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5화 (16/287)

< 오키나와의 지배자(1) >

“어, 그래. 사진 빨리 전송해주고.”

박희연 기자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이번 시범 경기를 앞두고 그녀는 두 개의 기사를 미리 준비해뒀다.

하나는 성민의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는 짧은 기사, 또 하나는 그의 ‘선택’에 집중하는 제법 긴 기사였다.

[새로운 위닝샷 너클볼? 부산 마린스 김성민. 시범경기 3이닝 무실점 무안타 무사사구. 완벽투!!]

-엥? 김성민이 왠 너클볼?-

-거봐, 김성민 너클볼 던졌다는 소문 돌았다니까.-

-이거 영상 볼 수 있나? 걍 체졉 던졌는데 기자가 잘못 본 거 아님?-

-본문 좀 읽자. 선수 본인이 너클볼 던졌다고 이야기했다잖아.-

-근데 대만 프로 상대로 던지고 위닝샷이니 뭐니는 좀 호들갑 아님?-

-상대 중에 호르헤 마르틴 고메즈도 있었다잖아. 작년에 대전 피닉스에서 용병으로 뛰었던 걔.-

-네 다음 퇴출 용병.-

-뭐래. 멍청이가. 걔 작년에 타율 2할 8푼에 21홈런 쳤거든? 솔직히 KBO 전체로 따지면 상위급 타자임.-

야구팬들에게 2월은 심심한 계절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선수들의 계약은 대부분 마무리 된 상태다.

또한, 2월 말 3월 초에 있는 2차 캠프의 경우 종종 인터넷을 통해 시범 경기를 중계하지만 1차 캠프의 시범 경기를 중계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경기도 없고, 선수 계약 같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도 없는 시기.

성민의 너클볼이 그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너클볼이면 전문 포수도 필요한 거 아닌가? 박태경 포구 괜찮나?-

-박태경 그 돼지가 너클볼을 받겠냐? 김성민 등판일에는 권혁준이 포수 마스크 쓴다고 하더라.-

-9푼이?-

-아니, 150던지는 파이어볼러가 너클볼은 무슨 너클볼이여. 감독이고 코치고 쟤 안 말리고 뭐한 거냐? 다들 미친 거야?-

인터넷 게시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박희연 기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꺼운 일이었다. 그가 미리 준비했던 너클볼에 관한 특집 기사들. 그리고 성민의 훈련에 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 쏟아지는 관심 속에서 가오슝의 시범 경기들이 흘러갔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빅리그에서 4점 초반대의 비슷한 성적을 기록하는 투수 A와 B가 있다. 두 사람이 AAA로 내려갔을 때 성적은 어땠을까?

투수 A는 3점 초반대의 준수한 성적을 냈다.

그리고 투수 B는 1점 초반의 성적을 기록하며 리그를 폭발시켰다.

그렇다면 투수 B가 피칭에 눈을 뜨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가.

이듬해 두 선수는 빅리그에서 또다시 4점 초반대의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다.

상위 리그에서 준수한 성적을 내는 투수는 보통 하위 리그에서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 하지만 하위 리그를 폭격하느냐 마느냐는 상위리그의 성적만으로 예측할 수 없다.

주로 양민학살용 선수일수록 하위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는 법이다.

그리고 본래의 성민은 선수 A에 가까웠다.

대단한 선수에게 놀라운 성적을 내지만, 뜻밖의 선수에게 불의의 뜬금포를 얻어맞는다. 마치 지난 2026년 대만전에서 폭망하고 일본전을 6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냈던 것처럼.

성민의 피칭에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과거에는 그 자신감이 종종 자신보다 수준 낮은 상대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하는 방심으로 발전하곤 했다.

하지만 필 니크로와 함께하는 지금은 달랐다.

24시간 끊이지 않는 그의 잔소리가 성민의 자신감이 방심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았다.

-야, 똑바로 안 하냐?

“아니, 매일매일 이렇게 쉬는 시간까지 야구만 하고 살면 대체 인생은 언제 삽니까?”

-성민아. 잘하는 놈이랑 못하는 놈이 똑같이 연습하고 똑같이 쉬면 누가 더 잘하겠냐?

“아니,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결국 한계를 넘어서서 뚝하고.”

