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창회 >
아침 7시.
성민의 어머니 권 여사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들이 독립하여 집을 떠난 지도 어언 8년. 그제 있었던 경기의 승리를 보고 아들에게 보냈던 메시지는 아직까지도 읽씹이다.
“하여간 자식새끼 낳아봐야 아무 소용 없다니까. 성민 아부지. 왜 이렇게 일찍 갔어요. 자식놈 얼른 독립시키고 둘이 알콩달콩 살자고 해놓고.”
머리맡에 놓인 남편의 젊을 적 사진을 바라보며 잠깐 하소연을 해본다. 31살에서 멈춰버린 남편. 그리고 거울 속 보이는 권 여사 자신의 주름진 얼굴이 씁쓸하다.
하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늘을 위해 무려 일주일을 준비했다.
“그 여편네들 오늘 아주 기를 팍 꺾어버려야지.”
회사 일은 미리 다 정리해뒀다. 오늘, 내일 이틀 정도는 권 여사가 없더라도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갈 것이다.
여고 동창회.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너무 흔하게 있는 클리셰다. 하지만 권 여사 나이가 되면 동창회 만한 모임도 또 없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권 여사는 동창회에서 제일 잘 나가는 축에 속했다. 집에서 살림하거나, 어디 회사에 나가거나 작게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과 달리, 그녀는 백화점에 매장을 세 개나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었다.
무엇보다 그 나이가 되면 빼먹을 수 없는 자식 자랑에서 그녀는 완벽한 승리자였다.
억대의 계약금을 받고 프로에 입단하여 1년 차부터 승승장구 하는 아들을 능가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몇 년은 달랐다.
“미영아, 너 그거 들었어? 저기 명숙이네 애가 이번에 글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더라.”
“공무원? 몇급?”
“7급이래 7급. 거기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만났던 여자애랑 결혼한다는데 걔도 같이 쌍으로 7급 공무원이란다. 요즘 같은 시대에 7급 공무원 부부라니. 어휴. 아주 명숙이 저것은 남편복도 많은 게 자식 복도 넘쳐요.”
성민이 잘 나갈 때 잘난척을 조금 많이 했던 탓일까? 친구라는 년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속을 긁었다.
성민이 아시안 게임에서 뛰던 시절이라면 그깟 7급 공무원이었겠지만 당시 성민은 1군보다 2군에 더 오래 있는 미래가 불안한 야구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매일 TV만 키면 뉴스에 한 꼭지 정도는 꼭 등장한다. 인터넷에 스포츠 섹션엔 언제나 아들의 얼굴이 떡 하니 박혀있다.
[김성민 역대급 4월을 지나 5월까지? 시즌 5승째 수확!!]
-얘 이번 시즌 끝나고 FA 아님? 이대로면 100억대도 가능하겠는데?-
-100억은 무슨. 꼴랑 1년 반짝 하는데 무슨 100억임. 게다가 시즌 이제 시작임. 너클볼러는 특성상 한두 경기는 무조건 크게 조지게 돼 있음.-
-1년 반짝은 아니지. 솔직히 커리어 초반에 보여주던 포텐을 지금 터트렸다고 봐야함. 난 해외진출 본다.-
-해외는 무슨. 아주 잠깐 잘한다고 개나 소나 다 해외야.-
-이번 시범 경기 때 보여준 거 때문에 일본에서 존나 관심있게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음.-
-뭐가 어떻게 됐건, 김성민은 좋겠다. 공놀이 하나 잘한다고 최소 수십억을 벌겠네.-
권 여사가 확신했다.
오늘 동창회의 주인공은 바로 본인이라고.
하지만 권 여사의 그런 야심은 동창회 시작부터 무너졌다. 7급 공무원 아들과 며느리를 둔 명숙이 년이 치트키를 들고 온 것이다.
