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3화 (14/287)

< 이유 있는 자신감(1) >

['올해는 가을야구를 넘어 우승까지 노린다.' 마린스, 30일부터 전지훈련 돌입!]

-작년 13년 만의 준플레이오프를 경험했던 프로야구 부산 마린스.

마지막 우승이었던 1992년 이후 이제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마린스의 마지막 우승을 봤을 때 국민 학생이었던 분들이 이제는 환갑을 앞둔 나이가 됐는데요.

프로야구팀들 가운데서 21세기에 유일하게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팀이기도 한 부산 마린스가 올해는 그 불명예를 씻기 위해 어느 해보다 굵은 땀방울을 쏟고 있습니다.

현장의 고영식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고영식 기자?”

“네, 고영식 기자입니다. 지금 저는 부산 마린스의 1차 전지 훈련장인 대만 가오슝의 국경칭푸야구장에 와있는데요. 이번 시즌 마린스의 주장을 맡은 박태경 선수를 모셨습니다.”

“작년 아쉽게 준플레이오프에서 떨어졌는데, 올해는 전력도 보강됐고, 꼭 우승까지 가 볼 생각입니다.”

“전력 보강이라면?”

“작년에 부상으로 빠졌던 성민이도 돌아왔고요. 전역한 애들도 전반적으로 괜찮고. 전체적으로 뎁스가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작년의 준플레이오프 진출을 넘어 우승을 꼭 차지하겠다는 부산 마린스의 각오입니다. 작년 리그 4위에 빛났던 공격에 이어 취약점으로 거론됐던 투수진 역시 든든하게 보강했습니다. 변수라면 FA로 팀을 떠난 골글급 유격수인 배정현 선수의 빈 자리인데요. 하지만 공필승 감독은 짜임새 있는 야구로 마린스가 우승권 전력임을 자신했습니다.-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마린스는 40년 만의 우승, 그리고 최초의 단일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할 수 있을까요? 귀추가 주목됩니다.-

<이놈의 ‘올해는 다르다 시리즈’는 어떻게 변하지를 않냐.>

<작년에 준플옵 간 거 자체가 뽀록이었는데 우승은 무슨. 난 이제 꼴린스한테는 기대도 안 한다.>

<닉 해리슨 재계약 완전 개꿀. 솔직히 작년 성적보면 꼴랑 140만 달러에 재계약 할만한 클래스가 아닌데.>

<그야 이면계약으로 뒷돈을 찔러줬겠지.>

<내가 부산 은행 마린스 가을야구 가자 정기예금 특판에 37년째 돈 넣고 있는데 올해는 꼭 마지막 0.1% 우대금리까지 타고 싶다.>

<쯧쯧, 저거 완전 흑우 아님? 같은 금융사기를 37년이나 당하다니. 어? 근데 왜 우리 집에 같은 통장이 40개나 있는 거지?>

마린스의 1차 전지훈련장소는 작년 겨울 마무리캠프가 열렸던 대만의 가오슝이었다.

장소는 같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물론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1군에서 시작하는 것이 확정적인 몇몇에 불과했다.

전체 인원의 7할가량은 1군 자리 자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들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실력이라면 열심히 하는 선수, 혹은 자기 마음에 드는 선수를 선호하는 것이 당연하다.

1군과 2군에 걸쳐있는 선수들은 어떻게든 감독, 혹은 코치들의 눈에 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했다.

또한, 다른 것은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내일 웨이취엔 드래곤스 선발이 마이크 도미니라던데?”

“아니, 걘 무슨 용병이 2월 중순부터 뛰고 있어? 원래 미국 애들은 3월이 다 돼서 느긋하게 오는 거 아니야?”

“미국이 아니라 도미니카 애잖아. 나름대로 헝그리 정신이 있는 애라고.”

“걔 구속이 157까지 나온다고 했었나?”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아직 2월 중순이라 몸이 안 올라왔을 테니 거기까진 안 나올 거야.”

“그래도 150은 나올 거 아니야. 거기다가 첸졉도 꽤 던진다며. 아우, 그제 왕 하오란이 선발일 땐 어쩌고, 하필 용병 에이스가 선발일 때 출장이네.”

마무리캠프의 자체 청백전과 비교하자면 연습경기에 임하는 자세 자체가 달랐다.

청백전의 경우 대부분 언론에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대만 프로팀과의 시범 경기는 한국과 대만 양쪽 언론이 모두 모여들었다.

