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의 지배자(3) >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 스포츠는 야구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역시 다르지 않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일본은 더하다.
총 페이롤로 봤을 때 NPB의 전체 규모는 KBO의 3배 가량. 게다가 모기업에 상당부분을 의존하는 KBO와 달리 NPB의 재정자립도는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
그런 규모차이에도 불구하고 국제전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대 전적은 46승 2무 72패. 심지어 이것은 20세기, 한국의 프로가 생기기 이전, NPB의 프로는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이전까지의 전적을 합친 성적표다.
프로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2003년 이후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2032년 현재는 19승 18패로 오히려 한국 쪽이 우위에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성민이 2026년 아시안게임에서 거뒀던 1승 역시 포함돼있다.
“내일 우리 성민이 경기 요미우리랑 하는 거 맞지? 잘해야 할 텐데.”
“대만에서 하던 거 보면 잘하겠지. 원래 성민이가 일본 놈들한테 강하잖아. 예전에 아시안게임에서도 그렇고 말이야.”
“그렇긴 한데 그땐 한국의 야수들도 국가대표였잖아. 지금은 마린스 놈들이고.”
“그거야 일본놈들도 그건 마찬가지지. 걔들도 그냥 프로팀 중 하나잖아.”
“쯧쯧, 하여간 무식한 소리 한다. 요미우리랑 마린스가 같냐? 같아? 이번 시즌 요미우리 라인업이면 거의 일본 국대급 라인업이야. 마린스에 국대급? 잘 쳐줘야 박태경, 하철왕 정도?”
“어휴, 일뽕 새끼. 그래 너 일본 잘 알아서 좋겠다. 근데 그렇게 잘하는 놈들이 국대 경기는 우리한테 왜 진다냐?”
“또, 또 이런다. 국대 경기 지는 거야 리그 까부수는 최고 정예 몇 명으로 가면 별 차이 없으니까 그렇지. 근데 한국이랑 일본 체급 차이 때문에, 그 최고 정예급 숫자에서 차이가 나는 거고. 일단 일본놈들 인구가 우리 2배가 넘잖냐. 기초 인프라도 차이가 좀 나는 편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산 마린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범 경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 마린스는 작년 준플레이오프에 갔다고는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13년이나 가을야구를 하지 못했던 만년 꼴찌팀이었던 반면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NPB 최다 우승팀이자 2020년대 들어 일본 시리즈에 가장 많이 출전한 팀이었다.
게다가 성민이 대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투수이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대만의 프로를 상대로 거둔 성적이었다는 점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의 야구 통계학자 클레이 데이븐포트의 연구에 따르자면 NPB와 KBO의 차이는 KBO와 대만프로야구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A+리그를 폭격한 루키 투수가 당해에 곧바로 AAA로 올라가서 성공하는 확률이 채 1할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런 통계들을 근거로 성민이 당장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타자들을 상대로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기 힘들 것이라 떠들었다.
경기 당일.
요미우리의 스프링 캠프가 열리는 나하 셀룰러 스타디움. 1만 5천 석의 내야관중석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도 모자라 외야의 스탠딩석까지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이건 시범 경기 라기에는 열기가 좀 과하네. 양키스 시범 경기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말이야.
‘요미우리 효과에 한일전 효과가 겹쳐서 그래요. 아주 표가 없어서 못 판다고 그러더라고요.’
-생각했던 것보다 인기가 상당하구나. 혹시 중계도 되는 경기냐?
‘당연하죠. 중계도 그냥 인터넷 중계 말고 케이블로 TV중계 들어갈 겁니다. 아마 경기 지기라도 하면 그날은 그냥 단체로 매국노죠.’
최근 국제 대회에서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거둔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야구를 국기로 생각하는 일본인들 입장에서 그건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팀이 우세를 보이는 한일 대표팀 간의 국제전과 달리 오키나와 리그에서 한국팀의 승률은 3할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오키나와 리그가 더 크게 흥행하는 요소가 되어 주었다.
“오늘 경기는 당연히 우리 팀이 이기겠지?”
“당연하지. 오늘 선발 투수가 누구야. 우리 요미우리의 심장 다나카 신고잖아.”
재작년 사와무라상을 받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다나카 신고의 공이 미트를 꿰뚫었다.
-뻐엉!!
올해 나이 31세.
한때 MLB에 진출할 재목으로까지 입을 모았던 투수다운 위력이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모험심이 있었더라면 MLB에도 충분히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진골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요미우리는 15년쯤 뒤의 감독 자리로 그에게 보답할 예정이었다.
존의 안과 밖 위와 아래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149km/h의 잘 제구된 속구가 구석구석 존을 두들겼다. 물론 일본 만화에서 보던 것 같은 공 한 개 차이의 터무니 없는 제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애초에 KBO의 경우 리그 투수 전체의 속구 평속이 140km/h에 불과하다. 이건 심지어 외국인 용병들과 불펜투수를 다 합친 숫자다.
마린스의 타자들이 연달아 방망이를 붕붕 휘둘렀다.
[아, 스윙 삼진!! 이거 오늘 다나카 신고 선수 공이 너무 좋습니다.]
[저 선수가 작년에는 조금 죽을 쒔지만 그래도 재작년 사와무라상까지 탔던 투수거든요. 사실상 현재 NPB 최고의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자, 타석에 마린스의 3번 타자. 하철왕 선수가 들어옵니다.]
다나카 신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앞선 타자들은 모두 별 볼 일 없는 타자들이다. 하지만 하철왕은 다르다.
