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잇몸이 너무 강함(1) >
왕조
그것은 스포츠의 팬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혹은 이가 갈리는 이름이다.
단 한 번의 우승을 넘어 시대를 지배하는 팀.
30개의 팀이 난립하는 MLB를 기준으로 할 때 왕조를 가진 적이 있다고 주장할만한 팀은 오직 셋. 저 악의 제국 양키스와 머니볼 이전의 오클랜드 애슬래틱스, 그리고 미스터 메츠가 이끌었던 뉴욕 메츠 단 셋뿐이다.
2032년을 기준으로 무려 160년.
그 기나긴 역사 속에서 오직 저 셋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10개 팀, 그리고 팀 간의 전력 불균형이 생각보다 심각한 KBO에는 5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왕조를 주장할만한 팀이 마찬가지로 세 팀이나 존재한다.
2010년대 통합 4연패 그리고 한국시리즈 5연패를 달성했던 대구 그리핀즈.
2015년부터 현재까지 17년의 시간동안 무려 8번의 우승을 차지한 서울 재규어스.
그리고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6년부터 1997년까지 11년 동안 무려 8번의 우승을 차지했던 광주 호크스.
오늘 성민이 공을 던지는 상대는 그중 하나인 광주 호크스였다.
과거 지역감정이 존재하던 8, 90년대에는 영호남 매치 라고 하여 제법 주목을 받았던 매치다.
물론 호크스의 왕조 건설과 함께 라이벌이라는 말은 쏙 들어가게 됐었지만.
하지만 2032년.
이제는 선거조차 지역감정이 거의 사라진 지금.
호크스와 마린스의 경기는 조금 다른 의미로 주목받고 있었다.
-오늘 예능 재밌는 거 뭐 하냐?-
-오늘 6시부터 마린스랑 호크스 경기 있다.-
-그건 예능이 아니라 발암이고.-
-난 엘리츠 팬이라서 마린스 호크스 경기 보면서 기분 전환하려고.-
-같은 시간에 엘리츠랑 재규어스 경기 있지 않음?-
-그러니까 마린스랑 호크스 경기 볼 꺼라고.-
-아, 시발. 왜 이해가 되지? 나도 엘리츠 팬인데 왜 마린스랑 호크스 경기가 보고 싶은거지?-
-야, 엘마호라고 묶지 마라 이제. 우리 마린스는 승률 5할 5푼이다.-
-나는 매년 봄마다 마린스 애들이 정신승리 하는 거 보면 눈물 난다. 어차피 여름 오면 엘마호 나란히 8, 9, 10위일 텐데.-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영광일뿐.
광주 호크스는 마린스, 엘리츠와 함께 조롱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였다.
엘마호의 단두대매치는 보통 가을야구진출을 두고 겨루기보다는 꼴찌를 놓고 겨루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덕아웃의 성민이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지금까지 총 4경기 28이닝을 소화하며 4승. 삼진만 무려 37개. 평균자책점은 0.64에 불과하다. 맙소사 0.64라니.
이건 프로야구 초창기 WAR을 기준으로 혼자서 팀에 15승을 더 가져다주며 KBO를 지배했던 어느 투수를 연상케하는 압도적인 활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벌써 선태양한테 가져다 대는 건 아니지.”
“벌써라니. 솔직히 실력만 따지면 선태양보다 성민이가 낫지. 시대가 다른데.”
“시대가 다르니까 가져다 대는 게 아니라는 거다. 멍청아. 루스랑 트라웃이랑 비교하면 실력으로는 당연히 트라웃이지. 근데 그렇다고 루스 기록을 폄훼하는 새끼 봤냐? 원래 다른 시대 선수들 비교할 때는 시대를 얼마나 지배했는지를 가지고 비교하는 거야. 절대적인 실력이니 뭐니 따지는 게 아니라.”
참 유치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본래 스포츠는 유치한 것이다.
위대한 선수들을 이야기 할 때 누가 더 좋은 선수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 종목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멍청이는 너고. 그거야 MLB 이야기잖아. 거긴 항상 최고들이 모인 리그였고. KBO는 이미 탄생할 때부터 NPB랑 MLB라는 당대 훨씬 대단한 리그가 존재했어. 선태양이 대단한 건 KBO를 넘어서 상위리그인 NPB에서도 최상급 마무리로 활약했기 때문이고. 그러니까 더 상위리그인 MLB에서 활약한 류가 선보다 대단한 거잖아.”
