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통의 목표(1) >
KBO에 처음 용병이 도입된 것은 1998년.
외국인 드래프트로 시작됐던 용병제도는 34년의 세월 동안 많은 변천을 거쳐왔다. 그리고 그 긴 시간만큼이나 다양한 기록을 남겨왔다.
40-40을 기록하며 리그를 폭파했던 어느 타자라던지, 7시즌 동안 102승을 기록했던 어떤 투수 같은 아름다운 기록이 있는 반면 두 달 만에 팀을 무단이탈 해버린 용병이라던지, 1할 타율의 용병이라던지, 역대 용병 투수들 가운데 리그 평균 이상의 활약을 한 비율이 채 2할이 안 되는 어느 팀 같은 그런 슬픈 기록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오늘 성민이 상대할 팀인 대구 그리핀즈가 바로 그런 팀이었다.
KBO는 투수가 귀하다.
그것도 매우 꾸준하게 투수가 귀하다.
타자들의 평균적인 수준은 AA에 근접하지만, 투수의 평균적인 수준은 AA보다는 A+ 더 근접한다. 즉 어지간한 AAAA급, 메이저 40인 로스터급의 투수라면 KBO에서 올스타급의 활약을 보여야 정상이라는 의미다.
물론 세상이 언제나 그렇게 정상적으로만 돌아간다면 KBO 원년 팀인 마린스가 단일시즌 정규 시즌 우승이 0회인 것도, 역대 페이롤 순위로 따지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주제에 40년 동안 코시 우승이 한 번도 없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구 그리핀즈는 매년 꾸준히 투수 용병을 뽑았다.
그리고 꾸준히 망했다.
그리핀즈를 제외한 9개 구단은 최소한 일 년 정도는 리그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트루 에이스급 용병을 가져본 적이 있지만, 그리핀즈의 역사에 그런 것은 없었다.
그들이 뽑았던 용병 투수 가운데 에이스급이라고 할만한 투수를 찾자면 근 2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할 지경이다.
아니, 그 정도면 다행이다.
지금까지 뽑아온 용병 투수의 8할이 리그 평균 이하의 성적을 기록했다. 사실 KBO의 심판들이 용병 투수에게 조금 깐깐한 존을 적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작한다고 해도 유독 그리핀즈의 용병 투수들 성적은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 타자 놈들이 양심이 없더라도 오늘은 좀 하겠지?”
“오늘 저쪽 선발 외국인 용병 투수 아니야? 우리 타자 놈들 빠따 돌리는 양심 생각하면 외국인 투수는 공략 불가일 텐데.”
“외국인도 외국인 나름이지. 그리핀즈가 언제 외국인 농사 성공하는 거 봤어?”
“내가 요즘 다른 팀 경기를 잘 안 봐서. 왜? 그리핀즈는 올해도 또 망했어?”
“오늘 선발이 해리 본이거든. 걔 지금까지 승리가 딸랑 1승이야 1승.”
“1승? 허, 엉망이네.”
“평균자책점도 엄청 높았는데. 어디 보자. 그래, 5.27이네. 5.27.”
“이거, 오늘은 좀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 봐도 되겠는데? 우리 성민이는 5승에 0.77이잖아.”
“뭐, 일단 투수에서는 완승이지.”
작년까지 마린스 팬들의 패턴은 이랬다.
일단 겨울이 되면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시범경기 성적에 ‘올해는 다르다!!’라는 기쁨에 젖는다.
하지만 4월이 지나 5월이 되면 ‘마린스 이 시벌 것들.’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하지만 올해는 진짜 달랐다.
5월에 접어든 지도 벌써 일주일. 보통 이라면 ‘마린스 이 시벌 것들.’을 외쳐야 할 사직 구장 마린스 팬들의 얼굴에는 훈기가 가득했다. 그것은 패배에 대한 걱정도, 졸전에 대한 분노도 아닌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만든 표정이었다.
마운드에 선 성민이 경기장의 그런 분위기를 읽었다.
‘좋네요.’
-뭐가?
‘그냥 분위기가요.’
필 니크로 역시 지금 성민의 마음을 이해했다. 만 28세부터 48세까지 무려 20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쉬웠다.
