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클볼의 경험(2) >
성민이 오래간만에 자신의 소속팀인 부산 마린스를 찾았다.
“김성민이, 오래간만이다? 병원 밥 먹더니 아주 얼굴이 쫙 폈어? 코치님 말로는 수술 아주 잘 됐고, 재활도 잘 진행 중이라고 하던데. 몸은 좀 괜찮아?”
“그야 너덜너덜하던 팔꿈치를 새 걸로 끼워 넣었는데 당연히 수술 전보다 훨씬 쌩쌩하지 않겠습니까.”
“짜식이, 하여간 파이팅은 좋다니까. 오늘은 강 코치님 만나러 온 거지?”
“네. 만나 뵙고 할 말도 좀 있어서요.”
투수조의 최고참인 진명규가 잠시 망설이다가 성민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인마, 나도 너 말 잘 할 건 충분히 아는데. 그래도 형이 걱정돼서 해주는 이야기니까 잘 들어라.”
“뭔데요?”
“너도 강 코치님 잘 알겠잖냐.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팀을 엄청 사랑하는 거.”
“그야, 잘 알죠.”
“그리고 올해 우리가 좀 잘했잖냐. 와일드카드도 이기고, 준플도 두 번은 이겼고. 사실 준플까지 나간 것 자체가 13년 만에 처음 아니겠냐.”
어디 준플이 문제이던가.
마린스의 마지막 우승으로부터 벌써 39년.
저 물 건너 코쟁이들의 나라에서는 108년 만에 우승한 팀도 있다고는 하지만, 거긴 그래도 팀이 30개쯤 된다.
그런 의미에서 10개 팀 중에서 39년간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의 MLB에서 108년간 우승하지 못한 것에 비길 만했다.
진명규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윗선 전체가 좀 흥분했어. 아주 이를 갈고 있거든. 내년에 어떻게든 대권에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말이야.”
“그런데요?”
조용히 속삭이던 진명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요? 인마, 지금 상황이 이런데 그런 태평한 말이 나오냐? 팔꿈치 갈아 끼우는 거 재활이 중요한 거 너도 알잖아. 그런데 지금 윗선에서는 전부 눈이 돌아갔다니까. 너 당장 내년부터 던지라고 닦달할 거고, 그러다가 혹시라도 잘 던지면 부상 복귀 해건 뭐건 상관없이 좆 빠지게 던지는 거라고.”
그라고 해서 우승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10년 21살의 나이로 데뷔해서 이 마린스에서만 무려 20년을 뛴 진명규다. 선수 말년에 우승 반지 하나 정도는 끼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미래를 망가뜨리는 형태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프로 야구의 초창기 어느 안경 낀 선배의 경우로 충분하다.
진명규가 무려 9년을 함께 부대낀 후배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강 코치님이 던질 만하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안 된다고 그냥 드러누워. 알겠어? 지랄도 하지 말고. 그냥 드러만 누워라. 강 코치님도 사람은 좋으니까 드러누우면 알아서 잘 해줄거니까. 응?”
그 거칠기 짝이 없는 배려에 성민이 그저 웃었다.
그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지금 그에게는 병원보다 정확한 MRI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은데?
***
“걱정했는데, 운동 열심히 했나 보네.”
“네, 뭐. 그렇죠.”
현역시절 강용구는 마린스의 프랜차이즈였다. 23세에 프로에 데뷔해서 16년간 선수 생활을 했고 이후 마린스의 코치로 다시 10년을 뛰었다.
그 말인즉 선수로써건, 혹은 코치로써건 간에 그의 커리어에는 우승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뜻이다.
“올해 경기들 봤지?”
“네, 뭐 누워 있으면서 할 거 있나요. 경기나 꼬박꼬박 챙겨봤죠.”
“봤으면 알겠네. 다음 주 마무리 캠프에 네 자리도 하나 마련해뒀다. 당장 뽈 던지라는 건 아니고 그냥 와서 몸이나 풀어둬.”
성민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치님, 마무리 훈련에 혁준이도 갑니까?”
“혁준이? 갑자기 혁준이는 왜? 가서 뽈 던지려고?”
“네, 의사도 경과 좋다고 그러고, 요즘 살살 공 던지고 있거든요.”
“흐음, 근데 너도 알겠지만, 혁준이는 이번에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20세기, 혹은 21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KBO의 마무리 캠프는 시즌을 치른 주전 선수들에 대한 혹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현재, 마무리 캠프는 시즌에 충분한 경기를 뛰지 못한 1.5군급 로테이션 선수들. 혹은 유망주들을 위한 캠프로 변한지 오래였다.
“그래도 공 받는 거 하나는 혁준이가 최고잖아요. 저 팔꿈치 갈아 끼우고 이제 막 다시 시작하는 건데 영점도 좀 다시 맞춰야죠.”
“그야 그렇지만······. 그냥 같이 가는 용철이한테 던지면 안 되겠냐?”
“에이, 감독님 용철이는 빠따야 좋지만, 공 받는 건 영 젬병이잖아요. 내가 마스크 쓰고 받아도 그만큼은 받겠습니다.”
강 코치 역시 자신이 직접 투수로 뛰어봤기에 성민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는 성민이 데뷔했던 2022년부터 그를 지켜본 사람이었다. 부상과 거만함이 그의 빛나는 재능을 조금 좀먹기는 했지만, 재활하고 왔다는 몸 상태를 보면 각오가 제법 단단해보였다.
