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한때는 잘나가는 투수였다(2)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성민은 밥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시키는 대로 운동도 열심히 했다.
-끄응
“내가.”
-차
“꼭.”
-끄응!!!
“다시!!!”
-차!!!
“150 찍는다.”
1974년 최초의 토미 존 서저리 이후 이 수술은 모든 투수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절망으로 기록됐다.
수술 자체의 난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 수술 받겠다고 미국으로 일본으로 떠났다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한국의 스포츠 정형외과에서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수술이었고, 성공률 역시 99%에 육박했다.
하지만 수술의 성공률이 99%라고 해서 99%의 선수들이 현역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수술의 난도는 높지 않은데 재활의 난도가 미쳤다.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24개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프로그램에 따라 충실하게 재활을 실행하면 전성기의 구속을 되찾을 수도 있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는 종종 그 이상의 구속을 찍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흔치는 않았지만.
과거, 성민은 역대 최고로 손꼽히던 파이어볼러 ‘였’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전국대회에서 찍었던 157km/h의 속구는 아직도 전설 아닌 레전드로 남아있을 정도다. 물론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넣지는 못했었지만.
어쨌거나 당시에는 한국을 넘어 MLB에서까지 스카우트를 보냈었다. 물론 성민은 KBO에서 안전하게 기간을 채우고 포스팅으로 진출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판단하에 KBO를 선택했었다.
‘멍청한 선택은 아니었지.’
어차피 마이너에서 3, 4년 구르고 빅리그 올라가서 서비스 타임에 박봉으로 구르는 것보다 KBO에서 지원 빵빵하게 받아가며 1군 생활 해주고, 적당히 세계 대회도 나가서 병역 면제도 좀 받아서 국민 영웅도 되고, 포스팅으로 대박 금액 받아가며 미국에 진출하는 것이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프로 4년 차였던 2025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생각 같았다.
1년 차에는 그럭저럭 신인왕을 수상했다.
2년 차에는 외국인 용병 바로 다음 가는 수준으로 공을 던졌다.
3년 차에는 팀에서 외국인 용병 투수를 하나 앞지른 2선발 정도로 평가받았고
4년 차에는 외국인 용병이랑 거의 박빙 수준으로 공을 던졌다.
2026년 아시안 게임 대표 선발은 당연했다.
[김성민 투수, 일본과의 경기에서 대만전의 부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성민 선수,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대만전에서 3.1이닝 5실점으로 두들겨 맞으며 국민 역적이 될 뻔도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일본놈들에게 6이닝 무실점 완벽한 피칭을 선보이며 단번에 우먼 주간에서 선정한 사윗감 삼고 싶은 남자 3위에도 랭크됐다.
참고로 당시 1위는 국민적 인기를 끌던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고 2위는 베를린에서 대상 받은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남자 배우였다. 연예인도 아닌 성민이 3위를 했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어마어마한 인기를 증명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했던 인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연달아 부상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엉덩이, 그다음은 어깨, 그다음은 허리, 그리고 마지막 팔꿈치.
사실 성민이 특별히 무리했다고 할 만큼 공을 많이 던졌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남들 던지는 만큼 던졌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너무 어린 나이에 풀타임을 소화하기 시작했다는 정도?
그리고 매일 같이 공을 던지는 일과에 익숙해져 스트레칭을 아주 조금 소홀히 했다는 점?
굳이 거기에 하나를 더 하자면 운이 조금 없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어찌어찌 병원 다닌다고 2군 좀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컨디션이랑 감각에 조금 문제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불펜 알바 좀 뛰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부상이 또 생기고의 반복이기는 했지만 뭐 그래도 여전히 구속은 잘 나왔었다.
팔꿈치가 고장나기 전까지 이 악물고 던지면 150까지는 쑴풍쑴풍 나왔으니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딱 150만 돌아와라.
포스팅은 애진작에 지나갔고 FA로 메이저를 가겠다는 것도 이제는 꿈도 꾸지 않는다.
이제 성민의 목표는 딱 4년 50억.
어찌어찌 세금 떼고 한 30억 정도만 남겨 먹자. 그리고 3층짜리 작은 상가 하나 사서 꼭대기에는 살림집하고 2층에는 스크린 야구장하고 1층에는 술집을 하나 하자.