-그래 보통 선수라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넌 내가 있잖니. 그 뚝하는 건 내가 알아서 컨트롤 해줄 테니까 넌 죽어라 열심히만 하렴. 뚝 같은 소리 작작 하고.

리그의 평균적인 수준을 벗어나는 빠른 공과 리그의 평균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나는 느린 공.

만약 이 두 가지 공만 존의 안팎으로 집어 넣을 능력이 있다면 그 투수는 리그 정상급의 투수가 될 수 있다.

성민의 속구와 너클볼은 명백히 대만프로야구의 수준을 넘어선 공이었다.

게다가 그의 너클볼은 평범하게 느린 공이 아니었다. 주야장천 너클볼만 던진다고 해도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대만프로야구선수 가운데 제대로 공략할 수 있는 선수의 수는 두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거기에 150에 가까운 속구가 더해졌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시범 경기.

성민이 대만의 프로들을 상대로 ‘압도적’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물론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님, 이거 좀 힘들겠는데요?”

“태경아.”

“아니, 제가 어지간하면 해보겠는데, 존에 오는 공이야 어찌어찌 몸을 던져 막는다고 해도 존 밖으로 빠지는 공은 감도 안 잡힙니다. 솔직히 저도 어디 가서 미트질 딸린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이건 저 공을 잡아내는 혁준이가 괴물인 거에요.”

마린스의 주전 포수 박태경이 혀를 내둘렀다.

그가 성민과 호흡을 맞춘 경기에서 나온 포일만 무려 네 개. 자칫하면 안타 하나 없이 점수를 내줄 뻔했다.

“요령이요? 으음, 이게 받는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막는다는 느낌으로? 사실 저도 손가락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전히 제대로 받는 건 아니에요.”

성민의 전담포수나 다름없는 권혁준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들어 올린 멍투성이의 왼손은 크게 화제가 됐다.

“야, 이거 써.”

“성민 선배. 이런 거 굳이 안 주셔도 되는데.”

“내가 주는 거 아니야. 우리 권 여사가 네 사진 보고 보낸 연고야. 멍 빠지는 데 좋은 거라고 그러더라. 혹시나 해서 코치님한테도 물어봤는데, 문제 되는 연고는 아니래. 그리고 고생한다고 나중에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

“어휴, 고생은요. 감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죠. 저희 부모님도 제가 단독으로 인터뷰했다고 너무 좋아하셨어요.”

프로의 세계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1군에 오르는 일이고,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1군에서 이름을 알리는 일이다.

지난 3년 동안 1군에서 71경기나 출장했지만 마린스의 골수팬이 아니라면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나마 마린스의 팬들도 그를 이름보다는 9푼이, 혹은 ‘그 포수’ 정도로 기억하는 실정이었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다.

프로로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했다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성민의 너클볼을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포수라는 것으로나마 이름을 알린다는 것 자체가 혁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언론이 화제를 만들었지만, 이후로는 커다랗게 부푼 화제가 언론을 불러왔다.

150km/h를 던지던 투수.

2026년 아시안게임의 영웅.

팔꿈치 수술을 끝내고 돌아온 투수.

FA를 1년 앞두고 너클볼이라는 KBO 역사에 없던 공을 선택한 괴짜.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대만의 프로에 불과했다지만 압도적인 성적까지.

심심한 야구팬들의 시선이 가오슝으로 몰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민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그 시선들이 보란 듯 압도적인 피칭을 이어갔다.

[압도적!! 김성민 4이닝 1피안타 무실점!!]

[3할 7푼 타자를 상대로 2타석 연속 삼진!!]

[춤추는 공, 너클볼의 비밀은?]

[린 즈펑 ‘그 투수의 공은 도저히 어떻게 손대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가오슝에서 3주.

성민은 4경기 14이닝 무실점 23삼진을 거뒀다. 1차 전지훈련을 하던 모든 투수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적이었다.

“우리 진짜 올해는 일 내는 거 아니야?”

“미리부터 너무 설레발치지 마. 언제 우리 꼴린스가 겨울에 최강 아니었던 적 있었어?”

“그야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작년에는 준플옵도 갔고 그때도 쓸만한 투수 하나만 더 있었으면 솔직히 우승도 노려볼 만했잖아.”

