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사요(1) >
야구의 역사에서 강속구로 유명한 투수는 많았다.
월터 존슨, 로저 클레멘스, 레프티 그로브, 마리아노 리베라, 사첼 페이지 등.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를 역대 최고의 패스트볼 투수로 꼽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슬라이더를 던졌던 스티브 칼튼, 랜디 존슨, 론 기드리등의 투수 가운데서도 누구 하나를 최고로 꼽기는 어렵고 그것은 커브도, 체인지업도, 포크볼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많은 구종 가운데 한 가지.
너클볼만큼은 다르다.
메이저리그 역사 속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발투수 가운데 커리어의 시작부터 끝까지 너클볼만 주야장천 던져댄 너클볼러는 오직 하나.
필 니크로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너클볼러 중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커리어의 후반기에 너클볼러로 변신을 했던 제시 헤인즈와 테드 라이언스. 그리고 커리어 1070경기 가운데 오직 52경기만을 선발로 뛰었던 호이트 빌헬름뿐이다.
그렇기에 최고의 너클볼 투수는 오직 필 니크로일 수밖에 없다.
그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너클볼 투수이며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너클볼의 화신 그 자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그런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제안했다.
-내가 야구 좀 가르쳐줄까?
물론 세상에 죽은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야구를 가르쳐주겠다 말했다고 ‘예, 저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시겠다니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답할 사람은 없다.
성민은 처음에는 몰래카메라를 의심했다. 비록 요즘 죽을 좀 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성민은 우먼 주간 사윗감 삼고 싶은 남자 3위에 빛나는 인기인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만졌다.
“뭐야 이거 안 만져지네? 설마 이거 홀로그램인가? 내가 잠깐 재활하는 사이에 과학이 이렇게 발달한 건가?”
-야, 야. 인마 지금 너 어딜 만지려는 거야.
만져지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1년 사이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홀로그램을 훈련실에서부터 꽉 닫힌 방안까지 연속으로 이어서 보여줄만큼 발달했다 것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거 설마 헛것인가?
“내가 요즘 너무 열심히 운동하긴 했나 봐. 몸이 허해졌는지 헛것이 다 보이네.”
-헛것이라니. 비록 죽어서 몸은 무덤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지만 이렇게 팔팔하게 움직이는 영혼을 두고 헛것이라니!!
“분명 냉장고 어디에 엄마가 해준 용봉탕이 있을 텐데.”
-지금 무시하는 거냐?
“용봉탕이, 용봉탕이. 그래 여기 있었구나! 내 용봉탕.”
-좋았어. 그렇게까지 못 믿겠다면 내가 너의 상상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지.
“증거?”
성민은 프로야구 선수였다.
하지만 프로야구 선수라고 해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 그리고 그 당시에 유명했던 선수들을 기억할 리 만무했다.
애당초 1960년대라 하면 성민의 어머니인 권 여사는커녕, 외할머니인 전 말순 여사조차 아직 기저귀에 실례하고 있었을 만큼 아득히 먼 과거였으니까.
-그러니까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의 일이다. 1968년에 처음으로 메이저 풀타임 선발로 뛰었던 나는 69년 리그 최고 수준의 활약을 선보이며 마침내 내셔널리그 올스타로 선정됐었지. 당시 내셔널리그 최고의 투수는 밥 깁슨이었지. 그는 정말 대단했어. 1968년에 그가 리그 MVP와 사이 영 1위를 동시에 수상했던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당연히 모르는 이야기였다. 아니,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다.
