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1화 (22/287)

< 희망과 절망 >

“저거 사긴데요?”

덕아웃으로 돌아온 이진영이 성민의 공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다. 실제로 타석에서 관찰한 성민의 공은 영상으로 본 것과는 또 달랐다.

영상으로 볼 때는 분명 공이 좀 현란하긴 하지만 충분히 칠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딱!!!

[내야 느린 타구!! 이루수 잡아서 일루에!! 일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1회 초, 삼진 두 개, 그리고 내야 땅볼 하나. 김성민 투수가 돌핀스의 타선을 완벽하게 꽁꽁 묶어둡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지금 1회 최고 구속이 119였나요?]

[네, 사실 이게 현장에서 공의 궤적이 잘 안 보이는 분들은 대체 120도 안 되는 공에 왜 저렇게 방망이를 붕붕 돌리나 의문이 생기실 겁니다.]

[전 지금 카메라로 보고 있는데도 의문이 생기는데요?]

[그러니까, 저 공은 너클볼이라는 변화구의 일종입니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공이기는 한데, 사실 정확히 알고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현대 야구에서는 KBO 뿐만 아니라 NPB, MLB에서도 제대로 구사하는 선수가 없는 상황이고요.]

해설위원이 너클볼을 설명했다.

[120키로짜리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 포수의 미트에까지 들어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약 0.475초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사실 프로에게는 제법 긴 시간이에요. 뱃 스피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스윙이 한 0.2초 정도 걸리니까 0.275초나 공을 지켜볼 수 있단 말이거든요.]

[으음, 길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그래서요?]

[저 0.275초 동안 선수들은 공의 궤적을 예측을 해요. 뭐 속구면 이대로 들어오겠다. 슬라이더면 어떻게 들어가겠다. 그런 걸 말이죠. 그리고 나머지 0.2초 휘두르는 동안 배트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절하고요. 그런데.]

[그런데?]

“공이 존 근처까지 와서도 자기 맘대로 움직여요.”

“그건 브리핑에서 이미 이야기 했던 부분이잖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공이 이쪽으로 올 것 같아서 배트가 나가는데 저기로 휙 꺾일 것 같아서 그걸 컨트롤 하려고 하면 본래 오려던 곳으로 날아온다니까요.”

0.3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공이 날아올 방향을 파악하고, 0.2초의 스윙 중에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연습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반사신경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공이 이렇게 날아오면 이런 방향으로 올 것이라는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험은 패턴이 되고 패턴은 습관을 낳는다.

오늘 돌핀스의 타자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쌓아 올린 그 습관에게 매우 쓴 맛을 보고 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김성민!! 대단합니다. 2이닝 연속 삼자범퇴. 삼진만 벌써 세 개째를 기록 중입니다.]

과거의 프로야구 팬들은 직관을 하면서 동시에 라디오를 틀었다. 현장의 열기는 현장의 열기대로. 중계는 중계대로 듣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것은 현대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중계자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현장의 중계를 리플레이까지 할 수 있는 스마트폰으로 발전했다는 차이뿐이다.

“야, 야. 이거 봐봐. 이게 보니까 김성민이 공이 그냥 똥볼이 아니네.”

“뭐가 어떤데?”

“봐봐. 공이 막 움찔움찔거리잖아.”

“에이, 꼴랑 요만큼씩 찔끔찔끔 움직이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공이 막 휙휙 꺾이는 것도 아니고.”

“해설자 설명에 따르면 이게 막 자기 맘대로 랜덤하게 흔들리는 공이라 어려운 거라는데?”

“그러니까 김성민이가 지금 하는 게 그냥 운빨이 아니라고?”

3회 초.

돌핀스의 7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혁준아 우리 살살 좀 하자. 형이 이제 나이가 있어서 막 저런 울렁거리는 공 보면 멀미나고 그래요.”

타자의 너스레에 혁준이 침묵했다.

어지간한 타자들을 상대로는 입담에서만큼은 절대 밀리지 않는 혁준이었지만 그에게만큼은 함부로 까불 수 없었다.

송태수

돌핀스의 1호 영구결번 예정자. 프로야구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

올해 한국 나이로 40세. 전성기 MLB에서 7년을 뛰었던 덕분에 누적스탯은 조금 부족했지만, 역대 KBO 최고의 타자를 꼽으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꼽히는 남자다.

