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0화 (21/287)

< 마구 >

공의 도시.

구도(球都) 부산.

그 이름에 걸맞게 프로야구 개막일의 부산에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올해는 가겠지?”

“그렇게 속고 또 속냐? 하여간 호구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그러는 너도 이번에 또 부산은행 마린스 가을야구 가자 정기예금 특판에 비상금 다 넣었다면서.”

“아니, 그거야 가을야구 못 간다고 해도 우대금리가 워낙 좋아서 넣은거지.”

“마린스 가을야구 못 갔을 때 금리보다 스마트폰으로 손가락질 몇 번 하면 되는 초콜렛 뱅크 정기예금 금리가 더 높거든?”

“어이쿠, 그랬어? 내가 디지털에 약해서 그걸 잘 몰랐네.”

“너 직업 앱 개발자거든.”

1992년 마지막 우승 이후 이제 40년째.

부산의 야구팬들에게 가장 행복한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겨울에는 꿈을 꿀 수 있으니까.

하지만 꿈이 행복할수록 눈을 뜨는 그 순간은 더욱 고통스럽다. 행복한 꿈이 사라지고 냉혹한 현실이 이를 드러내는 순간은 너무 잔인하다.

그렇기에 마린스의 팬들은 언제나 프로야구의 개막일이 가장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154km/h의 강속구

143km/h의 날카로운 슬라이더.

121km/h의 폭포수 같은 커브.

다행이도 작년 그들에게 17승을 안겨줬던 에이스 닉 해리슨은 그들의 안구를 정화해주었다.

이게 야구다.

그래, 투수라면 이래야지.

하지만 오는 것이 있다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오늘 마린스의 개막전 상대는 수원 돌핀스.

2013년 창단되어 2015년 프로 1군 합류. 올해로 17년 차에 접어드는 KBO의 막내 구단인 동시에 50년 역사의 마린스와 우승 횟수가 같은 강팀이었다.

그들이 내민 에이스 카드는 KBO 최강의 토종 투수 김민성. 한국의 사이 영이라 볼 수 있는 최동원 상만 두 번을 수상한 진짜배기였다.

투수난에 시달리는 KBO의 환경을 생각할 때 용병 투수에 필적하는 강력한 에이스 카드는 우승의 가장 큰 조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오늘 개막전 상대인 수원 돌핀스는 이번 시즌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다.

“아주 저 새끼들 방망이 돌아가는 꼬라지들 좀 봐봐. 무슨 자동문이여 자동문. 공만 보면 자동으로 피해가.”

“일반 자동문은 그래도 열리기 전에 뛰어 들어가면 가끔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지. 쟤들은 최신식 회전 자동문이야. 쟤들은 실수로 부딪히는 일도 없어. 쓸데없이 정교해.”

그 강력한 우승 후보의 에이스는 오늘 마린스의 타자들을 완벽하게 묶었다.

그것도 무려 8이닝이나.

직관을 왔던 팬들이 뿔이 났다.

“쉬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우승은 개뿔.”

“야, 이제 고작 한 경기 졌는데 뭘 그렇게 열을 내고 그러냐. 거기다가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잖아.”

“내용이 나쁘지 않기는. 김민성한테 꼴랑 안타 두 개 뽑고, 삼대 빵으로 졌는데 어떻게 해야 경기가 더 나빠지는 거냐?”

“그래도 오늘 우리 애들 에러는 없었잖아. 그리고 김민성이면 긁히는 날에는 잠실 애들도 손도 못 써.”

“아니, 야구에 고작 에러 없는 걸 기뻐하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아무리 김민성이라도 이건 아니지.”

“자자, 진정하고 작년 개막전이랑 재작년 그리고 4년 전 개막전 기억해봐.”

처참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유격수는 공을 못 잡고 외야수는 공을 못 던지고 포수는 공을 못 받았던 기억들이다.

“그래, 오늘 에러는 없었으니 충분히 긍정적인 경기였던 거 맞네. 그러면 내일은 기대해봐도 될까?”

“저쪽은 선발로 이번에 새로 영입한 용병 투수 내놓는 거고, 우린 게릭이니까. 그래도 우리가 가능성 있겠지. 게릭이 그래도 사직에서는 잘 던지잖아.”

