는 투수만 용병이라고 데리고 오는 건데. 대체 왜!!-

작년에도 보던 답답한 광경이 또 다시 재현되는 순간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불만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마운드의 해리 본은 당황하지 않았다.

1점 정도야.

0.215의 ISO(순장타율)가 말해주듯 맷 데이비스는 위험한 타자였다. 볼카운트가 몰렸다고 안일한 공을 던졌다가는 1점으로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어차피 후속 타자는······.

타석에 6번 타자 박동엽이 올라왔다.

-부웅!!!

-부우웅!!!!

-부우우우웅!!!

위협적인 세 번의 스윙.

그리고 폭풍 같은 삼구삼진.

“아!!!”

관중석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새끼, 저거?’

성민의 눈에서도 불꽃이 치솟았다. 못 치는 거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방금 밀어내기 볼넷을 했던 투수를 상대로 만루에서 폭풍 같은 3스윙 삼진이라니. 이건 아주 개새끼다.

그런데 또 들어오는 박동엽을 보니 욕을 할 수도 없다.

얼굴에 미안함이 뚝뚝 흐른다. 자기 딴에는 충분히 쳐낼 만한 공으로 보였나 보다. 성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엽아, 오늘 경기 끝나고 알지?”

“네, 선배님.”

어차피 성민 본인이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단도리 칠 인간은 많았으니까. 비주류 계파의 야수 최고참. 현정현이 알아서 동엽의 특타를 약속했다.

투아웃 주자 만루.

이어지는 타자를 내야 땅볼로 잡아내며 해리 본이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1:0

그리핀즈의 팬들은 밀어내기 볼넷에 괴로웠고, 마린스의 팬들은 원아웃 만루가 또다시 1점으로 끝난 것이 괴로웠다.

오늘 경기 전에 있었던 박동엽의 우호적인 기사 따위는 원아웃 만루에서 나왔던 폭풍 같은 삼구삼진으로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인터넷 게시판은 잠시 그리핀즈와 마린스를 조롱하는 게시글로 뒤덮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시간 중계되던 서울 엘리츠와 대전 피닉스가 게시판을 재탈환했지만 말이다.

2회 초.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선두 타자는 그리핀즈의 4번 타자 다니엘 버튼.

아시아를 찾는 전형적인 미니멈급 일루수로 입단 3년 이후 40인에서 마이너 옵션을 다 소모하고 지명 할당,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방출된(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드래프트 8년 차 선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타격이 부족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애당초 야구에서 1루는 수비 부담이 가장 덜한 포지션이다. 그 말은 즉 수비를 못 하는 타자들 가운데 지명 타자와 함께 가장 공격력이 출중한 타자들만이 갈 수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게다가 그 자리는 단순히 실력만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고액 연봉을 받는 인기 많은 늙은 타자들. 1루는 나이를 먹어 수비가 힘든 그들에게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다니엘 버튼은 메이저에서 3시즌 동안 327타석에서 107의 wRC+를 기록했다. 수비가 평균 미만이었던 탓에 조금 많이 까먹었지만, WAR 역시 3시즌 합계 0.7을 기록했다.

하지만 마이너 옵션이 모두 끝났을 때 팀은 그를 웨이버 공시했고, 그는 또다시 40인 밖으로 밀려났다. 이제는 어지간히 대단한 활약을 보이지 않는 이상 메이저 콜업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다니엘은 가지 못할 메이저에 목을 매는 대신 과감하게 80만 달러에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용병의 무덤 그리핀즈에서 2년 차 14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메이저 평균 미만의 1루 수비는 KBO 평균 이상의 1루 수비였고, 메이저 107의 wRC+는 KBO에서 159의 wRC+로 둔갑했다.

그는 명백한 KBO 최강의 타자 중 하나다.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폼이 좋은데?

‘빅리그에서도 빠따는 평균 이상하던 친구였는데, 한국 와서 더 발전했다는 평가도 있으니까요. 올해도 이대로 계속하면 빅리그는 몰라도 NPB 정도는 노려볼만하죠. 발 느린 거 빼면 흠잡을 곳이 없어요.’

성민의 손이 공을 만지작거렸다.

-쫀 건 아니지?

‘당연하죠. 아무리 그래봤자 전 빅리그에서 통할만 한 선발 투수고, 저 친구는 빅리그에 적응 못 한 일루수잖아요.’

-그렇다고 방심하진 말고.

‘어휴, 하여간 잔소리는. 압니다. 알아요. 아무리 좋은 투수도 같은 리그 수준의 타자라면 10번 던져서 2번은 두들겨 맞는 게 야구라 이 말이죠.’

모자를 고쳐쓰는 성민을 바라보는 다니엘 버튼의 시선이 매서웠다.

KBO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 투수. 지금까지 보여준 포스는 그야말로 무적 그 자체.

‘하지만 욕심이 너무 많아. 진짜 제대로 하고 싶었다면 하나만 선택했어야지.’

KBO 대다수의 타자들에게는 완전무결한 투수로 보이는 성민이었지만 충분한 마이너 생활을 걸치고 빅리그의 진짜 괴물들을 보고 온 다니엘 버튼에게는 분명한 약점이 보였다.

151짜리 속구와 120짜리 너클볼이라고?

그래, 인정한다. 터무니없는 조합이다. 애당초 150을 던질 줄 아는 투수가 너클볼을 던지고 있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다. KBO를 박살내는 것도 당연했다. 이건 충분히 빅리그에서도 통할 만한 투수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성민은 빅리그에서도 통할 만한 투수일 뿐이다. 절대 빅리그를 제압 가능한 진짜 트루에이스는 될 수 없다.

간단하다.

151짜리 속구와 120짜리 너클볼은 공존할 수 없는 공이기 때문이다.

너클볼의 매커니즘은 기존 공들의 정반대에 서 있다.

최대한 강하게 공을 채서 회전을 줘야 하는 공들과 그것을 억제하여 최대한 회전을 억제해야 하는 너클볼.

지금 성민은 동시에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힘껏 팔을 뻗은 욕심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사람의 감각과 근육에는 한계가 있다.

속구가 저기서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너클볼이 약해지고, 너클볼이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속구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KBO 레벨에서는 151의 속구와 120의 너클볼 모두 언터쳐블에 가까운 마구다. 하지만 빅리그 레벨에서는 다르다. 151의 속구는 기껏해야 average(20-80스케일 상 50점). 120의 너클볼 역시 above-average(55점)에 불과하다.

다니엘 버튼 자신이라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공들이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너클볼.

0.25초의 시간 동안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민의 공을 지켜봤다. 빅리그에서도 평균 이상의 배트 스피드를 가진 다니엘 버튼이었다.

거기서 0.03초의 시간을 더 투자했다.

-꿈틀

성민의 공이 흔들렸다.

구단에서 분석하기로 성민의 공이 마운드에서 포수의 미트에 도착하기까지 평균 회전수는 2.5회에서 3회.

충분히 쳐낼 수 있다.

다니엘 버튼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이 날아올 방향을 향해 힘차게 움직였다.

하지만

성민의 공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천천히, 더 천천히 춤을 출 뿐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103km/h

-이걸 벌써?

‘아이참, 비장의 무기 숨기고 있다가 탈탈 털리기 직전에 쓰는 건 옛날 스타일이라니까요. 요즘은 일단 괜찮다 싶으면 시원하게 쓰고 보는 게 정답이에요.’

그것은 성민이 시즌 처음으로 던진 느린 너클볼이었다.

< 공통의 목표(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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