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은 떡볶이 맛집부터(2) >
“선배님 이거 소프트볼용 미트잖아요.”
처음 성민이 미트를 내밀 때만 하더라도 이 선배가 왜 안치던 장난을 치나 라고 생각했다.
사실 포수들이 쓰는 미트는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가장 빠른 공을 가장 많이 잡아야 하는 포수의 특성상, 미트의 내구도는 모든 야구 글러브 가운데 으뜸이다.
따라서 길들이는데 걸리는 시간만 하더라도 한세월이다.
“어, 내가 기름칠이랑 길들이기 작업 적당하게 해뒀어. 손에 완전 맞지는 않겠지만 일단 좀 써봐.”
“아니, 그런데 소프트볼용 미트를 갑자기 왜 주시는 겁니까?”
“내가 요즘에 너클볼을 익혔거든. 그걸 좀 던져보려고.”
“갑자기 너클볼을요?”
“어.”
하지만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미트를 길들이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제법 만만치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공들여 감독이 보는 앞에서 장난을 친다?
그럴 리가.
혁준은 정말 최선을 다해 성민의 공을 받았다. 손에 익지 않아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 두 배는 큰 미트였다.
그럼에도 공을 받아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미트의 볼 집을 벗어난 공들이 그의 왼손에 통증을 선물했다.
하지만 그 통증 속에서 혁준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혁준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9푼이, 터지지 않는 유망주, 아니. 고졸 포수로 25세의 나이는 이제 유망주라기보다는 노망주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러나 단 하나.
포구
포구만큼은 팀에서 내가 제일 낫다.
그것은 팀의 모든 투수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조차 받기 힘든 공을 태경 선배, 혹은 용철이가 받는다?
가능할 리가.
성민이 이야기했던 30경기의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왔다.
올 해, 9푼을 치는 순간 이제 2군에서 어지간한 활약을 하기 전까지는 1군은 기회도 받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너클볼을 받아낼 수 있는 유일한 포수라는 동아줄이 눈앞에 내려왔다.
혁준은 눈 앞의 동아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물론 혁준과 경쟁하는 용철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그 역시 단번에 성민의 너클볼이 가진 가능성과 그 의미를 눈치챘다.
“코치님, 저도 성민 선배 공 한번 받아보고 싶습니다.”
“갑자기? 네가 너클볼을?”
“네, 공이 좀 어렵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꼭 해보고 싶습니다. 시즌 중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저도 연습은 해둬야죠.”
“하긴, 그건 그렇지. 혁준아, 용철이 미트 좀 빌려줘라.”
“네.”
9월 확장 엔트리가 아닌 27인 엔트리 상황에서 등록되는 포수는 보통 두 명뿐이다.
마린스의 주전 포수인 박태경은 올해 서른셋의 노련한 포수로 0.261/0.324/0.374이라는 포수 치고는 준수한 슬래시 라인을 보여준다. 게다가 수비 역시 노련하기 짝이 없다.
감히 넘보기 힘들다.
결국, 남은 자리 한 자리를 놓고 용철과 혁준은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용철의 판정승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번 시즌 그의 타율은 무려 0.273으로 비록 출장한 경기 숫자는 적었지만 리그의 포수 가운데는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9푼이 와는 비교할 거리도 되지 못한다.
만약 그의 수비능력이 리그 평균 수준만 됐더라도 혁준과 예비 포수를 놓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주전 포수를 놓고 박태경과 경쟁했을 것이다.
어제 성민의 너클볼은 대단했다.
하지만 받는 것이 불가능한 공이라고까지는 생각되지 않았다. 성민의 너클볼은 혁준의 미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해볼 만하다.
그리고 정확히 십 분 뒤.
용철은 자신이 매우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와는 달랐다. 오늘 성민이 던진 공은 무슨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애초에 스트라이크존은 좁은 공간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따졌을 때 가로로 50cm에 세로로 50cm 정도는 되는 넓은 공간이다.
거기에 슬쩍 걸치듯 들어오는 공까지 계산한다면 그 범위는 더 넓어진다.
하물며 성민이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비율은 절반 즈음, 나머지 절반은 존을 벗어난 곳으로 들어왔다.
