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스 >
너무 많이 이야기해 지겨운 감이 있지만, NPB의 평균적인 수준은 KBO보다 높다.
또한, 일본과 한국의 감정은 특별하며, 특히 야구에 관해서는 프로야구 초창기 일본의 2군 선수들이 KBO를 휩쓸었던 아주 끔찍한 기억이 있기에 더욱 각별하다.
[김성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5이닝 무실점 2피안타 3삼진!!]
[일본을 침묵시킨 김성민의 너클볼!!]
[기무라 지로 ‘처음 보는 공이라 당황스러웠을 뿐. 함께 리그를 뛴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요한 도밍고 ‘너클볼을 몇 번 상대해봤지만 그런 공은 처음이었다. 어지간하면 NPB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진출할 생각이 있다면 우리 구단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
[일본 킬러 김성민!! 히로시마 도요카프전 5이닝 무실점 4피안타 3삼진!!]
-킹성민!!! 소리 벗고 빤스 질러!!!
-킹성민한테 2군 여포라고 한 새끼 나와. 세상 어느 2군 여포가 일본 1군을 학살하냐 ㅋㅋ
-오오. 킹성민. 마린스 드디어 우승 가는 건가?
-우승이 어디 투수 하나로 되겠어? 그리고 꼴랑 시범 경기 두 경기 잘했다고 우승 설레발은 좀 이르지.
-근데 김성민 대만 상대로는 완성형 투수였는데 일본 타자들 상대로는 삼진이 너무 적음. 그게 좀 불안 불안함.
-그놈의 삼진, 삼진. 투수가 점수만 안 주면 그만이지. 대체 언제적 삼진 이론임. BABIP 그거 깨진 게 벌써 10년 전 이야기인데.
-나도 알아. 근데 그건 MLB 이야기고. 너 마린스 내야 봤냐? 마린스에서는 점수 안 주려면 그냥 투수가 삼진 짱짱하게 잡는 거 말고는 답이 없음.
-그러면 결국 내야 엉망인 마린스만 아니면 김성민은 지금보다도 훨씬 좋은 투수라는 이야기야?
“맞습니다. 그래서 전 진지하게 이 선수의 영입을 추진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스카우트 팀장 나카타 준페이가 폭탄을 던졌다.
투수난에 시달리는 KBO와 달리 NPB는 거포 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부분 팀에 가장 중요한 용병은 핵심 타선의 거포형 용병들이다.
팀당 허용되는 용병은 총 네 명.
규정상 네 명 모두를 타자로 채울 수 없기에 보통 세 명의 타자 그리고 한 명의 투수로 용병을 구성한다.
그런데 투수 용병을 KBO에서 작년까지 불펜을 뛰던 투수를 데리고 오자니.
히로시마의 프런트들이 고개를 저었다.
“이봐 나카타. 이제 고작 시범 경기 세 경기, 그것도 한 경기는 KBO 팀과 치른 투수잖아.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맞아. 게다가 작년까지 불펜이나 뛰던 투수잖아. 거기다가 KBO 선수면 몸값도 싸지 않고. 검증도 안 된 투수를 데리고 오긴 위험해.”
“하지만 두 경기라고 해도 요미우리를 상대로 5이닝 무실점이었습니다. 그 요한 도밍고가 극찬했고요. 게다가 우리 팀 타자들을 상대로도 5이닝 4피안타 무실점입니다.”
“그야 아직 봄이니까.”
“봄인 건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투수 쪽이 오히려 더 힘들죠. 여기 이거 보시죠. 과거 김성민 선수의 구속입니다.”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스카우트 팀장인 나카타가 침을 튀겨가며 성민의 장점을 설명했다.
“전성기에는 157까지 던졌고, 이후 팔꿈치 인대가 너덜너덜한 상태에서도 최고 150을 던지던 투수입니다. 재활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그 이상의 구속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의미죠.”
“하지만 너클볼이라는 것이 구속이 전부가 아닌 것 잘 알잖나. 오히려 지금보다 형편없어질 가능성도 있어요.”