“그렇지? 그렇겠지?”

하지만 신은 잔인했다.

[마린스 출발부터 적신호? 선발 용병 투수 게릭 벨. 등 통증 호소!!]

[지난 시즌의 혹사가 문제일까? 철강왕 게릭 벨 시즌 초부터 이상 증세!!]

마린스의 두 번째 투수 용병 게릭 벨의 지난 시즌 기록은 29경기 11승 10패. 193.1이닝. 3.91. 평균자책점으로 따지자면 리그의 중위권에 불과했지만 게릭 벨의 성적은 단순히 평균자책점으로 평가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1년 KBO의 경기 수는 144경기. 그가 소화한 29경기는 단순히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시즌을 소화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닝으로 이야기하면 다르다. 작년 마린스의 총 수비 이닝은 1284이닝. 193.1 이닝을 책임졌다는 말은 혼자서 마린스 시즌의 15%를 책임졌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지지난 주의 메디컬 테스트 때는 아무 이상 없었잖아.”

“그게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랍니다. 그냥 가벼운 근육통인데 사나흘만 쉬면 괜찮아진답니다.”

“하, 미치겠군. 안 그래도 개막전 패배로 뒤숭숭한데.”

“그래도 로테이션 한 번만 거르면 되는 상황이니 일단 보도자료 뿌리겠습니다.”

[게릭 벨. MRI 결과 가벼운 근육통!! 시즌에는 아무 문제 없다.]

[마린스 2차전 선발 김성민. 승리는 나에게 맡겨라!! ‘컨디션 최고조.’]

성민의 등판 일정이 당겨졌다.

시범 경기를 지켜봤던 마린스의 골수 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범 경기에서 성민이가 보여준 폼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 어떻게 보면 게릭 벨보다 나을 수도 있어.”

하지만 대부분 야구팬은 물 건너 벌어지는 시범 경기까지 꼬박꼬박 챙겨보는 열혈팬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민은 한때 괜찮았던 투수. 하지만 재능을 믿고 자기관리에 소홀했던 탓에 그 포텐셜을 다 터트리지 못한 프로 10년 차의 불펜이었다.

“얘 재작년에 팔꿈치 수술하러 가지 않았어? 근데 갑자기 선발 복귀라고? 공 감독이 미친 건가?”

“에이, 그래도 원래부터 볼은 좋았잖아. 팔꿈치 고치고 본래 구위 찾았으면 선발할 만도 하지 뭐.”

“그래도 영 불안한데.”

“공 감독도 다 생각이 있어서 올린 거겠지. 우린 그냥 오늘 열심히 응원이나 하자고. 하는 거 보고 욕해도 늦지 않잖아.”

“하긴 그건 그렇지.”

일반적인 마린스의 팬들은 언제라도 욕을 내뱉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사직 구장을 찾았다.

요 몇 년이라고 퉁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부진했던 마린스였다. 그렇기에 고작 개막전 패배 정도로는 작년 준플옵의 효과를 다 뺄 수 없었다.

2029년 재개장한 사직의 2만5천 석이 마린스를 응원하는 팬들로 거의 가득 찼다.

“휘유. 여기 사람 이렇게 들어차는 건 또 처음 경험해보네요.”

-야구에 대한 열기가 상당히 뜨겁군.

“작년 성적이 조금 좋았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든 거 보면 확실히 부산 사람들이 야구를 많이 사랑하긴 사랑하죠.”

-원래 성적이 안 좋은 팀일수록 팬들은 단단하게 뭉치는 법이지. 컵스도 108년 동안 우승 못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인기는 언제나 순위권이었다.

“그리고 우승했더니 그 인기가 더 커졌죠.”

-그래,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그저 더 독해질 뿐이지만, 응답받는 사랑은 더 커지는 법이니까.

무려 40년의 짝사랑. 아니, 정규 시즌 우승으로 이야기하자면 50년간의 짝사랑이다.

그 짝사랑 앞에서 성민이 글러브를 움켜쥐었다.

[마린스 대 돌핀스. 돌핀스 대 마린스의 2차전 경기. 오늘 마린스의 선발 투수인 김성민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아는 분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김성민 선수. 이번 봄의 시범 경기에서 정말 굉장한 모습들을 보여줬었거든요.]

