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198화 (198/200)

나만 1회차 198화

솔로몬의 전지전능한 신력을 없애기 위해서, 세상은 멸망해야만 한다.

물론 세상을 파멸시키기로 했지만, 잔인한 방식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를 찢어 죽여서 재난을 일으키는 막장스러운 계획 따윈 없으니까.’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모두를 죽이고 숙원으로 되살릴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사망의 고통을 주진 않겠다.

일반적인 마법으로 모든 인류를 죽이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마나 낭비가 크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12서클 마법 ‘삭제’를 쓸 것이다.

‘본인이 죽었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고 깔끔하게 소멸시킬 수 있지.’

12서클 마법을 쓰면 그 대상은 어떤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말소된다.

물론 ‘삭제’는 소멸시키는 대상이 나에 비해 강할수록 정신집중이 오래 걸리고,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다.

그래서 솔로몬을 죽일 때 높은 집중시간과 마나가 소모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상이 나보다 약한 생명체나 사물이면, 전혀 관계가 없지.’

‘삭제’는 대상이 나보다 약할수록 정신집중과 마나가 적게 소요된다.

난 수십의 용을 농락했던 아크 리치보다 고등한 마법을 익혔고 내 마력은 불멸아귀의 완력보다 강하다.

‘설령 전성기의 용이라도 12서클 마법이면 곧바로 퇴치할 수 있다.’

솔로몬을 제외한, 세상 누구든 12서클 마법 앞에선 파멸될 뿐이다.

그야말로 12서클은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경지였다.

세상의 인류는 자신이 죽었는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전멸하리라.

[9서클 마법 전역관찰이 적색대륙 지배자 솔로몬을 관찰합니다.]

[3시간 후, 솔로몬은 완전히 전지전능한 신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현재의 적은 완전무결합니다.]

‘앞으로 3시간.’

놈이 완전한 신이 되기까지 3시간.

앞으로 난 솔로몬에게서 도망치며 3시간 안에 세상을 멸망시켜야 한다.

‘단 1초라도 지체할 틈이 없어.’

나의 등줄기에서 로크의 날개가 솟구쳤고, 강력한 마력이 휘감겼다.

마력을 덧대서 쾌속으로 날아오르자 솔로몬도 감히 날 잡지 못했다.

“당장 멈춰라! 네놈이 세상의 그 무엇도 파괴하도록 놔두지 않겠다!”

솔로몬이 괴성을 내지르며 쫓아왔지만 난 건틀릿을 낀 손을 뻗었다.

“백혈기사단 소환!”

새롭게 소환된 유령기사단 중에서는 처음 보는 단원들도 꽤 많았다.

나에 의해 소환된 기사들은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랑, 랑크! 랑크, 자네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

「우리 백혈기사단 20인 전원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니!」

「주인! 도대체 어떻게 이런 단시간 내에 이토록 강해졌단 말인가!」

영겁수련관에서는 혼자만 수련해야 해, 고대기사 건틀릿은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이 유령기사단과는 천 년 만에 서로 처음 대면한 것이었다.

‘단원 숫자가 20인으로 늘어났군.’

소유자가 성장할수록 소환 가능한 유령이 느는 고대기사의 건틀릿!

내가 마법의 정점에 오르며, 최고 숫자인 20인이 모두 채워져 있었다.

「놀라워요. 살아생전의 동료들을 모두 볼 수가 있다니……. 묵묵한 제 동생도 눈물을 흘릴 정도예요.」

「인마! 오페찰! 네놈 술 먹다가 내게 팔씨름 진 뒤로 처음 보지?」

「하! 설마 폭우에서의 대전투 이후 너희들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유령단원들이 피눈물 흘리거나 기뻐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감동적인 분위기에 찬물 끼얹기 싫지만 시간이 없어 말을 서둘렀다.

“지금 나를 덮치려 하는 적한테서 최대한 시간을 벌어줬으면 한다. 하지만 적은 전지전능해져 가는 신이야. 설령 너희라도 소멸될지 몰라.”

이제까지 유령기사단은 소멸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재소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적은 솔로몬이었다.

“유령이라도 관계없다! 너희 모두 나의 앞에서 존재 자체가 말소되고 싶지 않다면, 감히 날 막지 마라!”

솔로몬의 강력한 신력에서 결코 단순한 위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녀석에게 멸하면, 다시는 이승으로는 돌아올 수가 없게 되리라.

