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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14화 (15/287)

< 이유 있는 자신감(2) >

웨이치엔 드래곤스와 부산 마린스의 시범경기.

마이크 도미니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뻐엉!!

포구음이 우렁찼다.

이제 2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151km/h의 강속구가 미트를 꿰뚫었다.

“허, 저 녀석 상당한데?”

“KBO 팀들도 눈여겨봤던 녀석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구도 너무 들쭉날쭉하고, 워크에씩이 영 엉망이라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마이크 도미니가 힐끔 부산 마린스의 덕아웃을 살폈다.

메이저를 뛸 수준이 안되는 용병들에게 NPB와 KBO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다. 게다가 제도상의 허점으로 인해 1년 차 외국인 용병만으로 한정할 때는 리그의 수준이 낮은 KBO쪽이 오히려 NPB보다 평균 연봉이 더 높은 말도 안 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무엇보다 KBO와 대만프로야구의 차이는 시설이다.

마이크 도미니가 현재 받는 30만 달러라는 연봉도 연봉이지만, 숙소, 경기장, 기타 인프라에서 한국과 대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차이가 난다.

당장 원정을 나가게 되면 한국으로 치면 여인숙 급의 모텔에서 짐을 푸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떻게든 KBO 관계자에게 눈도장을 찍고 진출할 수만 있다면 신세가 쫙 펴지는 셈이니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관계로 마이크 도미니는 오늘 경기를 정규 시즌보다 훨씬 열심히 준비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린스의 타자들이 줄줄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호, 슬라이더도 각이 아주 좋아.”

“메이저 쪽 스카우트 평가에 의하면 50점짜리 슬라이더랍니다.”

“허, 빅리그에 통할만 한 공이라는 건가? 그런데 저런 녀석이 왜 대만에서 이러고 있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구가 좀 불안한 점이······. 그리고 마이너 있을 때 팀에서 사고도 좀 일으켰었답니다.”

“사고?”

“네, 훈련에도 종종 지각했고 결정적으로 팀원들과 어울리지를 못했답니다.”

여러 가지 안 좋은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동할 만큼 좋은 공들이었다. 지금과 같은 모습만 꾸준히 보여줄 수 있다면 KBO에서도 충분히 1, 2선발을 다툴만하다.

“그래도 일단 스카우트들한테 이야기해서 좀 지켜보라고 해두자고. 미래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성민이는 오늘이 첫 실전이지?”

“네. 하지만 워낙 단순한 데다가, 배짱 하나는 두둑한 녀석이라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 우리가 제 녀석 때문에 로스터 짠다고 얼마나 개고생 중인 줄 안다면 당연히 잘 해야지.”

성민은 최근 코치진 사이에서 가장 핫한 투수였다.

너클볼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코치들부터 설사 너클볼을 믿는다 치더라도 포수를 어떤 식으로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용철이를 쓸 것인가, 혁준이를 쓸 것인가.

용철이를 쓴다면 태경이가 너클볼을 받아줘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 것인가.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셋 다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고, 용철이를 일루수와 포수 대타를 소화하는 유틸리티로 사용하자는 의견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했다.

일단 결론은 이번 시범 경기들을 통해 다양한 형태를 시험해보자는 결론이 났다.

오늘 포수 마스크를 쓴 것은 권혁준.

그나마 성민의 공을 가장 잘 받는 포수였다.

웨이치엔 드래곤스의 선두 타자가 타석에 섰다.

KBO 팀을 이기는 것은 웨이치엔 드래곤스에게는 매우 좋은 홍보 거리다.

1군과 2군 선수들을 적당히 섞어 전체적인 감각을 끌어올리려는 마린스와 달리 웨이치엔 드래곤스의 라인업은 그들의 베스트 라인업에 가까웠다.

-저 녀석 기억하지?

‘진 즈창. 작년 타율 3할 4푼. 약한 코스는 바깥쪽 높은 코스. 약점은 커리어 홈런이 다섯 개밖에 안될 만큼 약한 똑딱이라는 점. 장점은 그걸 만회할 만큼 빠른 발.’

-그렇다면 대응은?

‘그거야 뻔하죠.’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내가 던질 수 있는 제일 좋은 공을 자신 있게 던지기.’

-이 멍청이가?

한복판을 파고드는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진 즈창의 방망이가 춤을 췄다.

‘방금 뭐라고요?’

-끄응.