스크린 야구장 이름은 스트라이크를 던져라. 술집 이름은 명예의 전당을 뜻하는 호프집 투수 정도면 되겠지.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곰 같은 여자 말고 여우 같은 여자를 하나 만나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거다.
“그러려면 내년에는 꼭 복귀해야 해.”
성민의 경우 전성기 시절에 프리미어12나 아시안게임 등의 국제 대회 출장과 수상으로 벌어둔 FA가 제법 된다. 덕분에 중간중간 부상으로 명단에서 이름이 빠졌었음에도 7년 하고도 41일의 기간을 충족할 수 있었다.
남은 기간은 이제 딱 104일.
그렇게 2032년 시즌에 FA 기간을 충족한 채 끝낼 수 있다면 그의 나이는 만으로 28세. 한국 나이로도 29살밖에 되지 않는다. 29세에 150을 던지는 팔꿈치 건강해진 투수라면 4년 50억은 절대 무리가 아니다.
정말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운동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재활에 몰두했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조금씩 물렁 해지던 코어가 한층 더 단단해졌고 어깨와 팔에도 옹골차게 근육이 들어섰다.
9개월.
수술 부위의 통증은 사라졌고 몸 상태는 근 몇 년 이내에 이렇게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만큼 호전됐다.
<야, 김성민 언제 돌아오냐? 슬슬 돌아올 때 되지 않았냐?>
<팔꿈치 수술받았잖아. 그거 한 일 년은 잡아야 할거임.>
<그러면 내년에 돌아오는 건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겠다더니, 얘가 중간에서 딱 지켜줄 때는 몰랐는데 없어지니까 우리 불펜 약한 게 눈에 확 보이네.>
<있을 때는 매일 블론만 하는 것 같았는데 없으니까 이상하게 섭섭혀.>
인터넷의 지랄 맞던 인간들도 한 1년 정도 안 보는 사이가 되니 슬슬 성민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만 29세에 FA에 들어가는 것과 만 30세에 FA에 들어가는 건 느낌이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전자는 20대에 FA고 후자는 30대에 FA다.
4년 계약을 하게 되면 전자는 30대 초반에 마지막 4년 차고 후자는 30대 중반에 마지막 4년 차다. 같은 실력이라고 할 때 총액 기준으로 한 20%는 차이 날 만한 요소다.
2031년도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성민이 2032시즌을 목표로 힘차게 운동을 시작했다.
-너 그러면 안 될 텐데?-
“안 되기는 뭐가 안 된다는 소리야.”
-토미가 경고했잖아. 이 수술의 중요한 점은 수술이 아니라 재활이라고. 녀석이 성공적으로 이전의 구속을 회복한 건 근 2년에 달하는 재활 덕분이었다고.-
“그거야 그 영감님 시대 이야기지. 요즘 재활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잠깐만. 근데 내가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야?”
고개를 돌린 성민의 눈앞에 어디서 본 적 있는 늙은 서양인이 하나 서 있었다.
“어휴, 할아버지 여긴 대체 어떻게 들어오신거에요. 얼른 나가주세요. 여기 개인 연습실이라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 되요.”
-김성민??
“네네, 저 프로선수 김성민 맞습니다. 사인 해드릴까요? 근데 저 혹시 본 적 있으세요? 얼굴이 좀 낯이 익은데?”
-난 널 본 적이 없겠지만, 넌 날 본 적이 있겠지. 내가 좀 유명하거든.
“이 할아버지가 낮술을 하셨나 갑자기 무슨 헛소리세요. 내가 얼마나 유명한데. 2026년 우먼 주간 선정 사윗감 삼고 싶은 남자 3위 프로야구 선수 김성민 모르세요?”
-그러는 너는 24시즌 5404이닝 318승 투수 필 니크로 모르세요?
“네?”
1년 전 성민의 팔꿈치가 아작나던 날.
성민의 팔꿈치 소식보다 더 크게 세계를 휩쓸었던 그 양반이 성민의 눈앞에 나타났다.
< 나도 한때는 잘나가는 투수였다(2) > 끝
ⓒ 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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