“물론 너클볼은 구속이 전부가 아니죠. 하지만 구속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아니, 야구가 무슨 빠른 공 던지기 대회도 아니고.”
“너클볼이 실전에서 못 쓰이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 팀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인 겁니다. 우리 팀에는 NPB 최고의 포수인 나카지마 다케오가 있잖습니까.”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제는 설전을 넘어 싸움이 될 것 같은 상황.
-짝!!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장의 손뼉 소리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준페이. 그 김성민이라는 선수가 NPB에 오면 얼마나 활약을 할 수 있을 거로 예측하는 건가?”
“최대 크리스 존슨만큼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크리스 존슨?”
“크리스라니. 맙소사. 나카타 과장이 좀 심한 거 아닌가?”
나카타 준페이의 입에서 NPB 역사상 단둘밖에 되지 않는 외국인 사와무라상 수상자의 이름이 거론됐다.
“최대치가 크리스 존슨이란 말이지.”
***
오키나와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공항에 모인 팬과 기자들이 상당했다.
바로 몇 달 전, 마무리캠프에서 돌아왔을 때 성민을 찾았던 기자는 박희연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비록 골수 야구팬이 아니라면 굳이 찾아보지 않는 시범 경기라고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골수 야구팬이라면 굳이 찾아본다는 의미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골수 야구팬은 생각보다 많았다.
“김성민 선수!! 이번 시범 경기 결과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너클볼을 선택하신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나요?”
“일본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특별히 강하신데. 뭔가 비결이 있으십니까?”
“이번 시즌 목표가 있다면 뭔가요?”
기자들이 성민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그야말로 벼락스타다.
대부분 벼락스타는 달라진 자신의 위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버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민은 달랐다. 그는 이미 6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아니 이것보다 10배쯤 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생각했던 만큼 나왔습니다.”
“그냥 던졌더니 잘 던져지더라고요.”
“프로로는 실격일 수도 있습니다만, 뭔가 일본이랑 경기할 때는 더 불끈하는 그런 게 있어요.”
“당연히 우승입니다.”
성민이 침착하게 자신을 향한 질문에 차근차근 답변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수십 명의 팬에게 사인까지 해줬다. 그것도 성민 본인이 직접 준비한 야구공에다가.
-어제 갑자기 사인 연습 열심히 하더라니. 이것 때문이었냐?
‘요새 통 사인해줄 일이 없었잖아요. 이 먼 곳까지 굳이 와서 사인받으려는 팬들한테는 평생에 남을 기념품인데 그 정도 수고는 해야죠.’
-참, 평소에는 철없는 애새끼 같으면서도 이상한 부분에서 어른이란 말이지.
‘원래부터 엄청 어른이었거든요.’
물론 모든 선수가 성민처럼 팬들의 사인 요청에 성실하게 임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마린스의 용병 투수인 닉 해리슨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공항을 지나 구단 버스로 들어갔다.
MLB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었지만 작년 한 해 한국에서 용병 뛰는 동안 그래도 된다는 것을 학습한 결과였다.
“엄마······.”
열심히 사인하던 성민의 눈에 무릎까지 닿는 헐렁한 닉 해리슨의 저지를 걸친 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딱 봐도 해리슨의 저지에 사인을 받고 싶어 부모님을 졸라 공항까지 달려온 마린이다.
하지만 닉 해리슨이 아무에게도 사인 해주지 않고 버스로 쏙 들어가 버린 탓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이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의 얼굴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닉 해리슨에 대한 야속함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오, 해리슨 저 새끼. 아주 인성이. 아무리 피곤해도 애들은 해줘야지.’
성민이 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쩔 생각이냐?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야, 꼬맹이. 너 나 누군지 알아?”
“······.”
“모르는구만. 괜찮아. 나도 너 누군지 모르니까 쌤쌤이야.”
아이의 부모가 대체 이건 무슨 미친 소리인가?