“미쳤네. 야, 선태양 때는 인프라가 문제라서 MLB로 못 간 거지. 실력만 따지면 백퍼 가능했거든?”
“네, 그래서 선태양 시대에 NPB에서 선태양보다 잘했던 사사키 가즈히로가 MLB가서 1년 던지고 좆됐죠.”
“그건 선태양이 사사키랑 같이 뛰던 시기에 이미 KBO에서 1650이닝이나 던지고 만으로 서른셋이나 돼서 간 거였으니까 그렇지.”
경기를 기다리던 팬들이 선태양의 이야기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다. 원래 KBO에 걸출한 투수가 등장하면 언제나 단골로 비교되는 것이 선태양이었으니까.
“뭐, 그래, 솔직히 MLB는 가봤자 사사키 미만이었겠지만 그래도 당시 환경에서 선수로 선태양 대단했던 건 인정.”
“야, 스톱. 그 뒷 말 하지 마라.”
“근데 감독 선태양 어쩔?”
“개새끼.”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선태양 논쟁의 끝은 감독 선태양인 법이다. 선태양을 옹호하던 팬이 조용히 침묵했다.
마운드에 광주 호크스의 선발 투수인 잭슨 스콧이 올라왔다. 작년까지 마이애미의 40인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28세의 비교적 젊은 투수다.
메이저 경력은 여섯 경기 5.1이닝 ERA 15.19.
최고 153km/h의 속구와 수준급의 체인지업. 그리고 AAA에서 나쁘지 않았던 성적을 믿고 데려온 투수였지만, 지금까지 KBO에서 거둔 성적은 4경기 22.1이닝 3.63.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100만 달러라는 가격을 생각한다면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마린스의 타자들이 1회부터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거기까지는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보통이라면 그냥 휘두르기만 했을 그 방망이에 잭슨 스콧이 던진 공들이 꾸준히 맞아 나갔다.
-딱!!!
그것은 절대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1회 초부터 마린스의 타자들이 원아웃에 만루를 만드는 광경이라니.
-와우, 마린스 빠따 놈들. 드디어 각성 한 거냐?-
-각성은 무슨. 제 놈들도 양심이 있으면 점수 내줄 때도 됐지. 성민이 4승 하는 동안 점수지원 꼴랑 14점임. 그나마도 첫 경기 7점이 절반이야. ㅅㅂ-
-야, 근데 이거 존나 좋은 순간인데 왜 일케 존나 불안하냐?-
-삐빅. 정상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보면 원래 사람은 불안하기 마련이죠.-
이어지는 5번 타자의 깊숙한 어퍼 스윙.
-딱!!
높게 떠오른 공이 중견수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희생 플라이.
전광판의 숫자가 1로 바뀌었다.
2아웃 주자 1, 2루.
이어지는 6번 타자가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또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러면 그렇지. 각성은 무슨. 원아웃 만루에서 1점? 투수 흔들리는게 뻔히 보이는데 저런 공들에 방망이를 붕붕 휘둘러? 아주 개새끼들 팀 배팅이라는 게 1도 없지. 매일 영웅스윙 이후 폭풍 삼진이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마린스 주제에 원아웃 만루에서 1점이라도 낸 게 어디냐. 난 마린스라면 노아웃 만루가 0점으로 끝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야.-
-그래, 오늘 선발 성민이잖아. 성민이라면 이 소중한 1점 지켜줄 거야.-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비록 한 달에 불과했지만, 성민은 좋은 기록이란 기록은 죄다 1위에 올라있는 투수였다.
성적이 만들어낸 아우라가 그를 위축시켰다.
초구.
크게 와인드업한 성민이 힘차게 공을 뿌렸다.
한가운데.
136km/h의 속구.
-부웅!!!
“스트라잌!!!”
[아, 김기철 선수. 헛스윙!! 지금 완전히 한가운데로 몰린 실투였던 것 같은데 이걸 놓쳐버립니다. 이건 너무 아쉬운데요?]
마운드의 성민이 모자를 고쳐썼다.
공을 던지는 순간 좌악 돋았던 소름이 조금 가라앉는다.
‘조금 셌죠?’
-그래. 조금 세게 밀었다. 아까 연습 때는 너무 약하게 밀더니.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네요. 감각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뭐 시즌 치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그래서 어쩔꺼냐?
