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은 떡볶이 맛집부터(3) >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휴, 진짜 경기하는 꼬라지 하고는. 내가 뛰어도 저거보다는 잘 뛰겠다.”
하지만 그럴 리가.
프로의 벽은 생각보다 높다.
매년 드래프트로 뽑히는 사람의 수는 100여 명. 한국 고교야구팀의 숫자는 2030년 기준으로 81개. 대학팀의 경우 35개에 달한다. 이 말인즉 드래프트에 뽑히는 것 자체가 각 학교의 에이스급이 아니면 힘들다는 의미다.
게다가 드래프트에 뽑히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매년 이런저런 이유로 방출당하는 선수의 숫자 역시 90명을 오간다. 그리고 그중 절반이 1군 무대를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다.
이번 마무리 캠프에 참가한 선수들 대부분은 시즌 중, 혹은 확장 엔트리 때 1군 무대를 밟아본 선수들이었다.
즉, 이 마무리 캠프에 참가 했다는 것만으로도 프로 가운데서는 상위 50%.
방망이를 쥐었던 모든 이들 가운데 상위 1% 수준의 선수라는 의미였다.
프로에서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연발하는 그들이지만 가운데로 몰린 130km/h의 공을 쳐 내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딱!!
청팀의 선두 타자 고동렬이 성민의 몰린 초구를 가볍게 두들겨 1, 2루 간을 꿰뚫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야, 김성민!!
‘그냥 실숩니다. 실수. 아 요즘 한 100개 던지면 3, 4개 나오는 실수가 하필 여기서 나오네.’
-손끝에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
‘저도 압니다. 날이 추워서 그런가? 손끝이 좀 무뎠어요.’
-긴장한 거냐?
‘긴장이라뇨. 저 대한민국 장모님들의 워너비. 전직 국가대표 투수 김성민입니다. 마무리 캠프 자체 청백전에 긴장 같은 거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필 니크로의 날카로운 시선이 성민의 몸을 훑었다.
-그러네. 너 이 새끼. 마운드에 선 투수 새끼가 심박이 왜 57밖에 안 되냐? 긴장 좀 안 하냐?
‘아니, 그거야 제 심장이 워낙 튼튼해서 그런 거고요.’
성민이 가벼운 잡담으로 피안타의 부담을 떨쳐냈다.
너클볼을 제대로 익힌 지 이제 고작 2주가 지났을 뿐이다. 그럭저럭 너클볼을 던지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도 종종 실투가 나오고 있긴 하다.
하필 감독이 지켜보는 청백전에서 초구부터 두들겨 맞은 것은 조금 기분 나빴지만, 애초에 성민은 이 정도 일로 1군 자리를 걱정할만한 입지는 아니다. 게다가 투수는 본래 두들겨 맞는 것이 일이다.
‘점수만 안 주면 돼. 점수만.’
1루의 고동렬이 리드폭을 크게 넓혔다.
성민이 그를 강하게 째려봤다.
‘너 이 새끼. 청백전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래? 너 형이랑 얼굴 안 보고 살꺼냐?’라는 마음을 한껏 담은 눈빛이었다.
고동렬의 리드폭이 반걸음 줄어들었다. 하지만 몸의 균형이 미세하게 다르다. 덕분에 녀석이 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 주자 달리겠네.
‘말씀 안 해도 저도 눈치 깠습니다. 고동렬 저 새끼 결국 뛸 생각인가 보네요. 나쁜 새끼. 내가 지금까지 사준 삼겹살이 몇 근인데.’
너클볼은 느리다.
물론 R.A 디키의 고속 너클볼은 거의 80마일에 육박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속구에 비하면 확실히 느린 공이다. 게다가 포구에도 어려움이 존재한다.
즉 너클볼은 도루를 부르는 공이다.
성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녀석도 급하겠지. 이제 슬슬 군대 갈 나이도 다가오는데 어떻게든 1군에 엉덩이 비비고 싶을 거다.
‘하지만 급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FA까지 104일.
10년의 노력이 결정 날 1년이다.
비록 애새끼 같은 성격이라는 소리나 듣고 있긴 하지만 성민은 프로 1군 무대에서 무려 10년을 버텨낸 남자였다. 이런 청백전에 주자가 하나 나간 것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성민이 그저 우직하게 자신의 공을 던졌다.
