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란 게 원래 그래(3) >
WAR(Wins Above Replacement)
해석하자면 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라는 뜻이다. 어려워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직관적인 스탯이다.
이것은 시즌을 치르는 동안, 대체선수(최저연봉으로 쉽게 데려올 수 있는 수준의 선수)에 비해 팀에 얼마나 많은 승리를 가져왔냐는 것을 의미한다.
즉 WAR이 3인 선수는 대체 선수에 비해 팀에 3승을 더 안겨준 선수다.
일반적으로 MLB의 경우 대체선수로만 팀을 이뤘을 때 기대승률은 약 3할이라고 계산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기본적으로 선수의 풀이 너무 좁다. 1군과 2군의 실력 차는 매우 크고, 실제로 1군 로스터에 등록 가능한 타자 13인이 600타석을 섰다고 가정할 때 평균 WAR은 3.2가 넘어간다.
메이저를 기준으로는 주전 선수들 가운데서도 아주 일부만이 가능한 수치가 KBO에서는 리그의 평균인 셈이다.
따라서 이것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수식을 사용했을 때 나오는 한국의 대체선수 기대 승수는 고작 22승. 기대승률 1할 5푼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 니크로가 직접 목격한 마린스의 활약은 놀라웠다.
팀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여전히 엉망이다. 하지만 4월이 거의 다 지나가는 지금까지 마린스는 27경기에서 무려 15승을 기록하며 5할 5푼 5리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인상적이야.
“뭐가요?”
-국민청원.
“왜요? 미국도 이거 비슷한 거 있지 않아요?”
-있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없었거든.
[공필승 감독의 무분별한 박동엽 사랑을 멈춰주세요.
존경하는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부산에 사는 초등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부산 마린스의 감독이신 공필승 감독님의 무분별한 박동엽 기용을 막아주십사 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마린스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매년 가을 야구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마린스가 준플옵 진출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을 때 저는 난생처음으로 ‘이것이 인생의 낙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기대가 컸던 올 시즌, 전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고 있습니다,
자세한 이유는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야구를 보시던 부모님은 9회 말 박동엽의 어이없는 영웅스윙에 술을 먹으러 가셨고 멍청한 형은 오늘 원정 경기인 줄도 모르고 박동엽 얼굴에 계란 던지겠다고 사직 구장으로 뛰어갔습니다.
저는 혼자 집에 남아 이렇게 청원을 올리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숙제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청원인 수 8888/200000]
그것은 어제 경기에서 박동엽이 4타수 4삼진을 당한 직후 올라온 국민청원이었다.
물론 아무도 이 청원문을 쓴 사람이 초등학생이라고 믿진 않았다. 심지어 오리지널도 아니다. 이건 그냥 과거 21세기 초반 마린스가 8888577의 비밀번호를 찍던 당시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청원문의 패러디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이 글을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청원 글을 올린 사람도 거기에 동의한 사람도 모두 터지는 속을 풀기 위한 일종의 화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화풀이가 매우 진지한 현실이 되고 있었다.
“2할 1푼이라. 박동엽 선수, 계속 기용하실 생각입니까?”
마린스의 사장 김호산이 공필승 감독에게 물었다.
“사장님. 물론 동엽이가 삼진이 물론 많긴 합니다만, 그만큼 장타도 많습니다. 타율은 2할 1푼이지만 장타율이 무려 0.401입니다. 팀 타선에 충분히 도움이 되는 선수예요.”
“에러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시즌 초반에 조금 에러를 많이 범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요즘은 그럭저럭 적응해나가고 있습니다.”
김호산이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사실 그는 야구를 잘 아는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마린스에 사장으로 있는 이유도 모기업에서 은퇴 직전 마지막 1년 꿀을 빨라고 보내줬기 때문이다.
“공 감독님. 제가 공 감독님 좋아하는 거 잘 아시죠?”
보통 마린스의 사장은 딱 1년만 꿀을 빨고 퇴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작년 무려 13년 만에 가을야구를 했던 덕분에 모그룹에서 관례를 깨고 호산의 임기를 1년 유임했다. 그로서는 꿀을 1년 더 빨게 해준 공필승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일은 일이에요. 아시다시피 그룹에서 이 적자만 나는 구단을 운영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환원 차원의 봉사. 그리고 그룹 이미지 때문이에요. 물론 성적도 중요하죠. 하지만 박동엽 선수 성적이 저런 것들을 다 감수하고 기용할만한 성적인가요?”
공필승이 잠시 머뭇거렸다.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김호산은 사람으로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야구단의 사장으로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야구를 잘 모른다.
어느 정도 야구를 아는 사람조차도 타율이 사실은 점수와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어려운데, 하물며 투승타타를 믿는 노인에게 이것을 이해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참을 망설이던 공필승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그런데 공 감독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렇게 사람 좋게 허허거리기만 하는 거야? 지 밑에 수석코치랑 코치들이 단체로 그렇게 건방지게 구는데 말이야.
“그야 야구 원데이 투데이 할 거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바닥 좁다고요. 공 감독님도 우리 팀 감독 그만둔다고 은퇴할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여기 잘 봉합해서 가을야구 정도 해주면 아마 성적 나쁜 다른 팀에서 모셔갈걸요? 지금 확률로 봐서는 대전 피닉스 아니면 서울 엘리츠?”