성민이 모자를 고쳐 썼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선 제일 좋은 표정이구나. 어려운 타자냐?

‘메이저에서 7년 동안 2할 7푼에 홈런 107개 때린 형님이에요. 대단한 타자죠. 국대 시절 같이 밥도 먹었는데 진짜 대단했었어요.’

-기록은 기록일 뿐이지. 지금은?

‘재작년 복귀 1년 차엔 3할 1푼에 홈런 23개. 그리고 작년엔 2할 7푼에 홈런 11개.’

에이징커브 증세가 뚜렷하다.

분명 지금 타석에 선 송태수는 전성기 메이저에서 2할 8푼에 홈런만 29개를 깠던 그 타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재작년에 때린 홈런 23개 중에서 세 개가 나한테 때린 홈런이에요.’

-껄끄러운 선수다. 이 말이로군.

‘뭐 껄끄러운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갚아줄 게 많은 형님이다. 그런 이야기죠.’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춤추는 공이 날아왔다.

앞선 돌핀스의 타자들은 자신이 쌓아 올렸던 패턴에게 쓴 맛을 맛봤다. 그리고 패턴은 쌓아올린 기간이 길면 길수록 공고해지기 마련이다.

과거 천재였던, 이제는 세월의 흐름 속에 스러져가는 타자가 그의 공을 노려봤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솔개는 70년을 살 수 있다. 하지만 40년을 산 솔개는 늙어 부리와 발톱이 굽고 낡고 무거운 깃털에 갇힌다. 대부분 솔개는 그렇게 40년째에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솔개는 다시 날기 위해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깨고, 새로운 부리로 발톱을 뽑고, 새로운 발톱으로 깃털을 모조리 뽑아버린다.

그리하여 오직 그렇게 고통을 감내한 솔개만이 남은 30년의 생을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송태수의 지난 겨울은 혹독했다.

메이저리그를 뛰놀던 위대한 타자가 KBO에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패턴들을 버리고 새로운 패턴을 몸에 새겼다. 그것은 늙은 솔개의 그것에 비길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과거 천재였던, 이제는 KBO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범상한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그리고 휙하고 아래로.

전성기의 송태수였다면 아마 0.05초는 더 공을 지켜봤을 것이다. 그의 배트 스피드는 최고였으니까.

하지만 전성기를 지난 송태수는 그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헬멧을 고쳐 쓰고 방망이로 발끝을 두 번 통통 두들긴다. 오른손의 장갑을 꾹 누르고 다시 타석에 섰다. 지난 12년 전, 시리즈 144차전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며 팀을 가을야구로 이끌었을 당시 생겼던 루틴이었다.

헛스윙 스트라이크 이후 이 루틴을 실행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마운드의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송태수가 전성기의 자신이었다면 충분히 쳐낼 수 있는 공이었다고 생각했다.

아쉽다. 하지만 어디 나이가 들어 아쉬운 것이 이것뿐이던가. 한 트럭은 될 것 같은 아쉬움에 한 가지 더 올라왔을 뿐이다.

또다시 공이 춤췄다.

경험은 보통 패턴을 만들고 패턴은 보통 습관이 된다.

습관에 갇히지 않은 경험 그득한 타자의 방망이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부웅!!!

“스트라잌!!!”

물론 습관의 벽에 갇히지 않았다고 해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을 딱딱 때려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접했다.

‘하나만 더.’

타석에서 물러나 자신의 루틴을 수행한 타자가 눈을 빛냈다. 쳐낼 수 있다.

마운드의 투수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투수 와인드업]

오직 부리를 깨고 발톱과 깃털을 뽑은 솔개만이 다시 날아오른다.

지난 겨울 흘렸던 수많은 땀방울이 송태수의 눈 앞을 스쳤다.

지금이야말로 늙은 솔개가 다시 날아오를 시간이다.

흔들리는 공을 노리는 송태수의 방망이가, 방망이가!!

-뻐엉!!

‘어?’

“스트라잌!!!!”

반쯤 돌아간 송태수의 방망이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149.

야구는 안타를 많이 치는 팀이 이기는 게임도, 더 빠른 공을 던지는 팀이 이기는 게임도 아니다.