-부웅!!
“스트라잌!!”
1루의 고동렬이 빠르게 2루로 달렸다. 공을 받은 혁준이 2루를 향해 빠르게 송구했지만 늦었다.
세이프.
-잘했어.
필 니크로의 입에서 칭찬이 나왔다.
‘잘하긴요. 주자가 2루로 도루 했구만.’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거 너도 잘 알잖아. 괜히 주자 잡겠다고 뻘짓 안 하고 침착하게 네 공을 잘 던지는 게 중요하지.
너클볼을 본격적으로 던진지 이제 고작 2주였다.
슬라이드 스텝? 애초에 정상 포지션으로 던져도 100개 중 3, 4개는 삑사리가 나는 판국에 거기까지 신경을 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저거 도루 너무 쉽게 허용하는 거 아니야? 저런 식이면 주자 나가면 2루는 그냥 내준다고 봐야 하잖아.”
“복귀한지 이제 2주 아닙니까. 성민이가 본래 도루 쉽게 허용하던 녀석도 아니고, 좀 지켜보시죠.”
타석의 타자가 장갑을 동여 매고 성민을 바라봤다.
노아웃 주자 2루.
고동렬은 발이 빠른 주자다. 적당한 안타 한 방이면 그대로 1점이다.
성민이 모자를 고쳐 썼다.
필 니크로의 시선이 성민의 심장을 살폈다. 노아웃 주자 2루의 상황에서도 성민의 심장은 여전히 고요했다.
-최소한 새가슴은 아니라 이거네.
‘다시 말하지만 제가 한일전에서 6이닝 무실점 11삼진 투숩니다. 청백전에서 막 심장 뛰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요.’
왼발을 크게 내디뎠다. 꼬여있던 허리에서 시작된 회전이 어깨를 걸쳐 팔꿈치 그리고 손목을 타고 손끝의 공으로 전달됐다.
보통의 공이라면 거기서 끝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손가락을 낚아 채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너클볼은 달랐다.
마지막 순간 내려치는 팔의 힘이 만든 회전력을 손가락 끝으로 상쇄시켜야 한다. 성민이 미세한 손끝의 감각으로 공을 밀어냈다.
타석에선 타자가 공의 방향을 예측했다.
비록 2군 붙박이 타자라고 하지만 그 역시 처음 야구 방망이를 쥐었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무려 17년이나 방망이를 휘두른 짬밥이 있다.
‘바깥쪽 빠지는 공이다.’
타자가 방망이를 멈췄다.
혁준의 미트 역시 바깥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정확히 0.05초. 바깥으로 가겠다던 야구공이 돌연 마음을 바꿨다.
안으로.
타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미 멈춘 방망이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물론 눈동자가 흔들린 것은 타자만은 아니었다. 포수 마스크 속 혁준의 눈동자 역시 함께 흔들렸다. 이건 아무리 경험해도 도통 익숙해지기 힘든 순간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난 2주간 몸에 수없이 많은 멍을 만들며 얻어낸 경험이 있었다.
그의 미트가 어렵게 성민의 공을 받아냈다.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저 녀석 제법 쓸만해.
‘확실히 포구 하나는 일품이죠. 블러킹도 요즘 더 좋아진 것 같고요.’
성민의 세 번째 공이 타자의 방망이를 이끌었다. 이번에는 존을 빠져나가는 137km/h짜리 빠른 공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김성민!!
‘아, 왜요. 삼진 잡았잖아요.’
-지금 그게 중요하냐? 손에 힘 잔뜩 실린 실투였잖아.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됐지. 색이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고양이가 아니라 소 뒷발이 쥐를 잡았으니 문제잖아.
‘아, 몰라요. 몰라. 다음 타자 나오니까 일단 저기나 집중하죠.’
100개를 던져 3, 4번 나오는 실투를 일찌감치 써버린 덕분일까? 성민이 이어지는 3번 타자를 내야 땅볼로 가볍게 요리했다.
노아웃 주자 2루가 순식간에 투아웃 주자 2루로 둔갑했다.
“제발 공 좀 끝까지 보고 휘두르라고. 응? 기껏해야 120짜리 공에 왜 그렇게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는 거야.”
