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의 지배자(2) >
“성민이랑 닉이 싸웠다고?”
“네, 주먹다짐까지 가지는 않았고 그냥 말다툼이 좀 있었답니다.”
“말다툼?”
“연습용 마운드 사용 문제로 조금 다툼이 있었다는데, 주변에서 잘 말려서 일이 커지지는 않았습니다.”
공필승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하군. 두 사람 모두 이번 시즌을 치르려면 필요한 선수들이야. 강용구 코치가 잘 좀 다독여줘. 특히 닉 같은 경우 예민한 성격인 거 잘 알잖아. 강 코치가 알아서 신경 좀 써달라고. 응?”
“······, 알겠습니다.”
불편한 침묵 끝에 강용구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연습을 끝낸 샤워실.
진명규가 성민에게 슬금 다가왔다.
“성민아, 방금 속은 시원했는데, 그래도 너 조심해야 한다.”
“뭐가요?”
진명규의 조언에 성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닉 말이야. 닉. 지금 너만 저 새끼 싫어하는 거 아니야. 우리도 다 싫어해. 근데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똥이 더러우면 치워야죠. 피하기는 왜 피합니까.”
“그러다가 그 똥 묻으면 너만 손해야 인마.”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손해는 무슨. 그냥 씻으면 그만이에요. 그나저나 대체 공 감독님은 저런 놈을 왜 그렇게 싸고돈답니까? 팀 케미 아주 박살을 내는 새끼 같은데. 작년에는 형규도 저 새끼랑 한바탕하고 2군 내려갔다면서요.”
“지금 공 감독 그 양반 똥줄이 타는 상황 아니냐. 이 상황에서 17승 투수면 똥이라도 받들어 모셔야지. 너도 알잖아. 4년 전에 팀 내 정치니 파벌 싸움이니 여론이 나빠져서 외부인사로 데리고 온 게 공 감독인 거.”
진명규가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으로는 지금도 윗선은 당장이라도 공 감독 자르고 강 코치님 감독으로 앉히고 싶어서 안달이라더라.”
“그래도 작년에 13년 만에 준플옵 갔잖아요.”
“그걸로는 부족하지. 우승도 아니고. 내가 보기에 올해 코시 진출 못 하면 재계약 물 건너갈걸? 솔직히 부산 쪽 학교 출신도 아니고, 1군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던 것도 아닌 양반이 다른 팀에서 활약 좀 했다고 감독 온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지.”
한국 사회 어디엔들 학연 지연 혈연이 없겠는가.
KBO의 구단들 역시 알음알음 학연과 지연으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관행이 퍼져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팀도 부산 마린스만큼 그 학연과 지연의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 양반은 팀내 케미고 뭐고 신경 쓸 정신이 없어요. 게다가 현역 때 1군 경험도 별로 없는 양반이잖아. 좋은 선수들 잔뜩 집어넣고, 라인업 좀 잘 짜고 코치들이 선수들 잘 다독이면 성적 나오는 줄 안다니까?”
진명규의 이야기를 듣던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야구를 하라고 모아놨더니 이건 뭐, 정치를 하고 앉아있군. 생각보다 훨씬 어렵겠어.
‘어렵긴요. 대체 어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간단한 문제죠’
-감독은 코치랑 자리 싸움하고, 선수들은 그거 눈치 보고 있고, 용병은 날뛰는데 이게 어떻게 간단한 문제냐.
성민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답했다.
“간단하네요. 이건 그냥 내가 닉 그 새끼보다 야구만 잘하면 해결되는 문제잖아요.”
성민의 그 자신감 넘치는 호언장담에 진명규도, 필 니크로도 모두 할 말을 잃었다.
***
오키나와 스프링 리그.
부산 마린스의 첫 번째 상대는 서울 엘리츠.
프로야구 원년부터 존재했던 팀으로 마린스와 KBO 인기 1, 2위를 다투는 팀이다.
물론 성적과 인기는 반비례한다는 공식을 증명하듯 성적은 마린스 못지않게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4, 5년에 한 번씩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고 우주의 기운이 모였던 7년 전에는 우승까지도 차지했던 전통 있는 팀이다.