웨이치엔 드래곤스의 덕아웃이 웅성거렸다.

“야, 저거 뭐야?”

“체인지업? 체인지업인가?”

“아니, 체인지업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했는데?”

두 번째 성민의 공이 또 한 번 존을 파고들었다.

-부웅!!

“스트라잌!!”

타석에서 잠시 물러난 진 즈창이 헬멧을 벗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했다. 150이 넘는 빠른 공을 경험해본 적은 많았다. 폭포수 같은 커브도, 날카로운 슬라이더도, 일본 투수가 던지는 포크볼도 경험해봤다.

하지만 이런 공은 난생처음이다.

날아오는 과정에서 두 번을 움직이는 공이라니. 심지어 처음 공과 두 번째 공이 보여주는 움직임 자체가 달랐다.

‘너클볼?’

물론 진 즈창 역시 너클볼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해본 너클볼은 절대 이런 더러운 마구가 아니었다. 그가 경험한 너클볼은 체인지업과 유사한, 하지만 그것보다 움직임은 조금 더러운 그런 변화구였다.

헬멧을 다시 뒤집어쓰고 타석에 섰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130이 채 되지 않는 속도의 공이다. 끝까지 공을 살펴보고 그냥 방망이에 공을 가져다 댄다는 각오로 휘두르면 건드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쟤들도 여기 잔디에 익숙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야.’

이렇게 된 이상 가오슝 국경칭푸구장의 인조 잔디. 그리고 2군이 대부분인 부산 마린스의 내야진과 진 즈창 자신의 빠른 발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성민의 너클볼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은 그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물론 성민이 이번에도 존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더라면 그의 착각은 현실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치려는 의욕이 만발한 타자를 상대로 굳이 존 복판에 공을 집어넣어 줄 필요는 없다.

필 니크로가 새삼 감탄했다.

그가 생각할 때 너클볼을 실전에서 사용할 최소한의 조건은, 원할 때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가 없는가다. 그리고 성민은 벌써 그 최소한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몸에 감각을 새겨넣었다고 하지만, 그 감각을 체화하여 실전에서 쫄지 않고 써먹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나쁘지 않군.

하지만 칭찬을 아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 녀석은 칭찬을 해주면 아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가 높아지는 녀석이다. 기를 좀 죽여둘 필요가 있었다.

‘어휴, 싸부님. 그냥 잘했다고 따봉 하나 주세요. 속으로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시면서 무뚝뚝한 척하시기는.’

물론 통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필 니크로가 성민을 파악한 만큼 성민 역시 필 니크로를 파악했다.

-하여간, 네 놈은 언제나 그 입이 말썽이야. 사나이라면 모름지기 진중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싸부, 이제 그런 구닥다리는 안 통해요. 요즘은 저 같은 남자가 먹어주는 시대라고요. 지금 21세기입니다.’

-제자야. 애인도 없는 네가 하는 말이라 설득력이 매우 부족하구나. 게다가 21세기가 아니라 23세기가 되도 변하지 않는 미덕은 존재하는 법이야.

‘아니, 전 못 사귀는 게 아니라!!’

-다음 타자 올라온다.

성민의 항변을 필 니크로가 날카롭게 끊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상대 타자의 등장에 성민의 눈빛이 변했다.

성민이 헐렁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프로에서 10년을 생존한 투수다. 더 높은 수준을 바라는 필 니크로에게는 썩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선은 존재했다.

그가 가진 최소한의 선은 최소한 경기장, 마운드 위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연달아 터져나오는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웨이치엔 드래곤스의 2번 타자가 허무하게 삼진으로 물러났다.

앞서 대기 타석에서 공을 지켜봤음에도 어떻게 쳐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건 태어나 처음 경험해보는 ‘진짜배기 너클볼’이다.

그리고 타석에 오늘 웨이치엔 드래곤스에서 유일하게 주의해야 할 3번 타자가 들어왔다.

“잘 찍고 있지?”

“당연하죠. 이번 타석이 오늘 경기 하이라이트 아닙니까.”

마린스의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 대의 카메라가 성민에게 집중됐다.

타석에 선 남자는 호르헤 마르틴 고메즈. 36세.

그는 7경기 11타석에 불과하지만 빅리그 경험까지 있는 타자였다.

자신의 재능이 메이저에서 성공할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27세에 NPB로 건너가 7년을 뛰었다. 작년에는 KBO에서도 1년을 뛰었지만, 노쇠화가 워낙 뚜렷했던 탓에 재계약 제의를 받지 못했고, 올해 결국 대만까지 밀려왔다.