‘어쩌기는 뭘 어째요.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던지는 거지. 어디 투수가 컨디션 좋은 날에만 공 던진답니까?’
아무리 좋은 투수, 사이영 위너급 투수라고 해도 일 년에 3, 4경기는 조지기 마련이다.
그 조지는 경기가 5, 6경기 수준이면 올스타급이 되는 것이고, 3, 4경기면 사이영 위너급. 1, 2경기면 역사에 남을 시즌이 되는 것이다.
필 니크로가 말했다.
-그래, 라이브볼 시대 가장 낮은 ERA를 기록했던 1960년의 밥 깁슨도 두 경기는 완전히 조졌다. 선발 투수라면 원래 몇 경기 조지는 게 당연해.
필 니크로의 이야기에 성민이 불퉁하게 답했다.
‘누구 마음대로 경기를 조집니까?’
-응?
‘이제 고작 실투 하나 정중앙에 똥볼로 던졌고 컨디션 좀 나쁜 것뿐인데 제가 경기를 조지긴 왜 조집니까.’
하지만 성민의 생각은 필 니크로와 조금 달랐다.
‘저한테 지금 당장 MLB에 가도 선발로 뛸 수준이라고 하셨죠.’
-그래, 내가 보기엔 스카우트들 기준으로 따지자면 솔리드 스타터와 굿 플레이어의 중간 즈음 될 거다.
‘뭐,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 메이저급 선발이란 말이에요.’
-그래.
‘근데 쟤들은 KBO. 그것도 재규어스나 돌핀스, 브레이브스도 아닌 그냥 호크스거든요.’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KBO의 수준은 더블 A정도.
소수의 AAA급 선수와 다수의 AA 그리고 A급 선수. 일부의 루키급 선수들이 공존하는 리그다.
아무리 좋은 투수, 설사 사이영 위너급 투수라고 해도 긴 시즌을 치르다 보면 3, 4경기는 조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컨디션이 언제나 최상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리그의 수준이 같을 때 이야기다.
1986년.
명백하게 리그의 수준을 벗어났던 어떤 남자는 39경기 22선발 262.2이닝을 뛰는 동안 38실점. 고작 29점의 자책점을 기록한다.
메이저급의 선수가 더블A.
그것도 선수의 절반이 싱글A급에 AAA급 선수라고는 하나밖에 안 되는 팀을 상대했다.
컨디션?
-부웅!!!
“스트라잌!!!”
148km/h의 꽉찬 속구가 존의 안쪽을 공략했다.
이것은 MLB였다면 평균 미만의 속구다.
만약 AAA였다면 평균 수준의 속구다.
하지만 KBO에서 148km/h의 제구되는 속구는 평균보다 8km/h나 빠르고 강력한 리그 최고 수준의 공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스트라잌!! 헛스윙 삼진입니다. 살짝 높은 공에 방망이가 헛돌았네요.]
[최근 너클볼에만 주목을 받고 있는 느낌이긴 합니다만, 사실 전 김성민 선수의 저 속구 역시 최근의 성적을 만들어주는 1등 공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민 선수 이번 시즌 최고 구속이 151. 평균 구속이 146km/h에요. 지금까지 평속만 따졌을 때 토종 선발 가운데서는 으뜸입니다.]
이어 타석에 올라온 호크스의 2번 타자가 성민의 공을 두들겼다.
하지만 너무 높았다.
-딱!!
[높게 뜬 타구. 우익수 김호섭의 글러브로!!!]
“아웃!!”
비록 최악의 수비를 자랑하는 마린스의 외야였지만 그래도 프로다. 고작 이 정도 수준의 수비를 매번 실패하지는 않았다.
-저 녀석이 왠 일로 일을 다 하는군.
‘아무리 호섭 선배라도 저걸 놓치면 그건 태업이죠.’
-근데 종종 놓치잖아.
‘평소엔 종종 태업을 하는 선배잖아요. 다행히 어제는 보족 먹을 때 술을 덜 마시더라고요.’
분명 성민의 오늘 컨디션은 이번 시즌을 통틀어 최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면 된다.
그리고 호크스에겐 유감스럽게도, 성민의 잇몸은 그들에게 너무 강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1회 말. 성민이 호크스를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 잇몸이 너무 강함(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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