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란 게 원래 그래(2) >
“인마 원래 에러라는 게 그래. 이게 참 기록원 마음대로야. 수비 범위가 쥐뿔인 유격수는 공 근처도 못가서 그냥 안타고, 수비 범위가 좋은 애들은 괜히 근처까지 달려가서 에러 되고 그러는 거라고.”
“수비 범위요?”
예상치 못한 성민의 격려에 동엽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물론 이어지는 성민의 말에 다시 울상이 되긴 했지만.
“물론 그렇다고 네 수비 범위가 좋다는 말은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넌 수비 범위도 평범에 가깝지. 게다가 실수 없이 수비 되는 범위만 따지면 쥐뿔에 더 가깝고.”
“죄송합니다.”
“아니, 못하는 거로 죄송할 필요는 없다니까. 애초에 야구라는 게 그래요. 다 타고 나는 게 달라. 누군 150을 던지게 태어나고, 누군 140밖에 못 던지게 태어난다고. 그런데 150 던진다고 다 성공하고 140 던진다고 다 실패하냐? 그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중요한 건 내가 뭘 할 수 있어서 1군에서 뛰고 있는가야. 140짜리 공을 꾸역꾸역 보더라인에 잘 집어넣는 볼넷 많이 주는 투수 놈이 자기도 150 던지는 놈처럼 삼진 잡겠다고 뻥뻥 던지면 어떻게 되겠어.”
“점수를 주겠죠?”
동엽의 대답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인마. 점수 왕창 주고 2군 가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넌 네가 대체 왜 1군에 있다고 생각하냐?”
“호창 선배가 블레이즈로 가서?”
“멍청아. 그건 유격수 자리가 난 이유고. 내 말은 팀에 많은 유격수 후보 중에서 하필 네가 왜 1군에 올라와서 이러고 있냐 이 말이야.”
“글쎄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끔뻑끔뻑 바라보는 동엽을 향해 성민이 애정을 가득 담아 갈궜다.
“우리 같이 생각해보자. 네가 수비 레인지가 넓은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기본기가 좋아서 잔실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깨야 그럭저럭 쓸만하다지만 매일 당황해서 송구미스나 해댄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아니, 못 하는 거로 죄송할 건 없다니까. 네가 못 하고 싶어서 못 하는 것도 아니고.”
“······.”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감독님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 너를 1군에 쓰시는 거라는 거야.”
“쓰는 이유요? 그게 뭘까요?”
“인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를 네가 더 잘 알지. 내가 더 잘 알겠냐? 그냥 확실한 건 앞에 말한 그런 이유들은 아니란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할건 없다니까 그러네. 아, 혹시 너희 아버지가 구단 고위관계자시니. 만약 그렇다면 너의 거듭되는 에러에도 형이 실망하지 않고 너를 격려했다는 말 꼭 전해드리고.”
“그건 아닙니다!!”
“그래, 당연히 아니겠지. 그러니까 감독님도 네게 뭔가 장점이 있어서 쓰는 건 확실하단 소리야. 알겠어?”
말을 끝낸 성민이 동엽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권혁준 넌 새끼야. 형 공을 평소에 그렇게 받아놓고 그걸 놓쳐? 넌 오늘부터 경기 끝나고 특타니 뭐니 뻘짓 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다가 형이 부르면 나와서 공 받는 연습이나 해. 알겠어?”
“네, 넵!! 알겠습니다.”
말을 끝낸 성민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오늘 선발로 뛰고 쟤 연습을 시켜준다고?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너클볼이 힘이 덜 들기는 해도 오늘 선발로 던지고 공을 또 어떻게 던져요.’
-네가 네 입으로 연습시킨다고 대기하라며?
‘아, 진짜. 영감님. 척하면 척 아닙니까. 쟤 또 오늘 선풍기질 할 꺼 뻔한데, 그러고 나면 특타니 뭐니 끌려가서 쓸데없이 체력만 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냥 가서 좀 쉬라는 겁니다.’
-그걸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 하는 거야?
‘어휴, 쟤랑 저랑 라인이 다르잖아요. 지금 실책에 제가 빡친 척하면서 지랄하니까 별말 안 하는 거지, 평소에는 힘들어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줄타기는 그의 전공이 아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어본다고, 이건 그냥 성민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
-그건 그렇고, 저기 저 동엽이라는 녀석 말인데 너 다른 타자한테 그렇게 막 상관해도 되냐?
‘됩니다.’
-너무 단호한 거 아니야?
‘이게 어뭬뤼칸 스타일이 아닌 건 저도 아는데, 원래 한국에서는 선배가 후배한테 잔소리도 좀 하고 그럽니다. 거기다가 지금 대외적으로 전 연속된 에러로 빡친 상태라고요.’