[작년 31개의 홈런포를 쏘아올렸던 하철왕 선수. 기본적으로 힘이 엄청난 선수거든요. 다나카 신고로도 쉽게 생각할 수는 없을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다나카 신고 와인드업!!]
이제는 일본 투수들의 전매특허에 가까운 포크볼에 하철왕의 배트가 헛돌았다.
-부웅!!
“스트라잌!!”
이어지는 속구, 그리고 포크볼 그리고 슬라이더와 마지막 포크볼.
중간에 속구 하나는 존을 빠져나가는 보여 주기용이었을 뿐, 철저한 변화구 승부가 하철왕을 막아섰다.
-딱!!
[쳤습니다!! 하지만 힘 없는 타구. 내야 벗어나지 못하네요.]
[존에서 완전 빠지는 포크볼이었는데 조금만 더 참고 지켜봤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와!!!!!!!””
관중석의 관객들이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그 적대적인 환호 속에서 성민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긴장은 없었다.
-좋으냐?
‘당연하죠.’
-혹시라도 지면 매국노가 되는 경기라며.
‘에이, 세상 어떤 멍청이가 미리부터 졌을 때를 걱정합니까? 이겼을 때 어떻게 될지를 기대하죠.’
세상 사람 절반 이상을 단숨에 멍청이로 만들어버린 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를 바라보며 필 니크로가 웃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이겼을 때 돌아올 인기를 기대해야지.
1회 말.
사람들의 기대 속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번 타자 기무라 지로 선수가 들어왔습니다. 이 선수 기록이 참 대단하죠?]
[네, 작년 시즌 0.351의 타율로 타율왕과 신인왕을 동시 수상한 타자입니다. 일본의 언론에서는 저 선수를 스즈키 이치로의 재림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어요.]
-저 멸치가 이치로의 재림이라고?
필 니크로가 냉소했다.
물론 필 니크로는 스즈키 이치로와 같은 시기에 뛴 적이 없었다. 필 니크로가 은퇴하던 해에 이치로는 중학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스즈키 이치로가 MLB에 데뷔하던 당시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이치로는 인종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재단할 수 없는 진짜 천재였다. 비록 후대에 와서는 그 아름다운 클래식 스탯에 비해 실제 생산성은 형편없었다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대의 눈으로 본 평가다.
프레드 린과 더불어 역사상 단 둘밖에 되지 않는 신인왕 MVP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너클볼.
작년 시즌 일본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타자가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흔들, 그리고 또 흔들.
어디로 날아드는지 모르는 극심한 변화가 기무라 지로를 현혹했다. 하지만 그의 공에 방망이를 가져다 대는 능력만큼은 NPB 최고 수준이었다.
대만의 프로 타자들은 성민의 공을 끝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기무라 지로는 달랐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까지 성민의 공을 쫓았다. 거기에 타고난 그의 손목 힘이 방망이 컨트롤을 도왔다.
-딱!!!
기무라 지로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두들겼다.
중심은 벗어났다.
게다가 0.351의 타율을 기록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순장타율은 0.067에 불과했다. 사실상 장타를 칠 능력이 거의 없는 타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힘없는 타구가 2, 3루 간으로 흘렀다.
하지만 오히려 완벽하게 빗맞았기에, 그리고 타구에 힘이 없는 느린 타구였기에 가능성이 있었다.
기무라 지로가 1루를 향해 질주했다. 10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던 전성기의 스즈키 이치로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기무라 지로 역시 빠른 발을 이용하여 내야 땅볼을 안타로 둔갑시켰다.
NPB를 기준으로 한다면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KBO의 평균적인 수비능력은 NPB 미만이다. 게다가 오늘 마린스의 주전 유격수는 풀타임 1군을 치러낸 적이 없는 신인이었다.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부산 마린스는 반백년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팀의 자랑이라고 할만한 유격수를 배출한 적이 없었다.
마린스의 유격수는 언제나 구멍이었으며 그것은 최근 FA로 팀을 떠난 마린스의 주전 유격수 백호창이 보상선수도 없는 C급 FA였다는 것이 증명했다.
하지만 마린스의 유격수는 언제나 당연히 잡아야 할 공을 놓치는 대신 일 년에 몇 번 터무니 없는 수비를 보여준다.
“저, 저 또 겉멋 수비한다!!”
[유격수 방면! 박동엽 빠르게 달려듭니다!!]
박동엽이 앞으로 빠르게 돌진했다. 매일 욕 먹지만 절대 고쳐지지 않는 일명 메이쟈식 겉멋 수비다. 글러브에 굴러온 공을 튕겨 오른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1루를 향해 빠르고 강하게!!
-뻐엉!!!
그것은 박동엽 본인이 하고도 스스로 깜짝 놀랄만큼 깔끔한 플레이였다.
“아웃!!!”
[박동엽!! 박동엽!! 놀라운 수비예요. 와, 정말 대단했습니다.]
판정을 따져볼 필요도 없는 완벽한 아웃에 기무라 지로가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경기를 지켜보던 마린스의 팬이 언제 그를 욕했냐는 듯이 태세를 전환했다.
“그래!! 이거지. 동엽이가 어? 겉멋이 좀 들어서 그렇지. 어깨 하나는 진퉁이거든. 쟤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투수였다고. 투수.”
필 니크로 역시 의외의 장면에 감탄했다.
-와우, 쟤 어제 알까기 했던 그 어리버리 맞아?
‘원래 동엽이 쟤가 좀 기복을 타요. 오늘 보니까 컨디션 좋아 보이네.’
경기가 이어졌다.
< 오키나와의 지배자(3)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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