「…….」

순간 기사단 모두가 침묵하였다.

기사단장 엘이 내게 미소 지었다.

「육신을 내버린 우리는, 이제 목숨을 내걸 의무가 존재하지 않네.」

그리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먼 옛날, 우린 죽음 이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기사단이었어. 하나 지금, 그대가 우릴 재회시켜줬다. 그러니 없는 목숨이라고 못 걸겠나?」

난 투명한 그 손을 감싸서 쥐었다.

비록 촉감은 없고, 싸늘할 뿐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따스한 악수였다.

기사단장 엘을 시작으로 단원들이 웃으면서 내게 한 마디씩 건넸다.

「이젠, 작별이군. 그대 덕분에 모든 단원이 만나게 되었어. 주인.」

「혹시 주인이 죽으면 또 몰라! 우리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지도!」

「난 지금 첫 대면이지만 우리 모두를 만나게 해줬다며? 고마워! 그대에게 기사로서 예를 표하겠어.」

「소멸되더라도 언젠가 재회한다면, 명계에서 술이나 나눠보자고.」

「즐거웠어요. 주인님. 어! 제 동생이 이번엔 직접 말하고 싶대요.」

「우리들을 또 만나게 해줘 고마워. 범철. 언젠가 또 보기를 원해.」

어쩌면 이들과도 긴 인연이었다.

몇몇은 여정의 극초반, 황색대륙 때부터 함께 했었으니까.

이별의 진득한 씁쓸함을 맛보며 나는 죽은 그들에게 모두 인사하였다.

“……언젠가, 너희 모두 나보다 더 좋은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기사들은 그저 웃어주었다.

「아니, 그렇진 않을 거야. 당신이 오직 우리의 마지막 주인이니까.」

최후에 기사단장 엘이 세상을 뒤흔들 것처럼 거센 고함을 내질렀다.

「전우이자, 친우들이여! 과거에 내버린 목숨을 바칠 순간이 왔다!」

[명계의 곳곳에 흩어졌던 20인의 백혈기사단이 전원 집합했습니다!]

[고대에 명성을 떨치고 대폭우 속에서 태양을 훔친 전설적 기사단!]

[생전 기억을 잊지 않은 단원들의 충성도가 최고조가 되었습니다.]

일순간, 모든 유령기사의 혼이 새하얗고 센 불꽃으로 타기 시작했다.

「쓸어라! 우리가 시간을 번다!」

[기사단장 엘이 명령합니다.]

[모든 유령기사가 각자의 진혼을 불태우며 적에게 달려듭니다!]

[잠시간, 모든 유령단원이 살아생전 전성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싸움이 끝나면 스스로 혼을 불태운 유령기사는 모두 전소합니다.]

진정한 기사들이, 적에게 돌진했다.

“한낱 잡졸 유령들 따위가!”

그러나 기사단장 엘에 의해 지휘되는 진혼의 백혈기사단은 강력했다.

각자 본인의 영혼을 태워가며 한계까지 적을 막아 내는 진혼의 사투!

어찌나 그 힘이 강력한지 전지전능한 솔로몬조차 잠시 발이 묶였다.

‘저것이 전성기 시절 백혈기사단.’

나는 한 번 전사했던 기사들의 맹렬한 결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사단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서 세상을 멸망시켜야만 해.’

기사단이 시간을 버는 동안, 이를 악물고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

“대장.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놀란 카티에가 나를 쳐다보았다.

설명할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마법으로 내 기억을 전달해줬다.

“아아…….”

카티에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상황을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 대충 이해됐지?”

스스로, 싸늘한 헛웃음을 짓는다.

그간 예지몽과 미래 파편을 보며.

참 웃기지도 않는 착각을 해왔다.

‘카티에는 결코 날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지가 가리키던 미래는.

내가 시달린 불안과 전혀 달랐다.

“카티에.”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것이 모든 조건에 부합한 미래.

“아무래도 널 죽여야 할 것 같아.”

내가, 카티에를 죽여야만 한다.

하나 그녀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내가 보았던 미래 파편이 이거였네요. 대장이 나를 해하려던 그 장면.”

“웃음이 나와? 널 죽일 건데.”

“회귀자니까요. 그리고 내가 옛 회차에서 벌였던 일, 벌써 잊었어요?”

그녀의 작은 손이 내게 다가온다.