-아, 그 팀들?
분명 마린스의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엉망이다.
팀은 두 개로 나뉘었고 구단 최상위층은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차지했다. 게다가 그들은 팀의 승리보다 모그룹의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린스는 5할 5푼이 넘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본래 지각 아래는 멘틀이 존재하고 빌딩 1층 밑에는 지하주차장이 존재하는 법이다.
정상적인 팀과 막장이 싸우면 보통은 정상적인 팀이 이긴다.
그렇다면 막장과 막장이 싸운다면 어떨까?
마린스의 상황은 막장이었지만 KBO에는 그에 못지않은 구단들이 몇 개 더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장 메이저에서 뛰어도 선발 한 자리는 너끈할 선발 투수도, 성격 더럽고 워크에식도 부족하지만, 최고 159짜리 공을 던지는 외국인 용병도 없다.
어느 팀을 상대로 내놓는다고 해도 자기 몫은 확실한 원투펀치. 그리고 이닝은 확실하게 챙겨 먹어주는 3선발. KBO에서는 그 세 가지만으로도 5할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공 감독님이 현역 커리어가 좀 후지긴 해도 지도자로는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저게? 구단을 전혀 휘어잡지를 못하는데?
“휘어잡으려다가는 팽당할 걸 뻔히 아니까 저러는 거죠. 영리한 분이에요. 괜히 이 바닥에서 저런 커리어로 감독까지 올라온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내가 보기엔 대가 너무 약해.
“에이, 또 마냥 그렇지만도 않아요. 내줘도 좋은 건 그냥 허허 웃으면서 다 내주는데 그런 와중에 가장 중요한 건 또 꼬박꼬박 챙기시거든요.”
-그래서 지금 그 가장 중요한 게 뭔데?-
“그야 당연히.”
***
“사장님. 지금까지 마린스 사장 자리 가장 오래 연임하셨던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마린스 사장 자리요? 글쎄요. 아무래도 여긴 그룹에서도 밀려난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명예직 같은 자리인지라. 내가 이렇게 2년간 사장 자리를 지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확실히 2010년대 이후로 마린스의 사장 자리는 그런 식이었죠. 뭐 그 이전에도 길어야 3년 짧으면 2년이긴 했지만요. 하지만 4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40년 전이면 1990년대요? 그건 너무 옜날 이야기 아닌가요? 제가 입사하기도 이전 이야기로군요.”
“그 시대에는 사장 자리에 앉으면 4년, 5년씩 하는 게 당연했었죠. 왜 90년대 이전에는 사장님들의 임기가 길었는지, 대체 90년대 이후로 달라진 게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그 시대에는 낙하산으로 내려보낼 사람이 조금 적었나보죠.”
공필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낙하산이라뇨. 아닙니다. 그냥 심플하게 성적입니다. 마린스의 사장님들이 1년에서 2년 사이로 갈려나가기 시작한 건 정확하게 마린스의 성적이 8888577을 찍은 이후부터입니다.”
“성적이라고요?”
“네, 아까 사장님이 말씀하셨죠. 구단에서 굳이 적자를 보면서도 마린스를 운영하는 건 그룹 이미지 때문이라고요. 맞습니다. 문제가 되는 선수를 굳이 내보내는 건 이미지에 좋지 않죠. 특히 성적도 좋지 않은 팀이 말이죠.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공부를 못하면 품행이라도 방정해야지. 하지만 그 말의 뜻은 품행 방정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공부 좀 잘해달라는 이야기죠.”
“그건 그렇지만.”
김호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이 뉴욕 양키스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건 그 선수들이 수염을 단정하게 빡빡 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항상 1등을 노리기 때문이죠. 거기 별명이 뭡니까. 악의 제국입니다 악의 제국.”
“그거야 아무래도 미국 사람들 마인드는 우리랑 조금 다르니까.”
“재규어스를 보십쇼. 솔직히 거기 모그룹 엉망진창인거 누구나 다 알지 않습니까. 게다가 거기도 선수들 개개인 보면 경기 내적으로 외적으로 구설수오르는 애들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걔들은 모그룹 이미지를 좋은 이미지로 희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공필승이 호언장담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제가 우승 한 번 해보겠습니다. 도와주십쇼.”
“우승이요?”
“네, 본래는 그냥 가을야구 정도가 목표였는데, 지금 상황이면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단언에 김호산이 혀를 찼다.
“제가 야구는 잘 모르지만, 사내정치는 조금 압니다. 듣기로는 선수단과 코치진도 지금 문제가 좀 있다고 들었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고작 제가 윗선의 지시 좀 커버쳐주는걸로요?”
“세상에 아무 문제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 돌아가는 조직이 어딨겠습니까. 다 그렇게 적당히 균형 맞춰가면서 굴러가는 거죠.”
“그게 과연 균형이 맞을까요?”
“물론 완벽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두발자전거를 굴리는 건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 속도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자전거를 굴리는 건 속도죠. 그렇다면 대체 마린스는 어떻게 우승까지 굴리겠단 말인가요?”
“그야 당연히.”
***
“승리죠.”
5월.
성민의 다섯번째 경기가 돌아왔다.
< 야구란 게 원래 그래(3)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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