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클볼의 경험(3) >
바로 어제.
성민은 필 니크로의 지시 아래 섬세하게 손톱을 다듬었다. 사실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꼭 너클볼 투수가 아니라고 해도 손톱 관리는 투수의 기본이니까.
-파일 180 그릿짜리 말고 270짜리로 살살 문대라니까.
하지만 필 니크로가 요구하는 수준은 그의 생각보다 높았다. 전문적인 네일샵에나 갖춰놓을 법한 도구들로 손톱을 매끈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항상 발라주는 영양제를 바르고 그 위에 손톱 강화제를 발라줬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투명한 폴리쉬를 세 번에 걸쳐 덧발랐다.
그리고 지금.
성민은 어째서 필 니크로가 그렇게까지 손톱에 신경을 썼는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부웅!!!
“스트라잌!!”
대부분 프로 투수들이 그렇듯, 성민 역시 반쯤은 장난으로 너클볼을 던져본 적이 있었다. 또한, 그렇게 던진 공 가운데 몇몇 개는 정말 놀라운 수준의 변화를 보인 적 역시 있었다.
하지만 달랐다. 한두 번 너클볼을 던지는 것과 경기 내내 너클볼을 주야장천으로 던지는 것은 손톱에 걸리는 부하 자체가 달랐다.
또한, 그의 너클볼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공이 춤을 춘다.
타자의 눈동자도 함께 춤춘다.
겁먹은 포수의 미트는 더 크게 흔들린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공은 포수의 미트를 두들겼고 필 니크로는 가볍게 어깨를 한 바퀴 돌렸다.
-생각보다 몸이 괜찮은데? 구속도 잘 나오는 것 같고.
‘혁준이도 공을 잘 받아주네요. 걱정했었는데.’
-잘 받아주기는 개뿔. 내가 지금 얼마나 신경 써서 미트에 공을 집어넣고 있는데.
‘네?’
대부분 투수는 자신의 너클볼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세대를 통틀어 오직 몇 명.
자신이 던진 너클볼을 스트라이크존 안에 마음껏 집어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프로의 무대에서 너클볼을 던질 자격을 얻는다.
필 니크로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너클볼러였다.
또한, 가장 오랜 시간 가장 많은 너클볼을 던진 투수이기도 하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너클볼을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 구속은 떨어지고 또 떨어져, 아무리 너클볼이라고 해도 더 이상 프로의 무대에서 던질 수 없을 만큼 약해졌지만, 그 공이 향하는 방향을 조절하는 감각만큼은 먹어가는 나이만큼이나 농익었다.
일반적인 미트보다는 거대한 소프트볼용 미트이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 포수 마스크를 뒤집어쓴 혁준이가 공을 잡는 데는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 태어난 것도 맞았다.
하지만 이 위대한 너클볼러의 너클볼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받아낸 것은 포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너클볼을 저 미트 안에 정확하게 꽂아 넣고 계신 거라고요?’
-뭘 놀라고 그래? 애초에 전력으로 던지는 것도 아니니까 가능한 묘기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네 몸은 처음인데 전력으로 공을 던지기는 힘들지.
‘지금 이게 전력 투구가 아니라고요?’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되지. 지금 타석에 선 애들은 기껏해야 루키에서 싱글A급 애송이들이라며.
‘방금 삼진으로 돌린 애는 재작년에 신인왕 2위 하고 작년에 부상으로 잠깐 쉬었던 애인데요?’
-그래? 어쩐지 방망이가 좀 날카롭긴 하더라.
공필승이 마린스의 2군 타격 코치인 이형진을 불렀다.
“형진아.”
“네, 감독님.”
“너 지금 저거 어떻게 생각하냐?”
“너클볼이네요.”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수준이 어때 보여? 칠 수 있겠어?”
2년 전 은퇴한 이형진은 한때 국가대표 4번 타자로 불릴 만큼 대단한 강타자였다. 그는 은퇴하는 해까지도 타격 하나만큼은 리그 평균을 상회하는 실력을 자랑했다. 무릎이 1루까지 뛰기도 어려울 만큼 완전히 망가지지만 않았어도 3번째 FA를 받았을 만한 타자다.
“글쎄요. 밖에서 그냥 보기에는 볼이 꽤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성민이 쟤 원래 너클볼 같은 거 던지는 스타일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난 처음에 너클볼 배워왔다고 혁준이한테 너클볼용 미트 줄 때까지도 그냥 장난치는 줄 알았어.”
“일단 서봐야 알 것 같기는 한데, 나쁜 것 같지는 않아요. 일본 있던 시절에 오카다라는 녀석을 상대해본 적이 있는데 거의 그 정도 수준은 되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결론이 뭐야?”
“타석에 서서 방망이 휘둘러봐야 알겠다는 게 결론이죠. 여기서 눈만으로는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농담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로테이션 급이라고는 하지만 1군에 간간이 출전하는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걸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너 한번 올라가 봐.”
“네?”
“타석에서 봐야 알겠다며. 가서 한번 서 보라고.”
“감독님, 저 은퇴한 지 2년 됐어요. 현역 공을 어떻게 칩니까.”
“쟤도 마운드 안 선지 1년 됐거든. 그리고 아닌 말로 뛰지를 못해서 그렇지 여기 온 애송이들이랑 비교하면 빠따는 네가 훨씬 좋잖아.”