“대장. 한때 인류를 멸망시켰던 전적이 있는 선배로서 충고하자면.”

카티에가 나의 뺨을 쓸어내렸다.

“긴장 풀어요. 생각보다 쉬우니까.”

미친 그녀가 목숨을 빌려줬고, 그보다 더 미친 내가 미소를 지었다.

“대장을 믿어요. 이겨서 되갚아요.”

“꼭 돌아와 상환할게. 목숨값은.”

내가 굳게 약속하고 카티에한테 손을 뻗자 그녀가 사라졌다.

줄곧 함께해온 그녀를 없애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단 게 느껴졌다.

실로 오래간만에 죽음에 관한 막중한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SSS급 회귀자 살해재능이 살인 이후의 죄책감을 완화시킵니다.]

[냉철한 판단력을 되찾습니다.]

‘정신적 충격은 크지만, 해야 해.’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실패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나는 움직여야만 했다.

“버, 범철? 지금 카티에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설명할 시간 없으니 용서해줘요.”

놀라서 말을 걸어온 쿰룸에게 사과하며, 나는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수천의 드워프 군세가 어떤 과정조차 없이 내 마법에 의해 전멸했다.

“……하.”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을 내지었다.

여기까지 오며 누구도 죽지 말자고 그렇게 서로 격려하고 다짐했는데.

그런데 정작 내가 전부 죽이다니.

‘……지금은 잡념에 섞이지 말자.’

주먹을 꽉 쥐고서 한참 날아갔다.

내려앉자, 그곳에 상처를 깊게 입은 퀸소히니베가 쓰러져 있었다.

내가 기억을 전달해주자, 그녀가 피를 흘리며 히죽 내게 웃어 보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예전에 재판에서 나를 사형시키려 했던 순간부터 딱 알아봤던 것이야.”

“그래, 원래 노예가 주인을 죽이는 장면이 가장 카타르시스 넘치잖아.”

“너는 이제 ‘노예’가 아닌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내 어깨를 감쌌다.

힘겨운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된다면, 그땐 널 ‘친구’라 부를 것이야.”

“……반드시, 다시 살려낼게.”

내가 손을 뻗자, 그녀가 사라졌다.

그리고, 헤르탄에게로 날아갔다.

“당신을 죽여야만 합니다. 헤르탄.”

왼쪽 눈을 잃은 그가 날 보았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나의 유일한 친우이자, 하나뿐인 진정한 왕이여.”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단 겁니까?”

마법으로 상황 기억을 전달해주며, 나의 목소리가 조금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가 할 말이라고는, 그저…….”

헤르탄이 죽어가며 내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간 모실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범철. 나의 폐하시여.”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인 것은 그 누구에게보다 진솔한 미소였다.

주먹을 꽉 쥐고, 동료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내렸다.

“……아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상처투성이인 초화가 겁먹은 얼굴로 내 바짓단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설명할 시간이 부족해. 초화야.”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말투로 애완수를 바라보며 신중히 물었다.

“지금, 나를 믿어줄 수 있겠어?”

초화는 나의 눈을 바라보다가 아이답지 않게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뿐이야.”

“캬앙!”

백야도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얼굴이 함몰됐지만 입만은 멀쩡한 달귀도 펄쩍 뛰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 뭘 하든지 간에 나 혼자만 빠뜨릴 거라면 진심으로 섭섭해요!”

“꾸왁!”

동북이도 진지하게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나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 나는 아기 로크를 보았다.

전투로 인하여 날개가 꺾이고 피가 묻은 소녀는 날 보며 한숨 쉬었다.

“너랑 연은 짧지만, 멋대로 해봐. 어차피 네가 이기든, 저쪽이 이기든 멀쩡히 살긴 고달플 것 같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모두가 사라졌다.

내가 사랑하는 일행이, 모두 전부.

모두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였다.

“…….”

불현듯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결코 멈춰 서지는 않았다.

내가 대지에 양손을 내리고 마력을 흘리자 흑영사막 전역이 말소됐다.

‘모든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이제 지금껏 여정에서 만나온 나의 모든 인연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다.

***

붉은 사막을 날면서 짐을 살폈다.

당연히 세상을 파괴하는 활동을 실행할 때 내 신분을 드러낼 순 없다.

‘45회차의 철가면.’

왕으로 군림할 때 착용했던 가면!