1968년 메이저리그의 사이영 1위와 MVP가 누군지 알게 뭔가. 애당초 성민은 1968년 MLB의 MVP는커녕 1986년 KBO의 MVP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밥 깁슨이라는 이름 자체도 몰랐다. 그는 한국의 프로 야구 선수였지 메이저리그의 야구 역사를 공부하는 야구 덕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69년은 달랐어. 밥 깁슨은 여전히 대단한 투수였지만 그를 위협할만한 대단한 녀석이 등장했거든. 그게 나였냐고?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어. 내 평생의 경쟁자로 이름을 날리는 스티브 칼튼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좀 억울하단 말이지.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칼튼 그 녀석보다 내가 훨씬 훌륭한 투수였거든. 근데 뭐 어쩌겠냐. 그때는 또 기준이 좀 달랐고 애초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너클볼 같이 맥아리 없이 날아가는 공이 아니라 뻥뻥 터지는 파이어볼인걸.
필 니크로는 노인들이 으레 그렇듯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아주 길고 지루하게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성민에게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성민에게 그 이야기들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구글은 언제나 옳다.
구글에 검색된 영어 위키에는 정말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쓰여있었고 발달 된 구글의 번역프로그램은 그 모든 이야기를 친절하게 한국어로 번역해줬다.
그리고 그 모든 자료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기가 필 니크로라고 주장하는 필 니크로를 꼭 닮은 만져지지 않는 저 무언가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라고.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둘 중 하나다.
성민 자신이 인터넷에 나온 자료들을 보고 헛것이 그것을 먼저 떠들었다고 생각할 만큼 미쳤던지, 아니면 자기가 필 니크로의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저 영감이 진짜 필 니크로의 영혼이던지.
“아니지. 애초에 미국인인 필 니크로가 한국말을 이렇게 유창하게 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너 지금 내가 한국말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냐? 애초에 영혼에 언어가 어딨어. 난 지금 마음으로 말을 걸고 있는 거라고.
“그러면 제 말은 어떻게 알아듣는 건데요.”
-저승 사자들이 사용하는 세계 7102개 언어 통, 번역기를 통해서 알아듣고 있다.
뭔가 미심쩍은 이야기였지만, 그럭저럭 말은 된다. 성민이 생각했다.
‘이왕이면 내가 미친 것보다는 전설적인 야구 선수의 영혼이 나와 함께 하는 쪽이 좀 낫긴 하지? 왜, 그런 영화도 있잖아. 전설적인 야구 선수의 영혼과 게임 시스템을 동시에 얻어서 최고의 투수로 거듭나는 그런 영화.’
솔직히 그 영화의 주인공과 비교한다면 성민은 야구에 관한 조건 면에서 양반이다. 전설적인 선수의 영혼과 시스템을 얻기 전의 그 주인공은 프로의 벽도 넘지 못한 패배자였지만 성민은 프로의 벽은 넘은 패배자다.
같은 패배자라도 급이 다르다.
“후, 좋습니다. 일단은 할아버지가 필 니크로라는 말 믿어드리죠.”
-이제야 말이 조금 통하는군.
“아까 저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겠다고 그러셨죠.”
-응, 그랬지.
“그 말씀 지금도 유효한가요?”
-당연하지. 내가 뭐 때문에 이 세계에 남았는데.
아쉽게도 영화의 주인공과 달리 성민에게 게임 시스템 같은 초월적인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한때나마 메이저에서 탐냈던 최고의 재능이었다. 나이를 먹는 동안 부상과 약간의 게으름이 그 재능을 좀먹기는 했지만, 만으로 28세. 아직 늦지 않았다.
‘그래, 재활 성공하고 명전급 투수한테 1:1로 과외도 좀 받고 그러면 나라고 메이저 가지 말란 법 있겠어? 영어 접은 지 4년쯤 되긴 했지만, 그거야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지.’
김성민
28세의 겨울. 그가 큰 물에서 놀아보기를 결심했다.
“좋습니다. 그 야구 한 번 배워보죠.”
-좋은 선택이야.
성민이 필 니크로의 손을 맞잡았다. 물론 제대로 잡히지 않은 손은 허공을 휘저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KBO의 불펜 투수와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의 동거가 시작됐다.
< 안 사요(1)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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