-그건 알겠는데, 그러다 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 그걸 걱정하신 거구나.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거 제 이야기가 아니라 형진 선배가 해줬던 이야기에요.’
-형진이면 그때 그 전성기 때 NPB에서 뛰었다던 코치?
‘네, 쟤는 자기가 잘하는 게 있는데 항상 지가 못하는 것만 고민한다고요.’
-그래서 쟤가 잘하는 게 뭔데?
‘그게 그러니까, 어? 뭐지? 벌써 내 차례야?’
뭔가 한바탕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잔뜩 긴장하던 덕아웃 분위기는 피식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뒤숭숭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마린스 덕아웃의 분위기는 여전히 엉망이었고 그것은 곧 타격으로 이어졌다.
뜬 공, 삼진, 그리고 일루수 파울플라이 아웃.
성민의 차례가 곧바로 돌아왔다.
[2회 말, 무자책 1실점 3삼진을 기록했던 김성민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보통 투수라면 흔들릴만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표정은 나쁘지 않군요.]
[사실 흔들릴 투수였다면 앞선 이닝에서 삼진 두 개를 잡고 내려가지 못했겠죠. 저건 자기 공에 자신이 있다. 이거거든요.]
[뭐, 이전에도 배짱 하나는 두둑하던 선수였어요. 국제전에서도 항상 괜찮았었고요. 부상만 아니라면 제 몫을 톡톡히 해줄 선수입니다.]
분위기, 혹은 기세.
이게 참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게임을 하다보면 분명 그런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앞서 있었던 터무니 없는 실점. 그리고 선수들의 표정.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은 오늘의 흐름이 재규어스에게 넘어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느끼는 것은 경기를 중계하는 중계진, 그리고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위기 묘한데요?’
-경기를 뛰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영감님도 이런 적 있어요?’
-내가 메이저에서 뛴 경기가 864경기 그 중 선발로 뛴 경기만 해도 716경기다.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어땠는데요?’
-보통은 조졌지. 본래 이런 날은 답이 없어요. 어디 야구가 투수 혼자 하는 게임이냐? 점수는 안 터지지, 공은 줄줄 새지, 그냥 내 속만 터져 나가는 거야.
‘그래서 포기해요?’
필 니크로의 엄살에 성민이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는 필 니크로 역시 웃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다.
-가끔 그런 날이 있어. 다 터지는데 내 멘탈만 이상하게 안 터지는 그런 날.
‘있죠. 그런 날.’
-거기다가 하필 그런 날은 컨디션까지 좋아요.
‘좋죠. 어깨가 아주 가뿐해요. 손톱도 짱짱하고.’
-그러면 보통 다음 날 조간신문이 내 사진으로 도배되더라고.
‘요즘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라오죠.’
-그러면 더 좋네. 원래 반응은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게 최고니까.
야구는 절대 투수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다. KBO 역사상 가장 많은 한 경기 탈삼진을 기록한 류현진 역시 17개의 삼진을 잡는 데 그쳤다. 그 말은 나머지 10개의 아웃 카운트는 야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바꿔말하자면 투수 혼자서 경기의 6할 2푼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다.
지금 당장 빅리그에 선발 한 자리는 너끈할 투수가 승리를 거부하는 팀의 멱살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존을 빠져나가는 너클볼이 헛스윙을 유도했다.
-괜찮아? 안 불안해?
‘뭐가요? 아, 혁준이 공 놓쳤던 거요? 에이, 저 새끼도 사람 새끼인데 이전 이닝에서 한 번 놓쳤으면 이젠 받아야죠. 그리고 못 받는다고 안 던질 수도 없잖아요. 게다가 못 받아 봤자 어차피 주자 없는 상황인데 하나 출루하는 거지 뭐.’
-진짜 아무리 봐도 넌 간덩어리 하나는 사이 영 위너야.
‘에이, 간덩어리 하나만 그런 건 아니죠.’
-뻐엉!!
“스트라잌!!”
[초구 몸쪽 149의 빠른 공 스트라이크!! 김성민 선수. 공이 굉장히 좋습니다.]
‘솔직히 공도 이 정도면 사이 영 위너급 아닙니까?’
-자신감 넘치는 건 좋은데, 주제 파악은 해야지. 기껏해야 4선발에서 5선발 언저리 수준이야.
‘좀 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너클볼 6개월 차에 그 정도 수준이면 무서운 발전이네요.’
-이런 긍정적인 놈 같으니.
‘자 그러면 시원하게 삼진 하나 더 가보죠.’
두 번째.