전생의 돌을 쓰고 난 뒤, 나는 45회차의 내게서 이것을 전해 받았다.

‘회귀자의 왕이던 회차, 난 모두를 지킬 때마다 이걸 썼다고 했지.’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45회차의 내가 환상 속에서 나에게 이 가면을 넘겨줬는지.

철가면을 쓰는 순간, 인상이 감춰지고 목소리까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모두 죽이기 위해 쓰겠다.’

***

안타깝지만 이후의 사람들은 일행처럼 기억을 불어 넣어줄 수 없었다.

그럴 시간도, 마나도 부족했으니까.

내가 먼저 향한 곳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유성우 지대부터였다.

한없이 별이 떨어지는 외로운 사막, 별빛인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철가면을 쓰셨지만 호흡패턴을 살피니까 운석을 부쉈던 분이시네요?”

가면을 써서 인상을 가리고 목소리가 바뀌었는데, 인형은 날 알아봤다.

“드워프 왕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갔을 땐 이미 죽어 있었어요.”

과연 인형답게 그녀는 구슬픈 상황을 받아들이고도 담담할 뿐이었다.

“저의 아버지께선, 유쾌하셨어요.”

별빛을 담아서 가동하는 인형은 나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게도 웃을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걸 거예요. 범철. 당신이 세상을 휩쓸어버리더라도, 다음엔 웃을 수 있는 세상을 재건해주세요.”

내가 고갤 끄덕이고 손을 뻗자 그녀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떨어지는 별도, 대지도 사라져 유성우 지대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다음으로 드워프들의 임시 거주지로 향하였다.

“뭐, 뭐야! 저 철가면 쓴 놈은?”

“도망쳐! 저놈이 해괴한 마법을 부리면 전부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려!”

드워프 장인과 그의 조수들이 내게서 도망쳤지만, 날 따돌리진 못했다.

마나를 휘감은 비행으로 마지막 남은 드워프까지 처치했을 때, 솔로몬의 우렁찬 포효소리가 귀를 스쳤다.

“제기랄, 세상을 멸하지 마라-!”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찌푸렸다.

‘벌써 기사단이 당해버린 건가.’

백혈기사단을 전멸시킨 솔로몬이 날 추격했고, 나는 맹렬히 도망쳤다.

전지전능해져 가는 적과의 추격전!

날 아슬아슬하게 쫓는 솔로몬을 보며 솔로몬교 신도들은 눈물 흘렸다.

“오오, 솔로몬이시여!”

“과연, 과연 경전에 적힌 대로야!”

“대마술사께서 말미의 날, 몸소 멸망을 막아주시기 위해 군림하셨다!”

하나 그들의 착각과 달리 솔로몬은 단지 자기 힘을 지키려 할 뿐이었다.

당연히 마법의 정점을 달성한 내가 놈에게 순순히 붙잡혀줄 리 없었다.

솔로몬을 모시는 신전들이 보일 때마다 나는 손을 크게 휘둘러 말소시켜버렸다.

‘축복의 불길을 두르고 있는 이상, 솔로몬은 나를 쉽게 죽일 수 없다.’

솔직히 몇 번은 위험할 만큼 따라 잡혀 신력에 적중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루, 24회 간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축복의 불길 덕에 나는 솔로몬의 힘으로부터 살아남았다.

[9회의 죽음을 모면했습니다.]

[무려 아홉 번의 구사일생!]

[어딘가에 있는 불사연구회와 접촉하면 ‘고양이와 목숨이 같은 자’ 칭호 단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계속 도망치며, 손길에 닿는 지역마다 멸망시키고 전부 학살하였다.

물론 단순히 사람들을 없애고 지역을 소실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9서클 마법 전역관찰을 통해 대륙을 쏘다니면서도 숨겨지거나 귀중한 아이템을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온두르의 마굴을 파괴하고 최상급 마나비약을 찾아내 마셨습니다.]

[모든 마나량이 370%로 증가하며, 마법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사악한 온두르가 제조한 비약의 효과는 3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부족한 마나를 채워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12서클 마법으로 생명체를 파괴할 때 드는 마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광활한 세상을 멸하기에는 부족해.’

세상을 파괴하며 마나를 보충할 수 있는 소모품은 틈틈이 찾아 얻었다.

[오아시스에서 파낸 태양의 모래를 왼쪽 눈에 한 줌 넣었습니다.]

