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사요(2) >
분명 시작은 창대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메이저리거에게 야구를 배워 나도 년에 300억씩 받는 투수가 되고 말리라.
하지만 성민의 그 창대했던 꿈은 시작과 동시에 커다란 암초를 만나고 말았다.
“잠깐만요, 농담이죠?”
-아닌데.
“에이, 농담 맞잖아요. 세상에 어떤 미친 투수가 그럽니까.”
-미치다니. 너클볼러가 너클볼을 던지는 게 대체 어디가 미쳤다는 거냐.
“아니, 아무리 너클볼러라고 해도 그렇지, 던질 줄 아는 공이 너클볼이랑 속구뿐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보통 너클볼은 젊을 때 잘 던지다가 어디 고장나면 배워서 전향하는 구종이잖아요. 젊은 시절에 잘 던지던 구종들 있을 거 아닙니까.”
-없어. 난 애당초 너클볼로 계약을 했고, 마지막까지 너클볼러였다.
“잠깐만요, 제가 분명히 위키에서 읽었는데 영감님 300번째 승리 챙겼던 경기에서 너클볼을 쓰지 않고도 위대한 투수라는 걸 증명하겠다면서 9회 2아웃까지 너클볼을 안던지고 완봉승을 거뒀잖아요.”
-그거 순 뻥이다. 애초에 내가 제일 잘 던지는 게 너클볼인데 미쳤다고 정식경기에서 너클볼을 봉인을 하겠냐.
“그러니까 결국 저한테 가르쳐 주신다는 야구라는 게 너클볼뿐?”
-제대로 된 너클볼은 그것만으로 무적이다.
“우와, 아주 미쳐버리겠네.”
성민이 들고 있던 글러브를 패대기쳤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 팔자에 메이저는 무슨 메이저. 평생을 박복했는데, 그런 행운이 찾아올 리가 없지.”
-아니, 대체 너클볼이 뭐가 어떻다고 그러는 거냐. 한 가지만 던져서 리그를 평정할 수 있는 유일한 구질이 바로 너클볼이다.
“영감님, 우리 좀 솔직해집시다. 내가 영감님이 마법의 봉 같은 거로 뾰로롱 해서 단번에 영감님 전성기만큼 너클볼을 던질 수 있게 해준다면 당장 너클볼러 한다. 근데 그거 아니잖아요.”
-크흠, 그야 당연히 세상에 그런 편한 건 없지.
“지금 그냥 나한테 1:1로 너클볼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겠다. 뭐 그런 이야기잖아요. 지금. 그렇죠”
-그, 그렇지.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영감님. 내가 바본 줄 압니까? 영감님 너클볼 제대로 던지기까지 몇 년 걸렸어요.”
-······.
패대기쳤던 글러브를 들어 조용히 묻어있던 흙을 털어냈다.
“아, 됐어요. 저 메이저 안 갑니다. 그냥 한국에서 4년 50억 받고 FA 할래요.”
-아니, 그러지 말고.
“네, 안 삽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마중은 멀리 안 나가요.”
-성민아, 잘 생각해봐. 물론 너클볼을 익히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일단 익히고 나면? 너 내가 몇 살까지 현역으로 뛰었는지 알고 있잖아. 너클볼러는 수명이 길어. 그것도 아주. R.A 디키도 팀 웨이크필드도 모두 마흔이 넘는 나이까지 롱런했다고.
필 니크로의 말은 사실이었다.
너클볼 투수는 그 특성상 일반적인 투수라면 에이징커브가 오고도 남을 나이에 쌩쌩하게 공을 던진다. 오죽하면 너클볼 투수는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힘이 없을 때 은퇴하는 게 아니라 1루 커버를 가지 못하게 될 때 은퇴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러면 뭐합니까. 지금 내 나이가 몇인지 아세요? 게다가 저 내년만 잘 던지면 생에 첫 FA라고요. 지금 언제 익힐지 모르는 너클볼 같은 거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성민아!!
“그냥 저 말고 다른 놈 찾아보십쇼. 물론 저만한 천재를 찾는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어깨나 팔꿈치 완전히 나가서 답 없는 애들 많잖아요. 그런 애들은 필 니크로가 너클볼 가르쳐준다 이러면 넙죽 절하고 충성을 다할 겁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전 영감님이면 안 되거든요. 그러지 마시고 환불 부탁드립니다. 차라리 클레이튼 커쇼나, 맥스 슈어저, 약쟁이라도 좋으니까 로저 클레멘스 뭐 이런 선수들로 좀 불러주세요.”
-그런 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네가 말한 아이들은 아직 쌩쌩하게 살아 숨 쉬는 아이들이잖아.