“야, 너 지금 김성민이 말하는 거야? 걔 이제 꼴랑 대만 상대로 던졌어. 대만 애들 평균 수준은 2군 급이고. 솔직히 2군에서 여포 짓 하는 투수가 어디 하나둘이냐?”

“아무리 2군이라고 해도 대만에서 14이닝 동안 삼진만 23개를 잡았어. 2군 여포가 널렸다지만 그만큼 하는 애가 어딨냐?”

물론 그 상대가 고작 대만의 프로였기에 여전히 성민의 실력에 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이 많았다.

과거의 사례들을 살펴보더라도 2군을 학살하는 것은 1군에서 성공할 확률을 높여줄 뿐, 성공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 됐고 오만 원 빵 함 갈까?”

“콜.”

“그러면 정규 시즌까지는 너무 멀고, 다음 시범 경기 오케이?”

“시범 경기? 네가 대만 애들이랑 하는 경기는 의미 없다며. 그걸로 내기가 되겠어?”

“멍청아. 대만에서 하는 전지훈련은 오늘로 끝이잖아.”

2월 23일.

부산 마린스의 대만 가오슝 일정이 끝났다.

물론 그것이 시범 경기 일정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키나와 스프링 캠프.

일명 오키나와 리그.

KBO의 여덟 개 구단과 NPB 소속 여덟 개 구단이 치르는 일종의 비공식 리그다. 한 때 NPB와 KBO가 정식 리그화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한일간의 특수성 때문에 무산됐다.

하지만 정식 리그가 아닐 뿐, 거의 전 경기를 케이블, 혹은 인터넷을 통해 중계하며 인기팀들 간의 시범 경기 같은 경우 표값만 7만 원을 상회하는 인기를 자랑했다.

가오슝에서 열린 1차 전지훈련과 달리 용병들까지 빠짐없이 오키나와에 모였다.

여기서부터는 1군 선수들의 눈빛 역시 달라졌다.

가오슝에서의 경기가 그들에게는 단순히 몸을 푸는 예열이었다면 오키나와에서 벌어지는 한일전은 본인들의 이름이 달린 진짜 경기였다.

특히 한국팀이 아닌 일본팀과의 시범 경기 같은 경우 실책은 곧 매국노가 되는 지름길이다.

“어우, 저 개놈 새끼.”

투수조의 최고참 진명규가 침을 내뱉었다.

“형님, 참아요.”

“참기는, 너도 봤잖아. 저 새끼 몸 관리 하나도 안 하고 기어 온 거. 그래놓고 뭐? 언제든지 던질 수 있다고? 그러다 또 공 10개 던지고 컨디션 안 좋다고 슥 빠져서 우리만 개고생시키겠지. 아주 주둥이를 강판에 갈아버릴라.”

마린스의 용병 투수인 닉 해리슨은 대단한 실력의 투수였다. 최고 159km/h의 속구와 148km/h의 슬라이더. 그리고 132km/h의 낙차 큰 커브까지. 작년 마린스가 준플레이오프까지 간 데는 그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이봐, 해리슨. 분명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에 체중 98kg 맞춰 오기로 약속했잖아.”

“겨울이라 추워서 좀 껴입어서 쪄 보이는 거야. 홀딱 벗고 재면 거의 98이라고.”

하지만 아쉽게도 인성은 그 실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덕분에 구단에서도 마지막까지 그와의 재계약을 망설였지만 뛰어난 성적. 그리고 SNS를 통한 뛰어난 언플로 인한 여론이 그와의 재계약을 부추겼다.

1년 140만 달러.

닉 해리슨이 연습용 불펜에서 대기하던 성민에게 말을 걸었다.

“오우, 처음 보는 투수네. 이봐, 너 내가 내일 선발인 거 알고 있지? 여기 내가 먼저 좀 쓰자. 영어는 알아듣지? 못 알아듣나? 나 내일 선발. 연습장 내가 먼저 쓴다. 오케이?”

그는 성민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성민은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용병 놈.

또한, 영어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구글 번역기가 부럽지 않을 영어 번역기가 함께였다.

성민이 그에게 답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한국에 왔으면 한국 룰을 따르는 거다. 응? 여긴 새꺄. 연습도 짬밥 순 오케이?.”

< 오키나와의 지배자(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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