“어머, 얘 얼굴 좀 봐. 어쩜 이렇게 예쁠까. 명숙아, 다른 사진은? 다른 사진은 또 없어?”
“없기는, 엄청 많아. 우리 손주가 아주 이 할미를 너무 좋아해서 매주 주말만 되면 보고 싶다고 칭얼대고 난리도 아니란다.”
“어휴, 하여간 좋겠다. 아기가 예쁜 게 아주 나중에 연예인 해도 되겠다.”
아니, 손녀라니. 이건 솔직히 반칙이다. 누구 자식은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벌써 손녀라니. 물론 명숙이 년이 조금 일찍 시집가서 아들 나이가 성민이보다 다섯 살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벌써 손녀라니.
어디 얼마나 예쁜가 보자 하고 사진을 봤지만, 역시 예쁘다.
“거, 뭐 예쁘긴 예쁘네. 손가락도 꼬물꼬물하고.”
“미영이 너희는 무슨 소식 없어? 듣기로는 요즘 너희 아들이 아주 엄청 잘 나간다던데.”
“어휴, 그게 아주 무슨 어디 사장님이다 회장님이다 하는 양반들한테서 선이 막 쏟아는 지는데 우리 아들이 올해가 중요하잖아. 그래서 일단은 자기 일에 열중하라고 내버려 뒀어.”
“에이, 그런 게 어딨어. 1.4 후퇴 때도 연애할 사람은 다 연애했다더라.”
“그거야 원래 전쟁 같은 거 할 때는 생존본능으로 자손 번식의 욕구가······.”
“어휴, 그래 너 많이 배웠다. 어쨌거나 네 아들은 아직 소식 없다는 거지?”
오라질 년.
하여간 학창시절부터 제일 얄밉던 년이 60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얄밉다.
누구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놈이 여전히 메시지를 읽씹이나 하고 있는데 지들은 매주 주말마다 내려와서 손녀를 안겨준다고 자랑질이다.
이번 동창회도 아주 글러 먹었다. 아들놈이 아무리 성공하면 뭐하겠는가. 손자가 없는데.
'확 맞선이라도 붙여버려?'
하지만 권 여사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들의 인생은 아들의 인생이다.
뭐, 망해가는 인생을 나락에서 구해내는 것이야 부모의 의무겠지만, 저렇게 쭉쭉 뻗어나가는 아들을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읽씹은 심했다. 이번 주말 아들놈 집을 찾아가서 아주 질색팔색하는 대청소나 한번 거하게 해줘야겠다. 빨래도 잔뜩 쌓여있을 게 뻔하다.
권 여사가 결심했다. 오래간만에 잔소리나 한바탕 퍼부어주겠노라고.
그리고 그 순간.
“엄마?”
“응? 성민이 네가 여긴 어떻게?”
권 여사의 아들내미.
최근 프로야구에서 가장 핫한 투수. 김성민이 나타났다.
“그리고 옆에 그 아가씨는 누구고?”
그것도 아주 참해 보이는 아가씨와 함께.
***
성민이 5승째를 거둔 바로 그날의 일이다.
약속대로 동엽을 희연에게 데려다준 그는 자신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그녀에게 모레 따로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너 왜 갑자기 모레 약속을 잡은 거냐?
“인터뷰 한 번 해달라고 사정사정하잖아요. 우리가 쌓은 정이 있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죠.”
-근데 그건 그냥 오늘 해도 되는 거였잖아. 굳이 모레 부산 시내에서?
“저 오늘 선발 등판했고요, 엄청 피곤하거든요.”
-뭐, 그래 그럼 그런 거로 하자.
필 니크로의 표정이 묘했다. 그것은 마치 사춘기, 침대 밑에 야한 책을 숨긴 아들을 바라보는 아빠의 눈빛이다.
“아, 진짜. 저 연상 취향 아니거든요?”
-그래, 그래. 나도 잘 안다니까.