지금까지의 상대 전적은 881경기 417승 27무 437패.
KBO의 팬들은 이들의 경기를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에 비견하여 이렇게 부르곤 했다.
헬 꼴라시코.
그렇게 서울 ‘헬’리츠와 부산 ‘꼴’린스의 경기가 시작됐다.
오늘의 부산 마린스의 선발 투수는 닉 해리슨.
그의 149km/h 속구가 존을 갈랐다.
-뻐엉
“스트라잌!!”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리슨이 던지는 공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속구와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가 엘리츠의 타자들을 막아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딱!!!
마린스의 타자들이 단체로 무슨 약이라도 빨았는지 1회부터 엘리츠의 선발 투수를 난타했다.
케이블과 인터넷으로 시범 경기를 지켜보던 마린스의 골수팬들이 환호했다.
“그렇지!! 이게 야구지.”
“박태경, 가자!!”
-딱!!
거기에 팀의 주전 포수이자 주장. 그리고 5번 타자인 박태경의 석 점 홈런포까지.
그렇게 1회 초 부산 마린스가 무려 7점을 득점하며 서울 엘리츠를 일찌감치 앞서기 시작했다.
경기가 이어졌다.
인성은 문제가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진짜배기임을 증명하듯 닉 해리슨이 150을 오가는 공으로 엘리츠의 타자들을 철저하게 막아냈다.
경기를 지켜보던 마린스의 팬들이 모처럼 신났다. 하지만 그들은 잊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 이 경기가 헬 꼴라시코라는 사실을.
4회 초.
스타트를 끊은 것은 유격수인 박동엽이었다.
“어? 어? 저거? 저거?”
닉 해리슨의 몰린 슬라이더를 엘리츠의 작년 타율 0.211의 9번 타자가 두들겼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평범한 내야 땅볼.
유격수인 박동엽이 가볍게 달려가 팔을 쭉 뻗어 공을 받아, 받아, 받아?
“응?”
글러브 끝을 스친 공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순간의 당황. 박동엽이 빠르게 다시 달려가 공을 주워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무사 주자 1루.
“아, 박동엽 저 새끼. 저거. 아주 어린놈이 겉멋만 들어서. 땅볼이라도 안정적으로 중심으로 받아야지. 손만 쫙 뻗어서 받으려고 저러네.”
“어휴, 괜찮아. 괜찮아. 어린놈이 의욕 앞서다 실수할 수도 있지. 다 실수하면서 크는 거 아니겠어? 정규 경기도 아니고 시범 경기인데 그냥 웃고 넘어가자고.”
“하긴, 팔대 빵인데 1루 출루 정도야 뭐.”
닉 해리슨이 박동엽을 째려봤다.
그의 더러운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동엽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Shi%!#$%”
F와 Sh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연달아 내뱉은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모자를 고쳐 썼다. 이어지는 엘리츠의 1번 타자.
닉 해리슨의 흥분 탓일까? 지금까지 존을 잘 공략하던 그의 공이 흔들렸다.
볼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파울 볼 파울 파울 파울
그리고 볼.
10구의 승부 끝에 볼넷으로 타자가 출루에 성공했다.
닉 해리슨이 마운드에 침을 내뱉었다.
노아웃 주자 1, 2루.
여전히 경기를 지켜보는 마린스의 팬들은 웃고 있었다. 주자 둘이 나갔으면 좀 어떤가. 점수가 팔대빵인데.
하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안타, 안타, 볼넷, 밀어내기 볼넷, 그리고 만루 홈런.
순식간에 점수가 8:7까지 좁혀졌다.
투수 강판.
“아, 감독 저거저거. 아주 이름을 공필승이 아니라 돌필패로 바꿔야해. 아니 투수가 흔들리는 것 같으면 진작에 교체를 했어야지.”
“그러니까. 이제 겨우 2월인데 몸도 덜 풀린 투수 3이닝만 던지고 재깍재깍 교체해줬으면 이런 일 없잖아!!”