[전역관찰 효과가 증가합니다.]

[왼쪽 눈알에 호루스의 마력이 깃들어 마나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대륙을 뒤집어엎자, 지금껏 베일에 싸였던 집단들도 찾을 수 있었다.

“도굴꾼인가! 관의 열쇠만큼은 절대 우리에게서 훔쳐갈 수 없다!”

“고양이! 황금고양이 미라부터 철가면에게서 숨겨라! 손상되어버려!”

괴상한 열쇠를 보존하는 비밀결사.

얼룩, 황금, 도둑고양이를 해부해서 불사를 연구하는 사이비 집단.

그들 모두가 해괴한 마술을 부리며 내게 반항했지만, 모조리 사망했다.

[열쇠비밀결사를 해체했습니다.]

[불사연구회를 전멸시켰습니다.]

[구생九生칭호, ‘고양이와 목숨이 같은 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앞으로 9번,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때마다 마력이 배가됩니다.]

학살되는 존재가 늘어날수록 나의 12서클 마법 경지도 크게 늘어났다.

모두가 내 앞에서, 그 어떤 고통이나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사라졌다.

적색대륙에서 살아가는 자들 모두가 인식조차 못 하고 죽어간 것이다.

“새로운 탐사단을 구합니다! 질려 가는 회귀 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탐방할 모험가는, 이리로 모이세요!”

탐사단 전 리더 샬은 한 마을에서 새로운 단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등 뒤에서 속삭였다.

“성좌의 금속은 드워프 장인만의 제조법이라 알아도 소용없더군요.”

“예, 예? 갑자기 무슨…….”

그러나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그의 존재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껄껄! 사막의 술은 유쾌하구나! 배도 잃었고, 취해 죽기 딱 좋군!”

카벨 선장과 그의 무리는 코가 벌게지도록 취해서 쏘다니고 있었다.

내가 원거리에서 손을 내뻗자, 그들이 서 있는 도시 자체가 소멸됐다.

그렇게 인가를 모두 멸하고서, 본격적으로 광활한 사막으로 향했다.

수천 년 묵은 선인장과, 각종 사막의 몬스터를 파괴하고 멸해버렸다.

그리고 사막이 아무리 넓을지라도 때론 익숙한 얼굴도 만나게 되었다.

“코우르르…….”

내게 동북이를 넘겨준 대형 사막거북은 모래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한때는 이런 대형 몬스터는 어떤 녀석이 잡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내가 손을 내밀자 도시만 한 규모의 대형거북이 잠든 채로 소멸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강한 풍압을 일으키며 내게로 날아들었다.

“바로 네놈이었군. 세상을 멸망시키고 ‘파멸의 길’을 걷게 될 자가. 네놈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풍긴다.”

가면을 썼는데도 냄새로 날 꿰뚫어 본 사막드래곤이 크게 한숨 쉬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미래의 향기를 맡은 사막드래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세상의 멸망이 코앞에 다가온다고.

그래서 나는 ‘지키는 길’과 ‘파멸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그러나 나는 의문을 토로했다.

‘왜 꼭 한 길만 택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이것은.

내가 정해낸 제3의 선택지.

“이건 ‘파멸해 지키는 길’입니다.”

“이런 네가 정상적으로 세상을 지킬 거라 여겼다니. 나도 모자랐군.”

한숨을 내쉬며 사막드래곤이 날개를 접었고, 나로 인해서 소멸됐다.

그렇게 사막을 싹 쓸어서 없앨 때 저편에서 걷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백치이자 불세출의 검사 중 한 명.

유일하게 혼자서 살아남은 거물.

그런 롬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에고 실드와 에고 소드가 기겁하는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저 철가면 놈, 보통 괴물이 아냐!

-롬, 저건 너무 강해! 가지 마!

그러나 그는 나에게로 걸어왔다.

언젠가 헤어질 때 나에게 해줬던 인사를, 지금 롬은 반복해서 말했다.

“너는,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이젠.”

내가 쓰게 웃으며 손을 뻗자 착용한 무기와 함께 그가 사라졌다.

그리고 눈이 활활 불타는 솔로몬이 사막 저편으로부터 모습을 보였다.

“네가 나의 앞에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멸망시키게 놔두지 않겠다.”

솔로몬은 전략을 바꾸어 세상을 보호하는 마술 결계막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지금 가진 전지전능함은 예전보다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마술의 결계막을 깼습니다.]