“아오, 미치겠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권 여사가 동창회를 위해 미용실에서 빡세게 세팅을 받을 때, 성민 역시 인터뷰를 위해 미용실에서 빡세게 세팅을 받았다.
-남자가 미용실에서 화장까지?
‘사진 잘 찍히려면 다 해야 하는 거거든요. 요즘 화장 안하고 사진 찍히면 혈색이 안 좋다고 어디 아프냐는 소리 들어요.’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어. 연예인도 아니고 운동선수가 화장이라니.
‘영감님. 영감님 시대에는 사진이고 영상이고 화질이 그냥 자체적으로 필터를 해주던 시대고요. 요즘은 모공 속 피지 하나까지 다 찍히는 QUHD 시대거든요.’
-진짜 사나이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모름지기 사내란······.
‘눼, 눼. 잘 알겠습니다.’
미용사가 성민의 머리를 만지는 동안 필 니크로는 자신이 활약했던 70년대의 스포츠 스타들이 얼마나 상남자였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물론 성민은 그 대부분 이야기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인터뷰가 약속된 곳은 해운대 파크하얏트의 라운지.
불과 몇 달 전 기억에서 지우고 싶던 맞선이 있던 자리였다.
“아, 이쪽으로 오세요.”
가벼운 기초화장만을 했음에도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미모의 희연이 성민을 맞이했다.
“요즘 제가 괜찮긴 괜찮나 보네요.”
“네? 그게 무슨?”
“얼마 전만 하더라도 동네 카페에서 만났는데 여기 엄청 비싼 호텔이잖아요.”
“어휴, 그때나 지금이나 김성민 선수는 항상 괜찮았죠. 안 괜찮은 건 법인 카드 아니겠어요? 그래도 오늘은 저희 팀장님꺼 들고 왔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드시고 싶으신 거 실컷 드세요.”
“하하,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나저나 그제 동엽이 인터뷰는 잘 하셨어요?”
“네, 덕분에요. 아주 좋은 기사 하나 뽑힐 것 같아요.”
“잘됐네요.”
커피와 가벼운 디저트. 그리고 인터뷰가 이어졌다.
“최근 굉장히 놀라운 기세로 이어가고 계신데요. 혹시 시즌을 치르는데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마린스 야수랑 불펜 놈들.
“글쎄요, 사실 시즌을 치르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 내내 제 자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일이죠. 사소한 부분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그 컨디션 조절에 가장 힘든 점이 뭔지도 말해주실 수 있나요?”
-마린스 야수랑 불펜 놈들.
“아무래도 음식조절이나 여름에는 더위 같은 게 무섭죠. 그렇다고 에어콘 팍팍틀면 감기걸리는 것도 걱정이고, 하다못해 잠만 조금 잘못 자도 몸 컨디션이 엉망이 되는 점 같은 것도 주의해야죠.”
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이번 시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마린스 야수랑 불펜 놈들 단체로 재규어스랑 트레이드.
“그거야 당연히 우승입니다. 이번 시즌 선수들이나, 코치님들. 그리고 감독님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분위기거든요.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마린스 팬분들께도 꼭 좋은 소식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끝낸 희연이 직접 카메라로 성민을 찍었다.
“평소에도 멋지지만, 오늘은 유독 더 멋지신데요?”
“신경 조금 썼어요.”
“오늘 인터뷰 끝나고 뭐 특별한 약속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뭐,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박 기자님 괜찮으시면 저랑 저녁 한 끼 어떠세요?”
“그건 당연히 해야죠. 제가 팀장님 법카를 왜 들고 나왔는데요. 성민 선수, 오늘은 소고기 드시죠. 소고기. 한우로.”
“괜찮겠어요?”
“어휴, 요즘 제일 핫한 선수랑 단독 인터뷰에 다음 경기 승리투수 인터뷰까지 약속해주셨는데 소고기 정도야 당연하죠.”