만약 처음부터 어림없는 움직임이었다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민이 던진 공은 처음에는 마치 존을 향하는 것처럼 굴다가 어림없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
결국, 용철은 성민이 던진 공의 절반을 미트로 받아내지 못했으며, 그 절반 가운데 또 절반은 몸으로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손가락 끝을 스친 너클볼이 그의 면상을 강타했다.
-뻐억!!
“용철아 괜찮아?”
“괘,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다. 머리가 띵하다. 그 순간 용철은 직감했다. 자신은 절대 너클볼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서는 조금 다른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필 니크로의 입에서 나오던 성민이라는 호칭이 애송이로 이윽고 멍청이까지 떨어지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멍청아!! 거기서는 1인치 정도 더 뻗고 튕겼어야지.
-아니, 네 눈에는 그게 1인치냐? 내 눈에는 3인치는 돼 보이는데?
-어제 쉐도우 피칭 할 때는 잘하더니 공을 쥐니까 왜 이러는 거야?
사실 필 니크로의 말은 조금 가혹한 면이 있었다.
프로 투수라고 해도 피칭폼이 항상 자로 그린 것처럼 똑같은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 필 니크로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불가능이었다.
“아, 거 참. 잔소리 진짜 심하시네. 떡볶이부터 하라면서요. 무슨 떡볶이가 미슐랭 쓰리스타도 아니고 그램 단위로 양념을 조절한답니까? 떡볶이는 원래 대충 감으로 양념 다 때려 박는 게 맛집의 비결이라고요.”
하지만 그런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성민은 딱히 기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 본래 게임에서도 가장 즐거운 순간은 레벨업이 팍팍 되는 순간이다.
너클볼이라고는 그냥 재미삼아 몇 번 던져본 것이 전부였던 성민에게 필 니크로라는 최고의 너클볼러가 자신의 요령을 몸에 박아 넣었다.
정상적이라면 한 달을 노력해야 가능한 발전이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
처음 혁준을 앉혀두고 공을 던질 때만 하더라도 10개를 던져 대여섯 개의 공이 배팅볼이었다.
“선배님?”
“어, 몸이 조금 덜 풀린 것 같은데?”
그렇게 뻔뻔하게 공을 던져 나가면서 점점 빠르게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단지 너클볼을 던지는 요령에 대한 감이었다.
“제가 한 번 받아보겠습니다.”
용철이 자신이 포구를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 정확히 그 타이밍이었다. 그 타이밍의 성민은 10개를 던지면 8, 9개는 제대로 된 너클볼을 던질 만큼 발전해있었다.
다만 그 방향이 아주 제멋대로다.
분명 존 안으로 욱여넣고 싶었는데 어림없는 곳으로 흘러갔다.
보통의 공은 조금쯤 어림없는 곳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포구 좋고 블러킹 좋은 포수라면 어찌어찌 막아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던져도 미트로 받아내기 힘든 것이 너클볼이다. 하물며 존 밖으로 나가는 공을 막아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공을 받는 것은 포구와 블러킹이 구리기로 유명한 용철이었다.
성민이 던진 너클볼들이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멍청아. 스트라이크존의 정중앙을 노리고 던진다는 느낌으로 던져야 해. 어차피 그렇게 던져도 중앙으로는 절대 안 들어가니까.
제대로 된 너클볼은 움직임 자체가 불규칙하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숙련된 너클볼러라고 해도 절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원하는 순간 너클볼을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꽂아 넣을 수만 있어도 충분히 숙련된 너클볼러라 부를만하다.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원하는 것은 딱 그 수준이었다.
70마일의 3회전쯤 하는 너클볼을 필요한 순간 스트라이크존에 집어넣을 수 있는 수준.
만약 그것을 꾸준하게 할 수만 있다면 더블A 수준의 리그에서는 충분히 통한다.
성민이 볼멘소리로 항변했다.
“전부 다 중앙 노리고 던진 공들이었거든요?“
-네 번째 공은 우타자 몸쪽 높은 코스 노리고 던진 공이었잖아. 덕분에 자세가 조금 흐트러져서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 공까지가 엉망이 된 거잖아. 공이 좀 들어가는 것 같다고 우쭐하지 말고 기본적인 걸 몸에 박아 넣으라고.-
“귀신은 못 속인다더니. 역시 엄마 말이 옳았어.“
하지만 눈에 MRI를 달고 있는 귀신답게 성민의 변명은 여지없이 반박됐다.