-충분히 즐겨두라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홈 경기에는 홈 경기만의 특별함이 있다.
원정 경기에도 원정 팬들이 따라온다지만, 홈의 관중 동원력에는 비할 수 없다.
사직구장을 가득 메운 자신을 열렬히 응원하는 팬들의 열기. 익숙한 마운드. 익숙한 지형지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살아생전 필 니크로는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19살 처음 너클볼을 들고 밀워키에 입단했을 때 프로 타자들은 나의 공을 배팅볼처럼 쳐냈었지. 무서웠어. 아마 3, 4년은 줄곧 도망가는 피칭만을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알게 됐어. 너클볼은 도망가는 거로 승리할 수 있는 공이 아니야. 너클볼로 승리할 수 있는 순간은 나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나의 공을 믿고 배짱 있게 던지는 순간, 오직 그 배짱 넘치는 순간뿐이야.”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는 너클볼.
노리는 곳은 스트라이크존의 한복판이었다.
성민의 손끝을 떠난 공이 춤을 췄다. 마치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맞춰보라는 듯 이리 저리 움직이는 공.
타자의 시선이 공을 쫓았다. 0.25초의 빠듯한 시간.
마침내 타자가 결단을 내렸다.
휘두른다.
그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직후 성민의 너클볼이 또 한 번 변화를 일으켰다.
마스크를 뒤집어 쓴 혁준의 미트가 빠르게 움직였다.
-부웅!!!
“스트라잌!!”
성민이 노렸던 곳은 존의 한복판. 혁준이 기다리던 곳 역시 존의 한복판.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른 곳은 몸쪽 높은 곳.
하지만 마지막 공이 도착한 곳은 바깥쪽 높은 곳.
공을 던지는 사람도, 공을 치려는 사람도, 공을 받는 사람도 예측할 수 없는 너클볼이 경기를 이끌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저런 공을 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하나둘씩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얼마 전부터 구장에 직관 온 팬들을 위한 서비스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무료로 서비스되는 12개의 카메라 시점이 스마트폰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중에서 타자의 시점에 가장 가깝게 설치된 카메라 영상을 확대했다.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미쳤네. 이걸 어떻게 쳐.”
“그러게. 마구, 마구 거리다니. 진짜 마구잖아. 난 이거 대체 어떻게 받는지도 의문이다.”
집에서 TV로 볼 때는 해설자의 말에 따라 그냥 흔들리는 공이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타자의 시점에 가깝게 바라보는 영상은 터무니 없었다.
프로의 타자들이 140km/h, 150km/h의 공을 뻥뻥 두들기니 120km/h정도의 공은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인 야구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사회인 야구 1부리그의 비선출 에이스들이 던지는 공의 평균구속은 110 남짓. 120을 넘는 공은 비선출 투수로는 거의 불가능한 속도다.
그런데 그런 120의 공이 자기 마음대로 흔들리면서 들어온다. 일반인들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건 도저히 칠 수 없는 마구다.
대구 그리핀즈 팬들 역시 자신의 타자들이 상대하는 공을 직접 구경했다.
“시발, 사기네. 이런 공을 치라고? 이러니까 평자책이 0.8이 나오지.”
“야, 그래도 밥 먹고 공만 치는 애들인데, 이거 구속은 120밖에 안 나오잖아. 이 정도면 그래도 치는 애들은 치겠지.”
“그럴까?”
“우리가 용병 운이 없지 어디 타자 운이 없냐?”
“그건 그렇지.”
사실 이번 시즌 그리핀즈의 타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타율로 따진다면 아래서 네 번째지만 OPS로 따지면 잘하는 서울 두 팀에 이어 위에서 세 번째다.
사실 상성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핀즈의 타선은 괜찮은 선구안, 조금 부족한 컨택, 하지만 그걸 커버할만한 펀치력을 가진 타선이었다. 너클볼을 상대로 행운의 장타를 만들어내기에 괜찮은 조합이다.
하지만 행운의 장타라는 것은 결국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그리핀즈에게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김명석. 스윙 삼진!! 1회 초, 김성민 선수가 그리핀즈를 상대로 삼진 두 개 포함.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짓습니다.]