“어라? 그런 약속은 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성민의 말에 희연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거야 소고기에 소주 한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아니겠어요? 자, 일단 가시죠. 제가 근처에 좋은 곳 많이 알아요.”
“아뇨, 식당은 제가 안내하도록 할게요.”
“아, 평소 가보고 싶은 곳 계셨나요?”
“평소에 가보고 싶은 곳이라기보다는, 꼭 오늘 가고 싶은 곳이랄까요?”
***
“성민 선수, 오늘 정말 소고기 먹어도 된다니까요?”
희연의 이야기에 성민이 그냥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와, 이 치밀한 새끼. 너 설마 이걸 노린 거냐?
‘말했잖아요. 엄마가 동창회만 갔다 오면 꼭 와서 잔소리 퍼붓는다고. 지금은 내가 좀 잘 나가서 모를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차단할 수 있으면 미리 차단해야죠.’
-대체 장소는 어떻게 알고?
‘우리 권 여사, SNS하잖아요. 아주 동네방네 광고를 해놨던데.’
“엄마?”
“응? 성민이 네가 여긴 어떻게? 그리고 옆에 그 아가씨는 누구고?”
성민이 동창회의 주인공이 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 미용실에서 화장까지 끝낸 성민은 훤칠한 미남이었고, 희연이야 원래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성민의 어머니 권미영 여사의 입이 귀에 걸렸다.
희연 역시 오랜 기자 짬밥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분위기에 맞춰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둘이 뭐야? 사귀는 사이야?”
“어휴, 아니에요. 인터뷰 때문에 만난 거예요. 물론 우리 성민 선수가 훤칠하긴 하죠. 여자 기자들 가운데서도 성민 선수 좋아하는 애들이 하나둘이 아닌걸요.”
“우리?”
“아이 참,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스캔들은 나지 않도록, 인터뷰 때문에 만난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썸씽이 있을 수 있다는 뉘앙스를 슬쩍 풍겼다.
이제 본인들의 연애보다 자식들의 연애에 더 관심이 많은 60대를 코앞에 둔 아주머니들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우리 손녀 돌잔치 때 사진을 내가 안 보여줬네.”
“잠깐만 좀 있어 봐. 사진은 이따 보면 되지. 그래서 성민이가 그렇게 괜찮은 신랑감인가?”
“당연하죠. 성민 선수 이번 시즌만 지금처럼 잘 치러내면 백억도 어려운 일은 아닌걸요.”
“배, 백억?”
동창회 자리가 와장창 뒤집혔다.
그뿐이 아니다.
“그러면 맛있게들 드세요. 이 자리는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어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비 둬. 백억이라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제가 할게요.”
성민이 동창회 클리셰의 마지막인 계산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박 기자님. 뭐 하세요?”
“네?”
“법카.”
“여길요?”
“에이, 기껏해야 열두 분에 돼지고기잖아요. 우리 둘이 한우 먹는 것보단 적게 나왔을 거예요.”
비록 그것이 본인 카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오늘 고생했어요. 어쩌다 보니 하필 엄마를 만나서. 어쨌든 분위기 맞춰 줘서 고마워요.>
<어쩔 수 없죠. 대신 오늘 못한 저녁은 다음에 꼭 같이하셔야 해요.>
-성민아, 너 설마 이걸 이해 못 한 건 아니지? 이거 인터뷰 꼭 하자 그런 이야기 아닌 거 알지? 아니면 혹시 성 기능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냐?
“아, 진짜. 영감님. 저도 알 거 다 아는 나이거든요? 내가 다 알아서 잘 하거든요. 내가 얼마나 고수인데. 보세요. 선톡도 내가 했고 답톡도 엄청 잘 보내잖아요. 하여간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내 연애에 상관을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니까.”
필과 성민이 티격태격 하는 사이 그의 다음 등판이 성큼 다가왔다.
개막시리즈 이후 첫 홈 경기였다.
< 동창회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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