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2화 (13/287)

< 목표(2) >

-피지컬이 아주 훌륭해 보인다. 저 정도면 40홈런도 너끈히 가능하겠군.

선수 평가가 아니었다.

필 니크로가 성민의 맞선 상대를 보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막말하시는 거 아닙니까.’

-2세를 생각한다면 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저 처자는 아주 훌륭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어. 대단한 아이가 나올꺼다.

‘남의 인생을 유전자 단위에서 결정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필 니크로의 말처럼 박보람 양은 매우 듬직했다.

사진으로 볼 때도 듬직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듬직함조차 포토샵으로 많이 줄인 듬직함이었다는 사실이 성민을 슬프게 했다.

“그러면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슬픔은 슬픔. 어쨌거나 어머니가 해준 맞선이다.

성민은 만남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민의 최선은 그리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 했다.

-짝!!

이번에도 역시 성민의 등짝에 권 여사의 스파이크가 작렬했다.

“이놈 새끼야. 내가 아주 못 산다. 못 살아.”

“아, 못 살긴 뭘 또 못 산다는 거야. 소개팅 잘 갔다 왔잖아.”

“잘? 자알? 너 보람이한테 연락한다고 하고 헤어져서 뭐 어떻게 했어.”

“어쩌기는 뭘 어째. 연락했지.”

분명 연락을 하기는 했다.

“지금 ‘초콜렛뱅크 3333-14-6784*3 김성민. 183,750원 입금 부탁드립니다.’라고 한 걸 연락이라고 하는 거야? 대체 오십원은 뭐야. 오십원은!!”

“아니 요즘은 소개팅도 꼼꼼한 더치페이가 기본이라고. 그리고 솔직히 둘이서 밥 한 끼에 37만원 나온 건 좀 심하잖아.”

그게 음식값을 청구하는 연락이긴 했지만.

“어이고. 내 신세야.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놈이 장가가기 싫다고 이리 난장을 부리니. 내가 살 수가 없네. 살 수가 없어.”

“아, 누가 장가가 가기 싫대? 근데 올해는 진짜 중요한 해라니까.”

“아들.”

“아, 왜 또. 왜 뭐. 왜 갑자기 또 다정하게 부르는데.”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그리고 야구 선수 엄마 20년이면 어지간한 에이전트 뺨을 후려치는 법이다.

“FA 등급제 시작된 이후로 35세 미만 선수 가운데 C급 FA 최고액이 얼마였는지 알고 있니?”

“······.”

“4년 21억이야. 4년 21억. 그나마도 FA 당 해에 성적이 폭발해서 4년 21억이었지.”

“난 다르거든? 왜 아들 기를 죽이고 그래!!”

“넌 기가 좀 죽을 필요가 있어. 보람이 봐라. 애가 얼마나 참하냐. 거기다 TK화학이 보통 회사야? 뉴스에도 매번 나오는 큰 회사잖아. 거기다가 애가 튼튼한 것이 얼마나 좋냐.”

권 여사의 말에 필 니크로가 동의했다.

-확실히 튼튼해보이기는 했다. 기골이 장대한 것이 40홈런은 너끈해보였어. 어머니가 3세를 엘리트 선수로 키우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 같군.

‘아, 쫌. 안 그래도 정신 사나운데 조용히 좀 계세요.’

“네가 여리여리한 여시같은 계집애 좋아하는 거 나도 안다. 아주, 제 짝찌 보는 눈은 이 엄마를 꼭 닮았어. 그런데 이 엄마를 좀 봐라. 결국, 그런 거 다 소용없어. 짝꿍은 그저 튼튼하게 오래 사는 게 제일이야.”

“엄마, 나 스물여덟이거든. 그거 이제 안 통하거든. 그리고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라 뚱뚱한 애들이 더 일찍 가거든? 하여간 난 FA 대박 낼 거고 올해는 절대 맞선 안 볼 거야.”

“FA 대박이라니. 아들, 아들 말처럼 스물여덟이면 이제 슬슬 현실을 볼 때가 됐어.”

“아, 할 수 있다고!!”

성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권 여사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가 정말 FA 대박, 그러니까 막 50억 이런 거 하면 엄마도 별 말 안 할게. 근데 만약 그렇게 못하면 아들 내년에는 엄마가 해주는 맞선 무조건 다 나가고 애프터, 삼프터까지는 다 하는 거야. 알겠어?”

“콜!! 내가 꼭 FA 대박 내서 엄마의 그 맞선 소리에서 해방되고 만다.”

+++

“그렇게 됐으니까, 이제 진짜 열심히 해야 해요. 이거 아주 좋은 기회야. 메이저만 가면 50억은 껌이지. 그러면 엄마도 찍소리도 못할걸? 엄마한테 영감님 이야기 안 하기를 잘했어요. 만약 했다면 엄마도 이런 질 게 뻔한 내기는 못 걸었을 테니까요.”

성민이 의욕을 불태웠다.

그런 성민의 모습에 필 니크로가 할 말을 잃었다.

성민이 엄마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애새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엄마 쪽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성민은 엄마가 필 니크로에 관한 걸 모른 채 무모한 내기를 걸어왔다고 의욕에 불타고 있었지만, 애당초 저 내기 자체가 권 여사에게는 손해 보는 것 하나 없는 내기였다.

성민이 의욕에 불타서 FA 대박에 성공하면 그것만으로 1등 신랑감 완성이다.