[혹성창조자의 힘줄이 마력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파괴되고 멸망에 가까워질수록, 놈은 신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든 인가, 붉은 사막, 그리고 적색대륙에 사는 생명체가 소멸하고.

이윽고 마침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마지막 땅덩어리마저 부서졌다.

[고작 단신으로 적색대륙의 모든 몬스터와 영역을 정벌하였습니다.]

[당신은 역사가 경악할 만큼 사상 최악의 악행을 벌이고 있습니다.]

[적색대륙이 멸망하였습니다!]

마침내 내 손에 멸망한 적색대륙.

한 대륙의 멸망이 확정되자 솔로몬의 힘이 꽤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히, 힘! 나의 신력이!”

감지마법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솔로몬의 신력은 무려 3분의 1이나 적어졌다.

그리고 그 말은 나에게도 승산이 충분히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제, 다음은 청색대륙이다.’

도깨비, 구미호, 활의 동양풍 대륙.

닿는 발치마다 바다를 소멸시켜버리며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러 갔다.

***

[코달타 해역에서 고대 창 조각 일곱 조각을 전부 수집했습니다.]

[고대 창 조각을 모두 조립하여, 해일의 삼지창이 탄생했습니다!]

[바다를 원천으로 하여 무시무시한 자연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바다해역 일부를 뒤엎습니다.]

전역관찰의 확대된 능력으로 이 큰 바다에 흩어진 보물도 쉽게 모았다.

내가 삼지창을 휘두르자 다가온 솔로몬의 마술이 해일에 막혀버렸다.

“한낱 인간이, 감히 신에게!”

그러나 솔로몬의 마술은 해일 따위는 관통하고 내 가슴을 푹 찔렀다.

순간, 숨이 멈추며 피를 토했다.

“커헉!”

[심장이 강력한 힘에 관통당했으나 죽음의 위기를 극복합니다.]

[앞으로 7회, 축복의 불꽃에 의한 구사일생 기회가 남았습니다.]

[‘고양이와 목숨이 같은 자’ 칭호 효과로 인해 마력이 배가됩니다.]

나는 잠깐 멈추었던 심장을 감싸고, 피를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역시나, 대륙 하나를 멸망시켰는데도 놈의 신력은 아직도 막강해.’

제아무리 마법의 정점에 오르고, 대륙을 멸해도 적은 만만치 않았다.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솔로몬을 약화시키려면 세상의 멸망은 계속되어야 한다.

해일의 삼지창은 그래도 솔로몬의 추격을 무마시키는 데 효과가 컸다.

거센 크라켄들을 품은 해일을 일으킬 때마다 솔로몬은 크게 뒤처졌다.

‘이 틈에 청색대륙으로 가야 한다.’

바다를 가르며 모든 걸 소멸시키는데 웬 늙은 생물의 비명이 들렸다.

“아이구우! 살려주십시오오! 뭔 바다가 송두리째 없어진답니까요! 얼른 우리 아내 만나러 가야 하는데!”

과거 용궁에서 일하던 늙은 거북.

간만의 재회였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거북을 해역과 함께 소멸시켰다.

‘우선, 북쪽에서부터 내려가 보자.’

적색대륙의 후끈한 기후와 다르게 청색대륙 북쪽 끝은 차고 싸늘했다.

난 청색대륙을 거닐던 시절에는 가 보지도 못했던 극북을 날아다녔다.

바닥 곳곳마다 살얼음이 끼어있고 끔찍한 한기가 가득한 극저온의 얼음지방.

때로는 서북쪽 빙산 부근에 위협적인 거대 괴생물이 갇혀 있기도 했다.

‘잘못하면 날뛸지도 모르니까 이건 그냥 얼음째로 파괴시켜야겠군.’

극북을 멸하며 내려가자 고을에서 살아가는 청색대륙 인구가 보였다.

내가 걸어가자 그들이 기겁하였다.

“뒷산! 뒷산이 없어져 버렸어!”

“어라, 저 철가면은? 어쩐지 낯이 익은데, 전생에서 본 것 같은…….”

“지금 그게 문제야! 저놈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있는 것이 모조리 사라지고 있잖아!”

사냥꾼 무리로 추정되는 자들이 내게 장궁을 들었지만, 소멸되었다.

계속 마력을 쏟아내며 고을과 주민을 소멸시키며 청색대륙을 살폈다.

