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8화 (19/287)

< 오키나와의 지배자(4) >

가오슝에서 대만의 프로들을 상대로 성민은 삼진 잘 잡고 볼넷 안 주고 장타 허용 안 하는 완벽한 투수였다.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타자들은 대만 타자들과 확실히 수준이 달랐다.

대만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라고 해도 NPB를 기준으로는 평균에 불과하다.

그리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지난 10년 내내 흑자, 적자를 따지지 않고 돈질을 했던 NPB버전 악의 제국이었다.

게다가 오늘 그들은 작정하고 주전 선수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성민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1회를 막아냈다.

-딱!!!

[무라타!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하지만 내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웃!! 1회 초, 마린스의 김성민 선수가 자이언츠 타자들을 완벽하게 막아냅니다.]

당연했다.

그곳에서 성민은 거의 모든 타자에게 주야장천 존의 복판으로 너클볼만 뿌려댔다. 볼넷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방심했던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애당초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놈들을 상대로 빠지는 공을 던질 이유는 없었으니까.

대만에서는 한 팀에 하나, 외국인 용병 정도만이 NPB 타자의 평균적인 수준에 비할만하다. 그조차도 요미우리의 평균적인 선수들 이하. 상위 타순에 비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요미우리의 타자들 역시 열심히 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대만의 용병 타자들은 어떻게든 KBO의 눈에 들어 KBO에 용병으로 오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 아래 경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런 타자들을 상대로도 성민은 장타를 허용한 적이 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힘이 부족한 요미우리의 멸치들이 성민의 너클볼을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타격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너클볼이 생소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저 가져다 대기 급급한 타격은 결코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좀 어때?”

“비디오로 본 것보다 훨씬 까다로워요. 게다가 듣던 것보다 속구 비중도 높은데 이것도 위력이 상당한데요?”

“오늘 경기 좀 힘들겠어요.”

일본 선수들의 고민에 요미우리의 거포 용병. 요한 도밍고가 가슴을 두들기며 호언장담했다.

“그래봐야 너클볼러지. 마이너에서 너클볼을 던지겠다는 놈들치고 실투 안나오는 놈들 없었어. 그리고 그런 거 한 방 크게 치면 저것들은 그대로 무너진다고. 괜히 요즘 너클볼러가 안 나오는 게 아니야.”

2회 초.

다나카 신고가 마린스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덕아웃에 앉기 무섭게 성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오늘 공도 잘 들어가는데 흐름 이어갈 수 있고 나쁘지 않네요.’

-그래, 그렇게 긍정적으로 가자고.

타석에 선두 타자 요한 도밍고가 올라왔다.

197cm에 118kg

헐렁한 야구복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흉폭한 근육. 타석이 꽉 차는 느낌의 거구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휘유, 저건 뭐, 스치기만 해도 외야로 날려 보내겠는데요?’

-그래서 무서워?

‘그럴 리가요. 스치지도 않아야겠다 이 말이죠.’

초구 너클볼.

대만에서 처음 시범 경기를 치르고 벌써 3주가 흘렀다.

실전에서만 14이닝.

필 니크로가 몸에 박아넣었던 너클볼의 경험은 그 실전들을 통해 한층 발전해있었다.

움직인다.

그리고 흔들린다.

하지만 요한 도밍고는 현혹되지 않았다.

수십 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본능이 소리쳤다. 지금이다!! 저곳이다!! 휘둘러라!! 하지만 그의 이성이 그것을 억눌렀다.

지켜보고 예측하고 전력을 다해 휘두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한다.

-부웅!!!

“스트라잌!!”

마치 요한 도밍고의 방망이를 피해 가는 것처럼 성민의 너클볼이 움직였다.

허망한 헛스윙에도 요한 도밍고는 상심하지 않았다.

너클볼은 본래 이런 공이다. 어차피 공을 던진 이후 기도하는 것은 투수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째 성민의 공이 날아왔다.

-부웅!!!!

“스트라잌!!!”

이번에도 역시 성민의 공이 요한 도밍고의 방망이를 피해갔다.

그리고 세 번째.

존을 벗어나는 149km/h의 빠른 공.

-뻐엉!!

성민이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공을 치겠다는 의욕으로 만만한 주제에 아슬아슬하게 빠지는 공을 골라내다니.

연봉 60억짜리 NPB 최고 타자답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너클볼이다.

네 번째. 성민의 손가락이 공을 튕겼다.