야구를 보는 관중들 역시 그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야구장을 찾은 팬들은 시원한 안타와 불꽃 같은 강속구에 환호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들려온 포구음 중 가장 시원한 그 소리에 사직 구장을 찾은 팬들이 크게 환호했다.

“와, 미쳤네. 149?”

“뭐야, 저런 공도 멀쩡히 던질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120도 안 되는 공들만 던진 거야?”

“그러게.”

[와, 김성민 선수 지금 구속이 149가 찍혔습니다.]

[오늘 경기 처음으로 던지는 속구입니다. 2이닝이나 너클볼만 던져서 모두들 김성민 선수가 150대의 공을 던지는 파이어볼러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요.]

-너 노린 거지.

‘뭐 겸사겸사요. 만약 앞에서 위험했으면 던졌을 건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고, 갚아줄 것도 많은 형님이었고. 게다가 솔직히 저 팀에서 변화구 제일 잘 치고 속구에 제일 약할 사람이 저 형님이잖아요.’

‘하긴 나이 먹은 타자에게 제일 유효한 무기는 속구지.’

그런 이야기가 있다. 솔개가 70년을 살 수 있다고 떠드는 그런 허황된 이야기.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굽어버린 솔개의 부리와 발톱은 절대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늙은 타자가 타석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눈은 죽지 않았다.

“속구 볼 끝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뻗어온다. 조심해라. 저 녀석 전성기에 저 속구랑 슬라이더만으로 신인왕에 11승까지 했던 놈이야.”

“네, 선배님.”

박살난 부리와 뽑혀나간 발톱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깃털만큼은 다르다. 오래된 깃털이 뽑힌 자리에는 새로운 깃털이 자라날 수 있다.

늙어 많은 것을 잃어버린 타자의 눈은 여전히 빛났다.

그 눈의 끝에는 너무 일찍 성공을 맛 보았기에 결국 실패 해버린 후배. 하지만 결국 그 실패에서 돌아온 자랑스러운 후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성민아,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경기는 아직 길게 남았다.

시즌 역시 아직 첫발을 뗐을 뿐이다.

여전히 돌핀스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고 마린스는 그저 마린스일 뿐이었다.

[김성민 7이닝 4피안타 무실점 시즌 첫 승 수확!!]

[부산 마린스 2차전 7:5 승리!!]

[돌핀스 손조차 대지 못했다. 삼진만 일곱 개!! 흔들리는 마구 너클볼이란?]

[송태수 ‘시즌은 이제 시작에 불과. 게다가 아직 시리즈 역시 끝나지 않았다.’]

-난 이번 경기에서 마린스의 희망과 절망을 목격했어.-

-이긴 경기에 웬 절망이냐고 묻고 싶지만, 나도 그거 둘 다 목격해버렸네.-

-아니, 대체 어느 팀 불펜이 2이닝 만에 5실점을 당하느냐고. 솔직히 7회 끝나고 7:0이면 안심하고 경기 봐도 되는 거 아니냐?-

-삐!!! 틀렸습니다. 이곳은 KBO. 사직 구장입니다. 7:0에 안심해도 되는 때는 지고 있는 순간뿐입니다.-

-ㅇㅈ. 우리가 지고 있을 때는 절대 역전 못 할 거라는 안심이 생기지.-

-그래도 김성민 피칭 보니까 안구 정화는 제대로 되더라. 120짜리 공에 돌핀스 놈들 방망이 붕붕 돌아가는데 소오름.-

-난 그거보다 151짜리 속구가 더 소름이었음. 그건 얘 재활 완전히 대성공했다는 이야기잖아. 근데도 너클볼을 던진다는 이야기고. 그 말은 너클볼 던지는 게 전성기에 150씩 뿌리던 시절보다 더 강하다는 이야기 아님?-

-그러네. 와, 김성민 전성기면 거의 국대 1선발급 아님? 올해 진짜 우승 각인 건가?-

-네, 거기까지 마린스 희망 편 잘 들었고요. 잘 봐라. 우린 올해 29경기 200이닝 평자책 2점 찍고 10승도 못하는 투수를 목격하게 될 테니까.-

시즌이 이어졌다.

< 희망과 절망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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