한국에 비하면 작은 나라라고 하지만, 대만 역시 2,700만의 인구를 가진 제법 큰 나라다. 게다가 대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프로야구였다.

물론 대만의 프로팀들은 KBO 프로팀에 비하자면 한 수 아래의 상대였지만 그렇기에 그들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 손해라는 부담감이 존재했다.

만에 하나라도 패배한다면 그날 대만의 스포츠 섹션 1면은 온통 그들의 패배로 가득할 것이다.

게다가 웨이취엔 드래곤스는 재작년 대만리그의 1위, 그리고 작년의 준우승팀이었다. 그곳의 용병 에이스라면 KBO를 기준으로도 중간은 가는 투수다.

“우리 선발은 누구래?”

“성민 선배라던데?”

“엥? 성민 선배? 그 선배 선발 그만둔 지 꽤 됐잖아. 거기다가 팔꿈치 나가서 수술받고 복귀 첫 해잖아. 근데 갑자기 선발을?”

“전지훈련 선발인데 뭐 얼마나 맡기겠냐. 그냥 그 선배 짬 생각하면 먼저 던지고 쉬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 이번에 너클볼 때문에 선발 전환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너클볼? 그딴 걸 진짜 던진다고? 그 선배 팔꿈치 완전 괜찮아져서 얼마 전에 148까지도 던지지 않았어? 그 정도면 나라면 그런 모험 하느니 그냥 하던 거 하겠는데. 그 선배 당장 내년에 FA잖아. 모험은 일단 돈 땡기고 해도 안 늦을 텐데.”

“어휴, 지금 우리가 그 선배 걱정할 때냐? 우린 그 선배 2차 FA 나올 나이까지 뛰어도 FA 한 번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처지잖아. 우리 일이나 신경 쓰자.”

그리고 그렇게 자기 할 일 하기에 벅찬 야수 대부분에게 성민의 너클볼은 그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하지만 1군과 2군의 경계에 선 투수들에게는 조금 달랐다.

누군가가 1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2군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 엄혹한 생존 경쟁 속에서 150을 던지는 투수의 너클볼러 전환은 눈총을 사기에 충분한 이슈였다.

“성일 형, 들었어요? 성민이 걔 진짜 너클볼 던지겠대요. 미친놈이, 야구판이 무슨 지 놀이터인 줄 아나.”

“왜? 역시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고 너클볼도 곧잘 던지드만.”

“그래봤자 너클볼이죠. 그거 안정성이 엄청나게 떨어지잖아요. 150 던질 줄 아는 새끼가 그거 던질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냥 관심병이랑 겉멋이지.”

“그래서, 나쁠 건 없잖아.”

“아, 형, 왜 자꾸 성민이 편을 들어요. 형도 걔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솔직히 걔 때문에 제일 크게 피해 볼 건 형님 아니요.”

박성일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편을 들기는, 무슨 편을 들었다고 그래. 애들도 아니고. 그냥 뭐, 성민이가 자기의 새로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걸 응원해줄 뿐이지.”

자리는 한정적이다.

성일의 올해 연봉은 7,700만 원. 그나마도 작년 1군에서 47경기 4.3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크게 오른 금액이었다.

“그래, 그냥 이대로 응원을 하면 될 거야.”

프로야구 역사 반백 년.

그 속에 너클볼의 구사가 전체의 7할을 넘어가는 진짜 너클볼러는 0명이었다.

최고 140을 던지는 안정감 있는 34세의 불펜 투수 박성일이 성민의 도전을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였다.

***

-너 제대로 공부 안 하냐? 첫 실전이 내일인데?

“공부는 무슨 공붑니까. 이게 무슨 실전씩이나 된다고. 대만 애들 말이 프로지, 우리 2군만도 못한 애들이 대부분이에요.”

-쟤들 그래도 재작년 우승에 작년은 준우승까지 했던 애들이라잖아. 너 그렇게 방심하다가 훅 가는 수가 있어.

“에이, 대만 애들 승부 조작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우승이니 준우승이니 해도 어차피 그게 그거에요.”

성민이 몸을 쭉 펼쳤다.

눈에 MRI를 달고 다니는 필 니크로의 조언 아래 매일매일 한계에 가깝게 단련한 몸은 단단하고 또 유연했다.