하지만 KBO에서 재계약 제의를 받지 못했다고 그의 수준이 KBO 미만이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애초에 용병 슬롯은 한정적이고, 그렇기에 KBO 팀들이 바라는 용병의 수준은 포지션의 골드글러브를 노려볼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은 보수적으로 잡는다고 해도 KBO의 평균 이상.

게다가 멕시코 리그부터 빅리그를 거쳐 NPB와 KBO까지. 프로 경력만 근 16년이다. 전성기보다 운동능력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라틴 특유의 순발력은 남아있다.

호르헤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까다로운 공이야.’

NPB 시절 당시 너클볼을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비록 1년 반짝하고 사라지긴 했지만, 그 반짝할 당시의 오카다는 대단한 투수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오카다가 13승을 하던 당시 호르헤는 그를 상대로 14타석 11타수 5안타. 0.455/0.571/0.636을 기록했었다.

지금까지 KBO에서 뛰고, 재계약에 실패하여 대만에서 뛰게 된 용병 가운데 시즌 중반에 다시 KBO로 불려간 용병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호르헤 자신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필 니크로가 성민을 살폈다.

단단한 표정. 그의 심장 역시 그 표정에 어울리게 고요했다.

강한 상대를 만났음에도 흥분하지 않는다. 반면 그의 뇌는 지금까지 그가 봤던 것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문득 바로 어제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대충 쓰는 거야?

“안 써도 되니까요.”

-무슨 소리야. 딱 봐도 이 녀석이 제일 위험한 놈인데.

“작년에 KBO에서 뛴 녀석이잖아요. 성적도 좋았고. 이런 위험한 녀석은 이미 머릿속에 다 있어요.”

성민은 영화나 소설의 악당 두목들처럼,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방심하다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고 침몰하는 머저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인정할만하다고 느끼는 상대에게는 절대 여유를 부리지 않는다.

마운드의 성민이 공을 움켜쥐었다.

초구. 몸쪽 깊숙한 높은 코스 빠른 공. 147km/h의 속구가 존을 공략했다.

-뻐엉!!!

“스트라잌!!”

생각지도 못한 빠른 공에 너클볼을 기다리던 호르헤의 방망이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하기 직전 호르헤 마르틴 고메즈가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했다.

너클볼만 보자면 긁혔던 날의 오카다 쪽이 더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성민에게는 오카다에게 없는 140 후반대의 강속구가 존재한다.

성민은 오카다보다 어려운 투수다. 그리고 호르헤 자신은 이전만 못 하다.

그렇다면 한가지 타이밍만을 노리는 수밖에.

그가 다시 헬멧을 뒤집어쓰고 타석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148km/h의 빠른 공이 존을 스쳤다. 너클볼을 노리던 호르헤의 방망이가 늦었다.

-부웅

“스트라잌!!!”

이 구 연속 빠른 공.

심지어 코스까지 같았다.

성민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어지간한 필 니크로도 혀를 내둘렀다.

-정말 배짱 하나는 대단하네. 같은 공 두 개를 같은 코스로 집어넣어?

‘실투에요.’

-응?

‘바깥쪽 낮은 코스로 넣고 싶었는데 좀 미끄러졌어요.’

그러고 보니 고요하던 심장이 조금은 빨라졌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실투를 던지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담대함이라니.

그리고 세 번째.

성민의 공이 날아올랐다.

‘온다!!’

너클볼이다.

마지막까지 공을 지켜보고, 적당한 존을 설정하고 냅다 방망이를 휘두른다. 운이 좋다면 장타, 그게 아니라도 호르헤 자신의 발이라면 일단 맞는다면 5할 이상의 확률로 안타는 가능하다.

바깥으로 빠져나갈 것 같던 공이 몸쪽으로 움찔했다.

호르헤의 방망이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결과는 헛스윙.

‘미친, 거기서 마지막에 또 떨어진다고?’

회전수 1.8회.

그것은 앞서 대만의 타자들을 상대로 보여줬던 너클볼보다 2배쯤 완성도 높은 공이었다.

-연습 때도 못 던지던 공을 이렇게 던진다고?

그리고 동시에 지금까지 성민이 던졌던 모든 너클볼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공이기도 했다.

< 이유 있는 자신감(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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