118km/h짜리 존을 공략하는 너클볼.
-딱!!!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하지만 내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야뜬공아웃.
공을 잡아낸 동엽이 성민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새끼 웃기는.’
-삼진 잡겠다며?
‘최신 야구 이론에 따르자면 내야뜬공아웃은 삼진에 준하게 취급합니다.’
-말이나 못 하면.
성민이 동엽을 향해 마주 웃었다.
물론 고작 그 정도로 마린스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해소되는 기적은 없었다. 본래 기적이란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2회, 3회, 4회. 그리고 5회.
성민의 호투가 이어졌다.
5이닝 동안 삼진만 무려 10개에 피안타는 단 하나뿐.
범타 처리된 공들 역시 단 하나도 내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김성민 오늘 미쳤네.-
-시발, 니들이 에러 한다고? 그러면 에러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
-이 와중에 박동엽 저 샹노무새끼 깨알같이 공 흘린 거 실화?
-에이, 저건 에러라고 하긴 그렇지 기록도 안타로 기록됐잖아.
-그래도 저 자리에 백호창 있었으면 솔직히 잡았다.
-그건 인정.
-블레이즈님들. 주셨던 보상금 다 돌려드리고 [email protected]로 박동엽도 드릴테니 백호창 돌려주시면 안될까요?
-응 안돼. 돌아가.
그리하여 6회 초.
마린스의 공격이 돌아왔다.
-아, 선생님들 성민이가 승리 떠먹여 준다잖아요. 제발 2점만.
-빠따놈들 인간적으로 양심이 있으면 이제 점수 낼 때도 되지 않았냐?
-삐빅!! 마린스 빠따들은 양심 없다는 건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선두 타자의 스윙 삼진.
그리고 대기 타석에 있던 박동엽이 타석에 들어섰다.
시즌 6경기 출장 24타석 24타수 4안타.
오늘 경기 2타수 무안타 2삼진.
필 니크로가 물었다.
-그런데 성민아 저 동엽이라는 녀석은 수비 범위 좁고, 포구랑 송구가 다 안 되고, 공격까지 저 모양인데 대체 장점이 있긴 한 거냐?
‘있죠. 그것도 엄청난 장점이.’
-그러니까 그 장점이 대체 뭔데?
-부웅!!
“스트라잌!!!”
[아, 박동엽 초구 떨어지는 공에 헛스윙 스트라이크!!]
박동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런다고 복잡한 마음이 정리될 리는 만무했다.
-부웅!!!
시원한 헛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볼카운트 0-2
재규어스의 배터리가 공을 하나 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세 번째.
존 밖으로 손가락 두 마디쯤 빠지는 빠른 공.
필 니크로의 질문에 성민이 답했다.
‘저거요.’
-저거?
박동엽이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복잡한 마음과 고민을 가득 담아. 하지만 연습해온 그대로 전력을 다해서.
-딱!!!
[박동엽 쳤습니다!! 좌중간 높게 뜬 타구!!]
[잘 맞은 타구. 중견수 달립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잠실 야구장.
하얀 야구공이 광활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120미터의 좌중간을 멋지게 갈랐다.
[넘어갔습니다!! 박동엽!! 6회 초 박동엽의 솔로 홈런!! 박동엽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뭐, 잘 못 맞추는 게 문제기는 한데, 힘 하나는 진짜 죽여주거든요.’
[방금은 완벽하게 빠진 공이었거든요. 그런데 박동엽 선수. 그런 공을 그대로 잡아당겨서 담장을 넘겼습니다. 정말 무서운 괴력이에요.]
6회 초.
마린스의 유격수가 자기가 싼 똥을 자기가 치웠다.
‘뭐, 우리 팀으로는 절대 흔치 않은 일이죠. 자기가 싼 걸 직접 치우는 일은요.’
1:1
성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내일 자 조간신문, 아니 인터넷 뉴스를 자신의 얼굴로 도배할 시간이었다.
[김성민 9이닝 1실점 완투승!!!]
[어메이징!! 어메이징!! 김성민. 9이닝 14삼진 3피안타 1실점 0자책!!]
[‘마린스의 승리는 내가 책임진다.’ 김성민 시즌 2승 수확!!]
[토종 선발의 자존심 김성민. 마린스의 승리를 견인하다.]
[6회 말,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박동엽의 속죄포.]
[마린스의 원정 2차전. 사실상 김성민의 원맨쇼!?]
[킹성민이 돌아왔다. 나고야를 평정했던 왕의 귀환!!!]
-시부럴. 투수가 9이닝 1실점 무자책을 해야 간신히 2:1로 이기네.-
< 야구란 게 원래 그래(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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