하지만 그 뒤를 따라 올라온 불펜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특급 방화범들의 불쑈가 시작됐다.
4회에만 무려 11실점.
마린스의 팬들이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하지만 엘리츠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마린스에게 쉽게 패배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야구라고 불러야 할지, 예능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장면들이 속출했다.
평범한 파울 플라이를 놓치는 것은 기본이었고 1루 송구를 내야관중석으로 날려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보통 역전과 재역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선수는 명경기의 필수요소들이다.
하지만 거기에 엘리츠와 마린스. 그리고 실책들이 더해지면 그건 더이상 명경기가 아닌 대첩이 돼버린다.
역전에 재역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양보하는 치열한 졸전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9회 초.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유격수 박동엽이 오늘 경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잘 맞은 타구!! 2, 3루간으로!! 유격수 박동엽!! 박동엽!!]
-데구르르
박동엽의 가랑이 사이로 하얀 공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마린스와 엘리츠의 올 해 첫 헬 꼴라시코가 엘리츠의 승리로 끝났다.
***
[마린스 1점 차 아쉬운 패배!!]
[마린스 4회에만 11실점. 아쉬웠던 수비 조직력.]
[엘리츠,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이겨냈다.]
[닉 해리슨 쓴소리. ‘도저히 프로라고 믿기 힘든 수비 조직력.’]
[군필 유격수 박동엽의 호된 신고식.]
-아쉬워? 이게 대체 어디가 아쉽다는 거지? 기자야. 너 나랑 같은 경기 본 거 맞냐?-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우승? 니들은 백년이 가도 우승은 글렀어.-
-이번 경기······, 헬리츠가 승리 당했다. 그나저나 마지막에 박동엽 알까기 하는 거 나만 웃겼냐?-
-박동엽은 ㅇㅈ. 이번 경기는 박동엽이 지배했다.-
-닉 해리슨 실시간 빡침이 TV 너머로 전해지더라.-
-분명 3회 말 8:0까지만 보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순간 내가 지구 2로 넘어온 줄 알았음.-
-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2월부터 꼴린스 경기를 보고 빡이 쳐야 하는 거지?-
-우리 유격수 대체 왜 박동엽임? 백호창 이제 퇴물이라고 박동엽이 충분히 빈자리 메울 수 있다고 한 새끼 빨리 당장 튀어나와라.-
-박동엽 이 아마존같은 시베리아허스키야. 진짜 축구싶냐? 족구튼 씨름놈아!!-
-블레이즈야 니들이 사간 돈 2배로 돌려줄 테니 백호창 돌려주고 박동엽 가져가면 안 되겠냐?-
-다음 경기 박동엽 나오면 내가 사직 가서 1인 시위한다. 꼭 한다. 두 번 한다.-
종종 연예인들이 인터넷 댓글을 보다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동엽은 대체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한 것일까?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향한 수백 개의 날 선 댓글들을 보는 순간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대체 왜 거기서 그 공을 잡지 못했을까?
처음 실수야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알까기는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실수였다. 경기를 끝내고 펑고 훈련을 1시간이나 했지만 답답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죽상이야?”
“성민 선배님.”
팔꿈치 수술을 하러 가더니, 뜬금없이 너클볼을 들고 돌아와 화제의 중심에 선 남자. 성민이 동엽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왜? 악플 때문에 죽을 것 같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그거 쓰는 애들도 시간 지나면 다 까먹을 거야. 나도 2026년에 대만한테 떡실신 했을 때 악플이 아주 폭풍 같았는데 바로 나흘 뒤에 일본 상대로 6이닝 무실점하니까 그 악플들? 완전히 싹 사라지더라.”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다음 경기나 잘하라고.”
조곤조곤하게 후배를 다독이는 성민의 모습에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너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다니, 놀랍군.
‘쟤 다음 경기가 제 선발 등판 경기에요.’
-······.
그래도 자기 등판일이라고 팀원의 멘탈을 챙기는 것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 등판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꾸짖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성민의 등판일이 돌아왔다.
< 오키나와의 지배자(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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