마무리 캠프에서의 시간이 흘러갔다.
성민의 너클볼은 조금씩 무르익어가는 만큼 혁준의 몸에는 멍자국들이 늘어갔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육체의 고통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뻐엉
“굿!!”
처음에는 컨디션이 안 좋다든지, 오늘은 몸이 좀 안 올라온다든지, 어제 먹은 치킨이 탈난 것 같다는 어린애도 안 속을 핑계들로 일관하던 성민이었다.
그리고 그 어설픈 변명들은 혁준을 고민하게 했었다.
이거 내가 속은 거 아닌가?
그냥 그날 던졌던 너클볼이 인생 피칭이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지금이라도 타격에 더 힘을 쓰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2주의 시간이 흐른 지금 성민이 던지는 공은 첫날 던졌던, 마치 미트에 공을 집어 넣어주는 것같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제법 괜찮은 수준까지는 올라왔다.
게다가 엉망진창의 공들을 받아내는 동안 혁준의 너클볼 포구 능력 역시 상당히 올라갔다. 뒤로 빠지는 공을 몸으로 받아내는 블러킹 능력은 덤이었다.
용철 역시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성민의 공을 받는 것에 도전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성민의 공을 제대로 포구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도전들을 통해 그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절대 너클볼을 받지 못한다는 확신. 그리고 너클볼을 지켜본 경험 뿐이었다.
그렇기에 마무리 캠프의 마지막 날.
자체 청백전에서 성민과 혁준이 같은 팀이 된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
“형진아, 이번 캠프 어떻게 생각하냐?”
공감독의 질문에 이형진 코치가 답했다.
“글쎄요, 어떻게 보자면 확실한 성과가 있긴 한데 그래도 조금 아쉽죠.”
형진의 시선이 가볍게 공을 주고받는 성민과 혁준에게 향했다.
“성민이 너클볼은 괜찮아요. 첫날에 너무 말도 안 되게 긁어놓고는 둘째 날부터는 또 너무 형편없어서 사람 환장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던지는 걸 보면 안정적으로 잘 던지고 있어요. 뭐, 실전이야 해봐야 아는 거긴 하지만요. 그리고······.”
“그리고?”
“혁준이는 공 받는 거 하나는 진짜 타고났어요. 저렇게 배터리 맺어두면, 성민이도 너클볼 던지기 무서워서 못 던지는 꼴은 보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타격이 도통 늘지를 않네요.”
말을 끝낸 그의 눈이 이번에는 방망이를 움켜쥔 용철에게 향했다.
“반면에 용철이는 타격은 더 괜찮아졌는데 정작 포구가 하나도 안 늘었어요. 어휴, 진짜 저 둘이 좀 섞어서 반반으로 해두면 딱 좋을 텐데.”
포구가 좀 늘었으면 하던 녀석은 타격만 더 괜찮아졌고, 타격이 좀 사람 같아졌으면 하던 녀석은 포구만 더 원숙해졌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첫날 보여줬던 수준의 너클볼만 아니라면 잔 실수야 좀 있겠지만 태경이도 어찌어찌 받아낼 수도 있을 것도 같긴 한데.”
“대신 그렇게 되면 태경이 쉬는 날에 용철이 빠따를 활용할 수 있는 대신에 성민이가 공을 던지기 좀 부담스러울 수가 있겠지.”
“그건 그렇죠. 그렇다고 혁준이를 쓰자니, 성민이가 득점 지원을 너무 못 받는 수가 생겨요. 게다가 로스터 한자리에 반쪽짜리 선수를 넣어두는 거나 마찬가지고요.”
공 감독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오늘 하는 것까지 좀 보고 고민해보자고. 귀국해서 태경이가 성민이 공 받는 것도 좀 봐야 할 테니 말이야.”
***
청팀의 덕아웃.
백팀의 투수를 바라보는 용철의 시선이 매서웠다.
성민의 너클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다.
감독이 보는 앞에서 저 너클볼을 때려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 시작은 떡볶이 맛집부터(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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