[김성민 선수가 지금 시즌 여섯 번째 등판. 지금까지 5승에 평균자책점은 방금 이닝으로 0.75까지 떨어졌습니다. 이건 뭐 거의 무적의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물론 김성민 선수도 언제까지 이렇게 좋은 모습만 보일 수는 없을 겁니다. 너클볼 투수라는 것이 원래 일 년에 몇 경기는 말도 안 되게 털리고 그러거든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날이 오늘은 아닌 것 같다는 점입니다.]
외야 플라이 하나 포함해서 삼자범퇴.
성민이 1회 초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응? 너 왜 안 내려가냐?
그런데 평소와 조금 달랐다. 본래 이닝이 끝나면 곧바로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성민이 마운드에 멀뚱하니 서있었다.
‘할 일 해야죠.’
-할 일?
필 니크로의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마운드에 서 있던 성민에게 그보다 연차가 어린 후배들은 고생했다며 꾸벅 인사를 했고, 그보다 연차가 높은 선배들은 잘했다며 슬쩍 왼쪽 어깨를 두들겼다.
훈훈한 장면이다. 사직의 팬들이 그 흡족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실점한 녀석이 저러고 있었다면 꼴불견이겠지만, 삼자 범퇴를 한 투수가 저러고 있으면 간지다.
-와, 홈 경기라고 지금 서비스 하는거야?
‘뭐, 겸사겸사요.’
-겸사겸사?
그리고 저 먼 외야의 끝자락에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선배 수고했어요.”
“내가 수고는 무슨. 고생은 네가 다 했고, 난 그냥 해야 할 걸 했지.”
“크, 역시 왕년에 국가대표 우익수. 고작 이 정도 수비는 그냥 해야 할 걸 한 수준이다. 이거네요.”
“새끼가. 하여간 말은 잘한다니까.”
성민의 너스레에 우익수방면 외야 플라이를 잡아냈던 호섭이 멋쩍게 웃었다.
-와, 이 독한 새끼. 야구나 하자더니. 저딴 중학생도 잡을 외야 플라이를 칭찬하려고 이걸 남아서 기다린 거야?
‘영감님, 솔직히 친구 없죠?’
-그건 갑자기 또 무슨 헛소리야.
‘야구를 어디 혼자서 합니까? 아홉 명이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원래 원만한 교우 관계라는 게 다 이런 겁니다.’
-허······.
‘그리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거예요. 이런 사소한 칭찬이 얼마나 효과적인데요. 뭐 같잖은 새끼가 칭찬하면 그냥 같잖게 들리긴 합니다만, 지금 제가 칭찬하면 그건 진짜 칭찬이잖아요? 아마 저 형님 최소한 이번 경기는 신나서 열심히 뛰어다닐 겁니다.’
필 니크로가 할 말을 잃었다.
홈 경기, 관중들의 분위기가 훈훈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오늘 마린스 덕아웃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괜찮았다. 물론 그렇다고 두 개로 쪼개진 계파가 하나가 되어 으쌰으쌰하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래의 마린스 덕아웃은 상대 계파의 선수들이 실수하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코웃음 치고, 잘하면 함께 기뻐해 주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는 분명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오늘 덕아웃의 그런 분위기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 묘한 분위기에 공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이 모이면 무리는 나뉘기 마련이다. 계파를 없앨 수는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나뉜 무리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다.
부산 마린스는 너무 오랜 기간 우승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들에게 승리, 그리고 우승은 너무 먼 개소리였고, 당면한 과제는 본인의 성적, 그리고 내년의 연봉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팀의 동료는 함께 우승을 일굴 동지가 아닌, 경쟁자다.
물론 여전히 우승이라는 먼 목표까지는 공유할 수 없는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작년의 준플옵 진출로 인한 연봉상승. 그리고 김성민이라는 생각지 못한 절대적인 에이스의 등장이 최소한 오늘의 승리라는 공통의 목표를 그들에게 던져 주었다.
그것이 성민이 의도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간에 말이다.
그리고 1회 말.
AAA통산 4시즌 73경기 31승 21패. 4.37
메이저 2시즌 27경기 1승 4패 5.11
그리고 KBO 5경기 1승 3패 5.27
본격 빅리그보다 KBO가 더 어려운 투수. 해리 본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 공통의 목표(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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