설사 대박이 나지 못하더라도, 이 애새끼 성격상 중간에 설렁설렁할 게 뻔한데, 그걸 막는 것 자체가 더 좋은 성적을 거둘 훌륭한 요인이다.

장가를 보내는 건 덤이다.

-성민아, 한 가지만 묻자. 대체 네가 지금 KBO에서 총액 50억을 받으려면 얼마나 활약해야 하는 거냐?

“이전에 보여준 것도 있고 하니까, 안정적인 3선발 정도? 솔직히 그 정도는 너클볼 아니더라도 몸만 온전하면 보여줄 수 있는 성적인데 엄마가 나를 너무 얕봤어요.”

아니다.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달성 가능한 목표를 제시한 것 자체가 그녀가 성민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다. 만약 80억이니 100억이니 같은 소리를 했더라면 이 애새끼는 초반에 몇 경기 망치고 때려치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참 똑똑하시구나.

“우리 엄마가 좀 그렇긴 하죠. 근데 이번에는 내가 이길 겁니다.”

-그래, 뭐 과정이야 어찌 됐건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니.

“뭐라고요?”

-아니다. 그냥 열심히 하자고.

“네,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그렇게 겨울이 시작됐다.

***

“으음.”

“팀장님 뭐 문제라도?”

“아뇨, 별 건 아닙니다.”

“뭔데 그러십니까. 그냥 말씀해주세요.”

선수들에게 겨울이 휴식의 계절이라면, 프런트 직원들에게 겨울은 본격적인 야근의 계절이다.

“그게 김성민 선수의 연봉 때문에요.”

“성민이요? 어디 보자. 으음, 제가 보기엔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마린스에는 자체적인 연봉 책정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책정 시스템에 의하면 이번 시즌 성민의 연봉은 1억 9천. 이나마도 그가 FA 직전 해가 아니었다면 훨씬 낮았을 것이다.

2026시즌 이후 성민은 꾸준히 하락세였다. 2030시즌 연봉은 1억 3천에 불과했었고 정상적인 고과 반영이라면 거기서 더 깎는 게 옳았다.

“너클볼도 그렇고, 수술 경과도 매우 좋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2026년 이후로 꾸준히 부진하긴 했지만 사실 김성민 선수 정도면 기량만 회복한다면 토종 에이스까지도 가능한 포텐이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뭐 굳이 이번 시즌 연봉을 더 줄 필요가 있을까요? 진짜 제대로 던진다고 하면 우리가 잡으면 그만 아닙니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원래 리스크는 분담해두는 게 좋잖습니까.”

단장이 성민의 지난 연봉을 주욱 훑었다.

“이미 B급까지 올리는 건 무리군요. B급이 되려면 올 시즌 연봉을 어이구, 4억 5천까지 줘야 하네요.”

“뭐,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팀이 네가 어려울 때도 이만큼 대우해줬다. 고과 제도 이상으로 너를 생각한다 이런 뉘앙스만 풍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다른 구단으로 간다고 해도 어차피 올해 연봉의 200% 보상을 생각하면 부담도 그리 크지 않고요.”

“망하지만 않는다면 적정선보다 조금 과한 연봉을 주는 건 무조건 이득이라 이 말씀이로군요.”

“네, 바로 그거죠.”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2억 2천만 원이요?”

“네. 만족할만한 금액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팔꿈치 수술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셨고, 구단에서도 많이 신경 쓴 금액입니다.”

“확실히······.”

생각보다 높은 금액이었다.

-거의 18만 달러 정도 되네. KBO 생각보다 꿀인데?

‘이거 제가 주장하려던 금액보다 1할은 더 높은 금액인데요? 작년에 팀 성적이 괜찮아서 그러나? 근데 전 작년에는 뛰지도 않았는데.’

-많이 주면 좋은 거지. 뭘 고민하고 있어.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사인하겠습니다.”

[부산 마린스 김성민 2억 2천만원에 재계약!!]

-엥? 얘가 2억 2천?-

-마린스가 돈 좀 풀 생각인가 보지. 작년에 오래간만에 준 플레이오프까지 갔잖아.-

-얜 작년에 뛰지도 않았는데?-

-내년까지 하면 FA잖아. FA 직전 해인데 좀 두둑하게 주는 거지.-

-보상금 많이 뜯어내려는 속셈인 듯.-

-그리고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아 보상금 장사는 무산됐다고 한다.-

-그래도 김성민이 예전에 보여준 거 생각하면 질러볼 만하다고 본다.-

-어휴, 그놈의 예전, 예전. 할배들. 그 예전 이제 안 돌아온다니까요.-

성민의 재계약에 수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했다.

몇몇 사람은 그를 옹호했지만, 그 숫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포털에서 가장 많은 찬성을 얻은 댓글은 <엥? 얘가 2억 2천?>과 <보상금 많이 뜯어내려는 속셈인 듯.>이었다.

그것은 인터넷에 자기 관련된 기사의 댓글을 꼼꼼하게 살피는 성민에게는 너무 아픈 이야기들이었다. 아마 과거였다면 벌써 양주 한 병 땄을 것이다.

“뭐래? 멍청이들이.”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에게는 저런 헛소리를 하는 작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 그렇게 넘기는 거다.

그 자신감의 원천이 성민을 격려했다.

그렇게 술 대신 이온음료와 건강보조식품을 들이키는 치열한 겨울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른 봄.

마침내 마린스의 스프링트레이닝이 시작됐다.

< 목표(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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