‘범파와 철파 모두 쇠퇴해버렸군.’

예전 같았으면 당장 기도부터 하려 들었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철파나 범파를 상징하는 사찰이나 경전 따위도 거의 보이지 않거나, 쓰레기처럼 낙후되어가고 있었다.

‘하기야 두 교주 모두 죽었고, 내가 벌였던 짓도 있으니까. 이젠 예전만큼 종교가 성행하긴 힘들겠군.’

수도권쯤으로 생각되는 거대고을을 파괴하고 나서 나는 산으로 향했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없애야 해.’

안개가 자욱한 산속을 올라가자 멀리서 떠들어대는 소음이 들려왔다.

불도깨비를 포함한, 각종 도깨비들의 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한껏 마셔라! 껄껄!”

“오늘 취해야 내일 꿈이 죽인다!”

양측에서 거인도깨비 두령과 불도깨비 두령은 술독을 퍼부어 마셨다.

나는 멀리서 도깨비들을 살폈다.

‘간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들이군.’

불도깨비 비환, 쇠뿔도깨비 의쇠, 외눈도깨비 알솔은 한데 모여서 솔잎을 띄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얼큰하게 취한 비환이 떠들어댔다.

“가장 뛰어난 재능의 마검사가 불도깨비를 멸족시킬 것이다! 그 예언이 뭐였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러자 의쇠가 거들었다.

“틀림없이 헛된 예언이었을 거다! 우리가 아는 가장 큰 재능을 지닌 마검사는 이미 떠나가지 않았나!”

알솔은 자기 몸집만 한 술잔에 작은 머리를 퐁당 담그며 크게 반성했다.

“끄아앙!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 헛소릴 믿다니! 우린 바보였어!”

그리고 나는 마력을 날려 세 도깨비 모두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도깨비들을 소멸시켜 강제로 술판을 끝내고 잔치를 마무리 지었다.

계속해서 산속을 날아다니자 인가와는 떨어진, 척박한 장소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집단도 엿보였다.

“교주 이랑께서 사망하고 내부분란으로 범파는 완전 괴멸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희망을 버릴 수는 없지.”

폐가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들.

한편 반대편 산에서도 누군가의 얘기 소리가 마력을 통해 전달되었다.

“범철님을 믿는 세력을 끌어모아야 한다. 신앙심이 없는 것들을 모아서라도 철파를 일으켜야만 한다고.”

다름 아닌 범파의 장로 오삭과 철파의 환관무사 가울이었다.

두 세력은 양측에서 멀리 떨어져 교전하고 있지만, 모두 외견도 궁핍하고 행색도 초라해 예전만 못했다.

난 가면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놈은 아직도 사이비에 대한 희망을 못 버리고 저러고 사는군.’

하여간 꼴도 보기 싫어 범파, 철파의 잔존세력도 단숨에 파멸시켰다.

나는 종교를 뿌리 뽑고 영물을 파괴하며 청색대륙의 시푸른 강을 도려냈지만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다.

‘그냥 손짓만 하면 없어지니까.’

중간중간에 솔로몬에게 따라잡혀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계속 날았다.

진귀한 비술서를 든 신선이나 괴력을 지닌 의적이 나에게 대적하기도 했다.

“저 철가면은 도대체 뭐냐!”

“당장 내 산에서 꺼져라, 이놈!”

부적을 태워 물에 섞어 마신 무당과 죽창을 들고 나선 승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12서클 마법 앞에선 그저 소멸돼버릴 뿐이었다.

폐쇄되어가는 수련관, 초가집, 기와집 할 것 없이 모두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나는 엘프들의 영역인, 달보드레 숲으로 발을 내밀었다.

“큰일이야! 메밀묵을 지켜야 해!”

활을 멘 엘프 소녀 솔이가 메밀묵 항아리를 막아서고는 펄쩍 뛰었다.

“다들 침착하십시오. 모두 저 철가면에게서 숲을 지켜내야만 합…….”

장로가 말했지만, 나의 손짓 한 번에 엘프 고을조차 깔끔히 사라졌다.

산 등지의 동굴을 향해 올라갔을 때는 영엄한 두 생물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이 무척 시끄럽군.”

“글쎄다? 내 밝은 귀에 의하면 오히려 세상이 점점 조용해지는걸. 누구 때문에 다 없어지고 있잖아.”