“아, 몰라요, 환불 안되면 훈련 방해하지 마시고 그냥 가던 길 가세요.”
하지만 그렇게 늙은 나이까지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너클볼러는 드물다. 메이저 130년 역사를 통틀어 전문적인 너클볼러는 마흔 명이 채 되지 못한다. 현역으로 뛰는 빅리거 역시 0명이다. 심지어 KBO의 역사에서 전문적인 너클볼러는 단 하나도 없다.
이 말은 곧 너클볼을 제대로 던질 만큼 익히는 것은 정말 죽도록 힘들다는 뜻이다. 게다가 너클볼은 다른 공과 그 매커니즘이 매우 다르다. 너클볼을 제대로 익힌다는 것은 다른 구질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감수한다는 의미다.
즉 시스템 창으로 슉 하고 너클볼SSS가 생기는 게 아닌 이상 지금 너클볼을 익힌다는 것은 내년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인생에 한 번일지도 모르는 FA가 달린 바로 내년을 말이다.
-성민, 넌 천재다.
“이제와서 그런 말로 유혹하려고 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저도 제가 천재인 거 잘 알거든요.”
-아니, 넌 진짜 천재다. 내가 어째서 미국도 아닌 이곳 한국에 그것도 하필 꼭 네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거냐.
“그야 나도 모르죠. KFC만 먹다가 질려서 간장치킨 먹고 싶어서 오셨겠죠.”
성민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로또를 맞은 줄 알았더니 그게 로또가 아니라 인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는 함정카드였다. 저 MLB조차도 R.A 디키 은퇴 이후로 무려 15년 가깝게 너클볼 투수가 등장하지 않는 판국이다.
28살에 프로 생활 멀쩡하게 가능한 FA를 앞둔 투수에게 대뜸 하던 거 죄다 버리고 너클볼을 익히라니. 저주도 이런 저주가 없다.
-지난 1년 동안 세계를 모두 뒤졌다. 오직 너뿐이다.
“아니, 대체 뭐가 저뿐이라는 소립니까.”
-너클볼로 세계 최고가 될 가능성을 지닌 투수는 세계를 통틀어 오직 너뿐이었다.
“세계 최고?”
-그래, 세계 최고.
세계 최고!! 사나이라면 응당 가슴이 뜨거워질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에 인생을 걸기에 성민이 프로의 세계에서 굴러먹은 기간은 너무 길었다.
“안 속습니다. 영감님도 너클볼 주야장천 던지면서 마이너에서만 8년을 굴렀죠. 제가 지금 8년 썩으면 서른일곱입니다. 그 나이까지 빌빌거리라고요? 그래요. 뭐, 그렇게 빌빌거리다가 세계 최고가 되는 게 확정이면 또 모르죠. 근데 그거 확정도 아니고 가능성이잖아요.”
-그래도 사내라면 응당 큰 꿈을······.
“그런 말은 아직 사춘기 안 지난 애새끼한테 가서 하시고요. 게다가 세계 최고가 됐다고 칩시다. 근데 KBO에서도 너클볼 익힌다고 8년이나 빌빌거리던 놈을 누가 메이저에 데리고 갑니까? 검증도 안됐는데? 아니 애초에 너클볼 익히면서 KBO에 붙어 있을 수는 있겠어요? 그러지 마시고 그냥 새로 찾으세요. 한 10살짜리한테 붙어서 10년 정도 너클볼만 가르치면 나중에 데뷔 자체를 너클볼로 시킬 수 있겠죠.”
성민이 완강하게 거절했다.
뭐, 숫자만 가지고 떠드는 머저리들이야 10% 가능성으로 3천억. 90% 가능성으로 50억을 고르라고 하면 전자의 기댓값은 3백억이고 후자는 45억이니 전자를 선택하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인생이 달린 문제였다.
-후, 이건 정말 어느정도 궤도에 오른 다음 해주려던 건데.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뭔데요.”
-너클볼을 익히면서도 최악의 경우라도 네가 원하는 그 FA 대박까지도 챙길 방법이 있다.
“세계 최고도 노리고?”
-그래, 세계 최고도 노리고.
“뭐 그런 무안단물 같은 이야기가 어딨습니까? 엄마가 그런 이야기는 보통 다 사기라고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세 너한테 사기나 치게 생겼냐.
“하긴 뭐,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 들어는 드리죠.”
필 니크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성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싸하다.
“대박,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스승님. 이 제자만 믿으십쇼. 이제 이 제자가 너클볼의 전통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휴, 대체 어째서 이런 놈이 가장 가능성이 큰 인간이라는 건지.
< 안 사요(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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