[총 일곱 경기. 30이닝 동안 삼진만 서른 네 개를 잡으면서 무실점을 기록했었습니다. 물론 KBO보다 한 수 아래인 대만을 상대로 했던 경기가 네 경기나 됩니다만 그래도 정말 대단한 기록이에요.]

[자, 말씀드리는 순간. 타석에 돌핀스의 선두 타자 이진영 선수가 들어옵니다.]

“저 선배 공이 그렇게 더럽다며. 그거 받을 줄 아는 게 너밖에 없다더니 오늘 선발 출장했네? 역시 사람은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니까? 공을 잘 받으니 9푼 치고도 1군에 붙어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역시 사람은 원툴만 되도 충분한 것 같더라니까. 너 봐봐. 감독 똥꼬만 잘 빨았는데 1군에 떡 하니 붙어 있고 말이야.”

“뭐 이 새끼야?”

고등학교 시절부터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이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단 시작은 혁준의 1승이었다.

하지만 야구에서 중요한 건 설전이 아니다. 1루 베이스로 나가느냐, 나가지 못하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이제 라이벌이라기에 너무 크게 벌어졌다.

물론 1년 차 당시의 이진영은 감독의 양아들 소리를 들을 만큼 형편없는 성적으로 기회를 받았었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작년을 기준으로 0.288/0.341/0.367.

장타는 조금 아쉽지만, 타율과 출루율 모두 훌륭하다. 세이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타자였지만, 현장에서 야구를 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1루로 곧잘 나가주는 소중한 선두 타자. 어느 팀을 가건 1군 라인업에 충분히 이름을 올릴만한 이루수였다.

타율 9푼짜리 포수의 미트를 향해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타석의 이진영이 경기 전의 브리핑을 떠올렸다.

MLB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하지만, 2020년대 이후 KBO 역시 프런트에 예전보다 훨씬 많은 돈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범 경기 성민이 보여줬던 퍼포먼스는 대단했고, 오키나와 리그 이후 성민의 경기 동영상을 분석하지 않은 구단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평균적인 너클볼에 비해 구속이 빠릅니다. 요미우리와 카프의 타자들 가운데는 과거 오카다를 상대했던 타자들도 몇 있었습니다만, 오히려 그 경험이 발목을 잡았죠. 당시 오카다의 너클볼은 평균 105km/h정도 반면 김성민 선수의 너클볼은 최고 120까지도 나옵니다.”

“120이면 그리 빠른 공은 아니지 않나요?”

“너클볼 치고는 충분히 빠르죠. 105km/h정도의 공이야 끝까지 보고 적당히 휘둘러도 충분히 제대로 칠 수 있었습니다만, 120정도 되면 그러기 힘들어요. 요미우리와 카프의 타자가 쳐냈던 타구 대부분이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게 바로 그 증거입니다.”

전력분석팀의 직원은 돌핀즈의 타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저 방망이를 가져다 대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강하게 휘둘러라. 그것이 더 높은 안타 확률을 보장한다.

KBO보다 수준 높은 요미우리와 카프의 타자들보다 광주 호크스 타자들이 더 많은 안타를 만든 것이 그 증거다.

날아드는 성민의 초구를 향해 이진영이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초구 스윙 스트라이크!!]

“야, 지금 저거 뭐냐?”

관전하던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뻐엉!!!!

“스트라잌!!!”

그리고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경기를 직관하던 마린스의 팬들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클볼의 변화는 내야 관중석에서 눈으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광판에 찍힌 117, 114, 116라는 숫자.

그리고 꿈틀거림이 확연히 느껴지는 브레이킹볼도 아니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저 존의 복판을 파고드는 120도 못 되는 공 세 개에 삼구삼진. 그것도 공보는 눈 하나는 일품이라는 돌핀스의 1번 타자 이진영을 상대로!!

마린스의 팬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기도했다.

부디 이것이 그냥 첫끗발이 아니기를.

부디 이것이 개끗발로 끝나지 않기를.

50년간 기도를 외면했던 저 하늘의 어떤 분을 대신해 성민이 공을 뿌렸다.

< 마구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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