공이 날아온다.

종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움직임.

요한 도밍고의 본능이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너클볼은 본래 경험으로 쌓은 본능을 억누르고 존의 어딘가로 들어오는 공을 믿음으로 공략해야 하는 공이다. 그의 방망이가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혁준이 신께 기도했다.

제발 뒤로 빠지지 말아라!!

존을 벗어나는 성민의 너클볼이 혁준의 미트 끝을 두들겼다.

-뻐엉!!!

“스트라잌!!!!”

요한 도밍고가 침을 내뱉었다.

투수의 운이 좋았다. 여기서 하필 공이 존을 벗어나다니.

하지만 그 운이 과연 경기 내내 이어질 수 있을까?

경기는 아직 2회에 불과했다.

-잘했다. 이제 슬슬 존의 밖으로 보내는 공도 좋아지고 있어. 포수 녀석한테는 죽을 맛이겠지만 말이야.

‘뭐, 너클볼 던진 것도 이제 다섯 달 정도 돼가니까요. 능숙해질 때도 됐죠.’

-보통 다섯 달이면 너클볼 꾸준히 던지는 것 자체도 힘들어 할 시기거든?

‘제가 어디 보통 천잽니까? 게다가 역대 최고의 너클볼러도 옆에 딱 붙어 있잖습니까.’

-아부해봤자 나오는 것 없다.

경기가 이어졌다.

요미우리의 타자들이 언젠가는 나올 실투를 기대했다.

하지만 성민은 그들의 꿈을 이뤄줄 생각이 없었다. 오늘 성민에게서는 너클볼러들이 가끔 보여주는 배팅볼이 나오지 않았다.

우연한 행운의 안타조차 단타에 그칠 뿐.

점수로 연결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5회 말.

기무라 지로의 방망이가 또 한 번 성민의 공을 건드렸다.

유격수 방면.

적당한 속도, 적당한 높이의 적당한 타구였다.

1회, 마린스의 유격수가 보여줬던 어깨를 생각한다면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기무라 지로는 최선을 다해 달렸다.

“설마. 이걸 실수하겠어?”

“아냐, 박동엽이라면 가능해.”

경기를 지켜보던 마린스 팬들이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오늘 정말 물이 오른 것일까?

동엽이 능숙하게 공을 포구했다.

“좋았어!!”

별거 아닌 수비였지만, 마린스 팬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 환호는 너무 이른 샴페인이었다.

“응?”

“응???”

공을 받은 박동엽이 크게 팔을 휘둘렀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투수를 했던 강견이 빛났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너무 빛났다.

송구가 1루수의 미트를 넘어 내야 관중석으로 직격했다.

인정 2루타.

두 경기 연속으로 실책이라니.

박동엽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운드의 성민이 허리를 짚은 채 하늘을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나온 상상하기 힘든 에러에 필 니크로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뭐 저런 또라이 같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민이 박동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욕을 퍼부으려는 걸까? 아니면 설마? 달려가서 때리는 건 아닐까? 평소 이 애새끼가 보여주던 모습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 그가 서둘러 성민을 달랬다.

-성민아. 참아라. 아무리 화가 나도 참아야 해.

하지만 성민이 보인 반응은 필 니크로의 예상을 완벽하게 벗어났다.

“괜찮아. 사람이 열심히 하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거지. 당황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자. 알겠지?”

성민의 예상치 못한 격려에 당황한 것은 필 니크로 만이 아니었다. 동엽 역시 멍하게 성민을 바라봤다.

-성민아, 괜찮아?

‘네, 뭐 좀 짜증나긴 하는데. 그래도 이런 거 하나하나 짜증 내면 마린스에서는 못 뛰어요. 그냥 세금 내는 셈 쳐야죠. 1회에는 수비 잘했잖아요.’

성민은 마린스에서 10년을 뛴 남자였다.

1루 악송구야 종종 있는 일이다. 물론 그게 내야 관중석까지 날아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봐야 인정 2루타다.

‘이제 안 맞고 끝내면 그만이죠.’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법.

마린스에서 단련된 성민의 멘탈은 고작 내야석으로 날아가는 악송구 정도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5회 말, 잔루 2루.

성민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5이닝 무실점 2피안타 3삼진.

KBO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 NPB 최강의 팀을 상대로 성민이 자신의 클래스를 증명했다.

< 오키나와의 지배자(4)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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