하지만 야구라는 것이 그 단단한 육체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쩌다 국제 대회에서 일본 애들은 탈탈 털고, 대만 애들한테는 탈탈 털렸는지 알겠다.

“아니, 그거 무슨 인제 와서 6년 전 이야기를 꺼내고 그러십니까. 그거 그냥 컨디션 문제였거든요?”

-네 유일한 자랑거리도 그 6년 전 스토리거든?

성민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이 멍청한 자식아. 그래, 자신감을 갖는 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상대를 무시는 하지 말아야지. 야구공은 둥글고 단기전에서 승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그야 그렇죠. 근데 뭐 공부를 한다고 해봤자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운드에 올라서 너클볼 던지는 것밖에 없잖아요.”

-너클볼러라고 어디 100% 너클볼만 던지냐? 네가 지금 그럴 깜냥이나 되고? 그리고 설사 너클볼만 던진다고 하더라도 상대 타자의 약한 코스, 버릇 같은 건 숙지를 해둬야지.

“아, 진짜 대만 애들 별거 아닌데.”

-너 그러다 10kg 증량한 보람이랑 결혼한다.

성민이 보람이라는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거 무슨 악담을 해도 그런 악담을 합니까.”

-이게 악담 같냐? 아니면 네 미래 같냐? 네가 그렇게 무시하는 대만 애들한테 탈탈 털리면 감독이 어이구, 우리 김 선수 너클볼은 가끔가다 그렇게 털리는 날도 있지요. 하고 우쭈쭈 해줄 것 같냐? 아니면 짐 싸서 상동으로 내려보낼 것 같냐?

“우리 2군 구장이 상동인 건 또 언제 조사를 하셨대.”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자료나 머리에 새겨. 머리가 나빠서 못 외우겠으면 요약해서 수첩에라도 적어. 등판하기 전 그때그때 읽고 올라가면 되니까.

보람이라는 이름이 세기는 셌다.

성민이 투덜거리며 웨이취엔 드래곤스 타자들의 정보를 요약하기 시작했다. 필 니크로가 그것을 도왔다.

사실 고교야구, 그리고 KBO에서 150 중반에 존에 꽂아 넣을 수 있는 속구와 140 중반의 훌륭한 슬라이더는 치트키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성민에게 야구는 항상 쉬운 일이었고 따라서 그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최근 몇 년의 부진으로 조금 쭈글해지기는 했지만, 필 니크로와 너클볼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손에 넣었기에 그 쭈글함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졌다.

기본적으로 투수에게 자신감이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넘치는 자신감은 종종 자만심으로 변질해버린다.

물론 대만은 분명 한 수 아래의 상대였다.

필 니크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의 성민이라면 본인의 이야기처럼 공부 따위 필요 없이 손쉽게 눌러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내일 경기의 승패가 아닌,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였다.

만 28세에 처음 풀 타임 선발 생활을 시작해 만 48세까지 무려 21년을 빅리거로 뛰었던 필 니크로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도저히 실패할 수 없을 것 같던 압도적인 재능조차 1년 만에 망가질 때가 있었다.

대체 저런 재능으로 어떻게 이 바닥에 붙어 있을까 싶던 녀석이 올스타까지 올라가는 일도 있었다.

재능과 행운은 중요하다.

하지만 프로정신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 프로정신이라는 것은 이런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필 니크로가 그에게 그런 사소한 습관들을 박아넣기 위해 애썼다.

-아니, 누가 그렇게 그냥 옮겨 적으래? 생각이라는 걸 하면서 네가 어떻게 할지를 이미지 해야 할 거 아니야.

“생각 충분히 하고 적고 있거든요?”

-스톱, 스톱. 야. 너 그거 지금 설마 암호문이야?

“세종대왕님이 만드신 한글이라는 문자거든요.”

-너 그거 읽어봐. 아니 대체 글씨를 어떻게 쓰면 저승 번역기로도 번역이 안 되게 쓰는 거야? 넌 네 글씨 읽을 수 있긴 한 거냐?

물론 28년을 해온 습관을 단번에 고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이 누군가에게 들러붙는 일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하물며 성민은 본성이 글러먹었다기 보다는 그저 철이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덜 들었을 뿐이다.

필 니크로가 충분히 좋은 길로 이끌 수 있는 애송이다.

성민의 수첩이 암호인지 한글인지 알 수 없는 괴발개발의 문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이유 있는 자신감(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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