‘어? 형진 선배? 선배가 왜?’
-덩치 좋네. 잘 치는 녀석이냐?
‘전성기에 KBO 박살 내고 MLB쪽도 알아봤던 선배예요. 돈 때문에 NPB 선택하긴 했지만 거기서도 4년 동안 탑급이었어요.’
-그런 녀석이 여길 왜 와?
‘재작년에 은퇴하고 코치 시작했거든요. 구단에서는 차기 감독으로 밀어주고 있고요. 무릎이 좀 안 좋기는 한데, 타격만 치면 이번에 캠프 온 현역 애들보다 오히려 나을 거에요.’
“성민아, 감독님이 공 좀 자세히 한번 보고 오라고 해서 올라온 거니까 은퇴한 퇴물이라고 봐주지 말고 팍팍 한번 던져봐.”
전성기 3할 30홈런을 밥먹듯이 했던 전설적인 타자. 성민이 데뷔했을 때 이미 NPB의 수위급 타자로 활약하던 남자다.
그의 거대한 몸이 타석을 꽉 채웠다.
초구.
마운드의 투수가 가볍게 공을 뿌렸다. 몸쪽으로 슬쩍 휘어 들어오는 공. 타자의 본능이 꿈틀댔다.
‘아직이야.’
하지만 이형진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너클볼이라는 녀석은 타자의 본능 따위는 먹히지 않는 더러운 놈이라는 것을.
몸쪽으로 휘어들어오는 것같던 너클볼이 또 한 번 꿈틀댔다. 들어오는 정확한 방향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짐작하기를 그 근방.
사실 너클볼을 치는 요령은 간단했다.
공이 올 것 같은 곳을 향해 일단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리고 방망이에 공이 걸리기를 기도한다.
-딱!!
이성민의 배트가 공을 두들겼다.
하지만 얕았다. 1루 파울라인을 크게 벗어나는 타구.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쳇.”
하지만 감이 온다.
이 정도라면 칠 수 있는 공이다.
마운드의 필 니크로가 입술을 핥았다.
-은퇴한 지 2년이라고?
‘네.’
-저거 배트 스피드가 괴물이네. 진짜 전성기였으면 메이저도 노려볼 만했겠어.
‘그야 KBO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선배니까요.’
-잘됐네.
‘뭐가요?’
-흔치 않은 기회인데 당장 던질 수 있는 수준의 맛보기만 계속 보여줄 수는 없잖아. 안 그래도 진짜 제대로 된 너클볼은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딱 좋은 상대야.
‘잠깐만요, 조금 전까지 던졌던 공들이 제가 당장 던질 수 있는 수준의 맛보기라고요?’
-당연하지, KBO도 더블A급은 되는 리그잖아. 최소한 저만큼은 던져야 리그에서 뛸 수 있다고.
필 니크로가 천천히 검지와 중지의 손톱으로 공을 꾹 움켜쥐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크고 튼튼하고 왕성한 육체의 감각을 느꼈다.
가장 적절한 보폭, 가장 적절한 몸통의 회전. 그리고 가장 적절한 어깨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내려치는 팔의 힘과 밀어내는 손끝의 감각이 평형을 이뤘다.
타석에 선 이형진은 그것을
‘번쩍이는 두둥실.’
이라고 느꼈다.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두둥실 날아오는 공이 번쩍이라니.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는 오직 그뿐이었다.
벼락같은 피칭폼의 끝에서 야구공이 부드럽게 날아올랐다.
쇠하지 않은 이형진의 동체시력이 공을 살폈다. 보통의 너클볼은 ‘거의’ 회전하지 않는다. 일류의 너클볼러가 보여주는 평균적인 회전수는 1회에서 3회가량. 그리고 그것은 이형진만 한 동체 시력을 가진이라면 공이 돌아가는 모습을 똑똑하게 헤아릴 수 있을 만한 회전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다.
만약 이 장소가 MLB 혹은 KBO의 정식구장이었다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 야구에서 야구장에 설치된 카메라의 눈과 슈퍼 컴퓨터의 연산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가오슝의 평범한 야구장이었고, 그렇기에 이곳에서 이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형진뿐이었다.
아주 느릿하게, 마치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게 날아드는 그 너클볼을.
회전하지 않는 공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하지만 너클볼이라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경악은 경악. 그와 별개로 이형진의 방망이는 힘차게 움직였다.
-딱!!
당연히 어림없는 타구다.
높게 뜬 공이 투수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 필드 플라이 아웃.
삼진만큼이나,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삼진 이상으로 완전에 가까운 아웃.
‘영감님, 아니, 사부님. 방금 그거 대체 뭡니까?’
-육체가 팔팔한 너클볼러는 던질 줄 모르고, 던질 줄 알게 된 너클볼러라면 이미 육체가 삭아버린 그런 공.
회전하지 않는 공은 느리다. 그렇기에 너클볼은 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회전하는 너클볼은 배팅볼일 뿐이다.
그렇기에 모든 너클볼은 그 사이의 어딘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필 니크로가 던진 공은 RA 디키의 그것보다 더 빨랐으며 팀 웨이크필드의 그것보다 더 크게 변화했다.
그것은 완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유일한 너클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성민의 육체에 그 완벽한 너클볼의 경험이 새겨졌다.
< 너클볼의 경험(3)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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