황당한 눈빛으로 성민을 바라봤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등장한 거인의 엉뚱한 이야기에 사인을 못 받아 나오려던 서러움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형 이름은 김성민이다. 꼬맹이 넌 이름 뭐냐?”
“유빈, 최유빈.”
“그래, 최유빈. 너 마린스 팬이냐? 언제부터 팬이었냐? 지금 마린스 에이스 싸인 받고 싶어서 여기 온 거야?”
쏟아지는 성민의 질문에 자신이 사인을 못 받은 것이 새삼 떠올랐는지 아이의 눈이 다시 그렁그렁해졌다.
“짜식이, 남자 새끼가 뭐 그런 거로 울라고 그러냐. 인마,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우는 거야.”
“세 번?”
“그래, 태어났을 때, 여자한테 차였을 때. 그리고 야구공에 꼬추 맞았을 때.”
“그게 뭐야. 야구공에 꼬추를 왜 맞아.”
“인마, 야구 하다 보면 원래 꼬추도 맞고 그런 거야. 해리슨도 어제 꼬추 맞아서 지금 급하게 버스 들어간 거야.”
성민의 능청스러운 헛소리에 아이의 부모가 피식 웃었다.
“그보다 너 마린스 에이스 싸인 받고 싶어서 온 거 맞지?”
“응.”
“너 오늘 운 엄청 좋은 줄 알아라. 너 잘못했으면 마린스 에이스 사인 대신 이상한 거 받아갈 뻔한 거야.”
“응?”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올해 마린스 에이스는 닉 해리슨이 아니라 이 형이거든.”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마린스 경기 100번도 넘게 봤는데 아저씨는 한 번도 본 적 없어.”
“당연하지. 너 작년에 마린스 몇 등 했는지 알아?”
“3등!!”
“그래, 3등 했지. 그게 다 이 형아가 안 나와서 3등 한 거야.”
“거짓말.”
“진짜거든.”
“거짓말!!!”
“아뉜뒈. 거짓말 아뉜뒈. 참말인뒈”
“아냐, 거짓말이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거짓말 참말 대전이 이어졌다.
그 모습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애새끼는 8세 미만 유아들과 정신연령이 얼추 비슷하다.
대화가 통한다.
“그러면 내기할래?”
“내기?”
“내가 마린스 에이스인지 아닌지. 만약 내가 지면 해리슨 사인받아다 준다.”
“진짜?”
아이의 눈이 빛났다.
“그래, 대신, 이 형아가 마린스 에이스인 게 밝혀지면 넌 한국 시리즈에 이거 입고 와서 형 응원해야 한다. 알겠어?”
성민이 자신의 가방에서 저지 하나를 꺼내 사인을 한 뒤 아이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 이거 선수용이라 비싼 거니까, 물빨래하지 말고 엄마한테 드라이클리닝 해달라고 해라.”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린 성민이 아이의 부모에게 묵례하고 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아이의 부모들이 최악이 될 수 있었던 하루를 좋은 추억으로 바꿔준 선수에게 감사를 담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훈훈한 장면에 기자들의 카메라가 번쩍였다.
‘크, 졸라 멋있어. 내가 했지만 나 방금 졸라 멋있었어. 이거 솔직히 미담으로 기사화돼서 막 그림 자료랑 같이 인터넷 떠돌아야 하는 일 아닙니까?’
-미담은 모르겠고, 서른이 코 앞인 194cm짜리 어른이 자기 허벅지까지도 안 오는 아이랑 말다툼 한 건 기사화될만한 일이긴 하지.
‘아니, 그 아름다운 대화의 과정을 그런 식으로 요약하시면 안 되죠.’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버스나 타. 지금 네가 한 이야기가 미담이 되려면 그 호언장담을 이뤄야 가능한 일이니까.
‘그야 당연히 그 정돈 해야죠. 목표가 있는데’
성민이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것은 필 니크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부분에서 삐걱거리고 투덕거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바라보는 곳은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 정도’는 당연히 이뤄야 할 것에 불과했다.
며칠 뒤. 3월의 끄트머리.
마침내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 에이스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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