게다가 내년 시즌은 그의 FA 직전 시즌이다. 만약 성민이 FA로이드라도 한번 빨아준다면 어쩌면 용병 투수급에 가까운 활약을 해줄지도 몰랐다.
투수의 뎁스가 얇은 KBO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용병 투수급 활약을 해주는 토종 선발은 우승을 향한 지름길이나 다름 없다.
“그래, 그러면 혁준이는 내가 책임지고 마무리 캠프 넣어주마. 대신 가서 술 처마시고 꽐라 됐다는 소리나 시내에 게임하러 나갔다는 소리 들리면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라.”
“어휴, 제가 애도 아니고. 저도 각오 단단히 했습니다.”
“스물여덟이면 아직 안 늦었다. 지금 네 나이면 FA 두 번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잘하자. 응?”
강용구 코치가 성민의 각오를 내년 이후 FA 대박을 위한 각오로 판단하고 그를 격려했다.
-야, 너 시즌 중에 술도 마셨었냐?
‘아니, 그냥 경기를 너무 망쳐서 속상한데, 악플이 좀 빡치게 만들어서 혼자 몇 잔 마셨던 건데 몸이 피곤해서 팍 왔던 거예요.’
-이런 미친, 너 지금 등판 직후에 술을 처마셨었다고 그런 거냐? 그러니까 그 튼튼한 몸을 갖고 태어나서 팔꿈치가 아작이 나지.
‘······. 안 그래도 수술 이후로 쭉 금주 중이거든요?’
-당연한 이야기를 자랑처럼 하지 말고!! 멍청함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필 니크로가 욕을 내뱉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새삼 성민의 놀라운 ‘재능’에 감탄했다.
과연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재능이다.
사실. 처음 한국인에게 떨어졌을 때 기대했던 것이 메이저리그에 전설로 남은 강진호 같은 야구의 구도자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애당초 어중간한 수준에서 모든 것이 완성된 녀석에게 필 니크로 자신이 더해진다면 빅리그의 적당한 수준이야 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하다. 지금 필 니크로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를 지배할만한 압도적인 최고였다.
그리고 성민의 그 재능이라는 놈은 온통 육체의 포텐셜에 집중돼있다. 크고 긴 손가락, 단단한 손톱, 강철같은 어깨. 그리고 선발로 등판한 투수가 술을 처마셨음에도 팔꿈치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에는 고장 하나 없는 내구성까지.
성민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멘탈 뿐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엄마의 사랑. 아니 과보호를 듬뿍 받았던 재능 넘치는 ‘애새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감, 승부욕, 향상심은 아주 가슴 속에 그득하다는 점이었다.
9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필 니크로는 알고 있었다.
의욕이 있는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신체적인 재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마마보이 정도는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필 니크로는 그런 종류의 애새끼들을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
대만의 가오슝.
11월 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기온이 25도에 달하는 이곳에서 마린스가 마무리 캠프를 열었다.
“혁준아.”
“선배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 마무리 캠프에 꼭 넣어달라고 하셨다고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도 공 받아줄 사람 필요하니까 넣어달라고 한 거지. 그러니까 공이나 잘 받아달라고.”
“제가 이번 캠프에서 아주 손가락이 뿌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배님 공은 꼭 받겠습니다.”
혁준의 눈이 의지로 불탔다.
지난 3년 동안 1군에서 총 71경기에 출전하여 183타석 173타수 23안타 타율이 0.133에 불과하다. 만약 외야수였다면 방출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적. 하지만 포수라는 포지션과 출중한 수비가 항상 그에게 기회를 가져왔다.
게다가 저 23개의 안타 중 9개가 장타라는 것 또한 사람들에게 지독한 희망고문을 선사했다.
‘터지기만 하면 대박인 포수 유망주.’
‘컨택만 좀 어떻게 하면 골글급인 포수 유망주.’
물론 성민이 그를 마무리 캠프로 꽂은 것은 그의 장래성 때문이 아니었다.
“혁준아.”
“네, 선배님.”
“너 이번 마무리 캠프만 어떻게 잘하면 이번 시즌 1군에서 한 30경기쯤은 뛸 수도 있을테니까 손가락은 뿌러지면 곤란해. 몸 사리면서 알아서 잘해라. 응?”
“30경기요?”
“그래, 30경기.”
타자는 너클볼이 날아오는 것을 알고도 칠 수 없다.
그렇기에 포수는 너클볼이 날아오는 것을 알고도 받을 수 없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몇몇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
“야, 지금 내가 뭐 잘못 본 거지?”
부산 마린스의 감독 공필승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운드의 투수가 던진 공이 춤을 췄다.
-부웅
그리고 어김없이 타자들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처음 라이브 피칭을 하겠다 말했을 때는 ‘이제 막 재활에서 돌아온 주제에 이게 미쳤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런 공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건 당장 자기 자신이라도 타자에게 시험해보고 싶어 근질거렸을 테니 말이다.
지금 마운드에 선 성민은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성민과 완벽하게 달랐다.
공필승은 그에게서 그라운드를 압도하는 대투수의 품격을 느꼈다.
‘영감님, 이거 느낌이 묘한데요?’
-잔소리하지 말고 집중이나 하라고. 이제 몇 번 안 남았으니까.
당연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김성민이 아닌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최고의 너클볼러 필 니크로였으니까.
< 너클볼의 경험(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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