“그러다가 속구 들어오면요? 성민 선배 팔꿈치 나가기 전에는 거의 150까지 던졌잖아요. 이번 마무리 캠프에서도 얼마 전에 144 찍었다던데.”
“그건······.”
청팀의 덕아웃이 시끌한 사이, 타석에는 4번 타자 박용철이 들어왔다.
그는 오늘 청팀의 타자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타자였다. 비록 타석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1군에서 wRC+가 무려 103.1이다. 리그 평균이 100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포수로는 믿기 힘든 성적이다.
오죽하면 지금이라도 포수 때려치우고 일루수로 컨버전 시켜야 한다는 의견마저 있을 정도다.
공감독이 형진에게 물었다.
“용철이 타격은 더 좋아졌다며?”
“네, 확실히 방망이 휘두르는 감각은 있는 녀석이에요. 이제는 정말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일루수 전환도 고려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 정도야?”
“네.”
코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를 가르치는 능력은 조금 부족했지만, 형진은 리그에 기록될만한 대단한 타자였다. 게다가 그는 타격에 관해서 만큼은 칭찬에 인색한 남자다. 그런 그가 감각이 있다고 표현할 정도면 확실히 용철의 타격 재능은 진짜라고 봐야 한다.
“혁준아 우리 살살 좀 하자.”
“그게 어디 과녁 마음대로 되겠냐? 용철이 너도 받아봐서 알잖아. 어차피 공 던지는 건 선배고 우리는 그냥 그 공 간신히 받는 과녁이야.”
“하긴, 그건 그렇지.”
용철이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지난 2주 동안 이형진 코치의 지도 아래 지독하게 연습했다. 또한, 너클볼에 대한 경험 역시 청팀의 어떤 타자들보다 많았다.
용철이 되뇌었다.
‘할 수 있다.’
연습 상황에서 용철은 10번 중 서너 번씩 성민의 공을 잡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나머지 대여섯 번은 공을 받아냈다는 의미다.
-야, 쟤는 미트는 엉망인데, 그래도 방망이는 제법 돌리더라. 조심해야 할 거야.
‘걱정되면 좀 도와주시던지요.’
-진짜 경기에서 도움받고 싶어?
성민이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경기에 진짜 상관하시면 너클볼이고 뭐고 신부님 찾아가서 엑소시즘 받을 겁니다.’
-짜식.
그런 성민의 대답에 필 니크로가 만족했다.
훈련에서 도움을 주는 것은 좋은 트레이너의 역할이라고 칠 수 있다.
하지만 경기는 오직 투수 자신의 것이다. 거기까지 필 니크로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망종이라면, 그런 망종에게 너클볼의 명맥을 잇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뭐, 한 30억쯤 달린 중요한 경기라면 또 모를까요.’
-뭐 인마?
‘농담입니다. 농담.’
진심이 섞인 것 같은 농담을 끝으로 성민이 첫 번째 공을 뿌렸다.
‘온다.’
그리고 용철의 방망이가 그 공을 향해 힘차게 움직였다.
-딱!!
타구가 두둥실 떠올랐다. 2루의 고동렬이 빠르게 내달렸다. 하지만 정작 공을 두들긴 용철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감독이 지켜보고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1루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그의 손끝 감각은 소리치고 있었다. 이거 완벽하게 빗맞았다. 이건 잡힌 공이다.
그리고 그의 감각이 옳았다.
용철은 너클볼이 날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너클볼이 홈플레이트를 지나는 타이밍 역시 어느 정도 몸에 익었다.
하지만 포수 마스크를 쓰고 접했던 너클볼과 방망이를 휘둘러 상대하는 너클볼은 달랐다.
높게 떠오른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쓰리아웃 체인지.
비록 2군에 가까운 구성이기는 했지만, 프로선수들이다. 이번 이닝을 통해 성민은 프로에게 자신의 2주짜리 떡볶이가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 아직 갈 길이 머니까.
‘갈 길이 머니깐 좋아하는 겁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갈 길 다 가면 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진다니까.
마무리 캠프 자체 청백전
3이닝 1피안타 1볼넷 2삼진 무실점.
***
“감독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혁준이랑 용철이 둘 다 스프링 트레이닝은 데리고 가 보자고.”
< 시작은 떡볶이 맛집부터(3)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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