어째선지 백룡과 구미호는 인간 모습을 한 채 한 자리에 같이 있었다.

바로 그때 솔로몬이 내 근처까지 날아와, 강력한 신력의 창을 날렸다.

챙-! 쩌적……!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서, 명계왕의 진혼검으로 정면에서 받아쳤다.

그러나 강대한 신력에 의해 성좌의 금속으로 이뤄진 검마저 부서졌다.

“커헉!”

[강대한 창에 직격당했습니다.]

[손목의 근육이 파열됐습니다!]

[단, 3번밖에 남지 않은 기회를 사용해 죽음에서 구사일생합니다.]

큰 부상에, 난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추스르고 잠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검마저 부서지다니, 망할.’

어찌나 다급했는지 솔로몬이 숨을 몰아쉬며 백룡에게 크게 소리쳤다.

“저 철가면한테서 세상을 지켜라! 저놈이 세상을 멸하려 하고 있다. 너희라도 힘을 합해 놈을 붙잡아라!”

세상을 지키려고 악역답지 않게 협력을 구하는 모습이 사뭇 눈물겹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백룡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그건 싫은데.”

“뭐?”

“우린 파멸을 택할 자유가 있소.”

미소년의 몸을 가진 백룡은 턱을 괴고는 특유의 궤변을 털어놓았다.

“특히 지금 난 댁처럼 모자란 미물이 동면을 방해해서 아주 예민해.”

“미물? 지금 한낱 용 따위가 신이 될 자에게 미물이라고 한 건가?”

솔로몬이 기막혀하며 불쾌해했지만 날 신경 쓰느라 힘을 쓰지 못했다.

구미호 미호가 키득거리고 있었고, 백룡은 날 보면서 턱을 까닥였다.

“이봐, 안 아프게 죽일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른 해. 지금 너무 피곤해서. 어서 동면보다 깊이 재워주게.”

백룡이 그대로 소멸되었고, 미호는 전혀 겁먹지 않고 웃으며 날 봤다.

“난 죽기는 싫지만, 딱 봐도 사정이 있어 보이네. 널 믿어도 될까?”

“됐어. 너라면 이미 채취를 맡아서 내 정체도 벌써 파악했겠지. 그래서 백룡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지?”

“어머, 눈치도 빨라. 새끼 맡기길 잘했네. 한 번 사는 신이라 그런가? 뭐, 이젠 모시는 사람도 없지만.”

“그런데 넌 내가 지금 죽이려고 하는데, 왜 하나도 저항하지를 않냐?”

미호는 씩 미소를 지었다.

“응. 이상하게도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네가, 세상을 지키려는 저 오만한 놈보다는 훨씬 믿음직하거든.”

나도 픽 웃고 말았다.

손을 휘젓자 구미호가 사라졌다.

“으아아아아!”

솔로몬의 굉음과 함께 번개의 마술이 내려와 나의 육신에 내려쳤다.

죽음모면 기회를 1회 소모하고서 나는 전력을 다해 놈에게서 벗어났다.

‘이제 남은 죽음모면 기회는 1회.’

황색대륙도 멸망시켜야 하는데 점점 상황이 턱 끝까지 조여 오고 있다.

마지막, 청색대륙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주막으로 향하였다.

붓으로 큼지막하게 ‘먼산바라기’라는 간판명이 쓰여진 단출한 주막.

“저 하늘 좀 봐. 색이 왜 저래?”

“어디, 검붉은 하늘만 문제야? 세상이 전부 없어지고 있어. 아이고, 맙소사. 천 년 넘게 장사하는데도 이런 일은 또 처음 겪네. 웬일이야.”

그나마 정신이 말끔한 편인 주모와 철없는 남편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딱히 인사를 하기도 뭣해서, 난 잠시 주모 뒤쪽에서 가볍게 속삭였다.

“대추차나 또 마시러 오겠습니다.”

손을 휘저어서 그들을 소멸시켰다.

그렇게 청색대륙에 있는 해역과 강물, 영토는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청색대륙이 멸망했습니다!]

[광활한 두 대륙이 역사 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경각심을 느끼며 세상에 멸망의 징조가 일어납니다.]

“이런, 제기랄!”

솔로몬의 절규가 멀리서 들려왔다.

동시에 그의 신력이 또다시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고작해야 2시간 20분이 흘렀을 뿐이지만, 나는 두 대륙을 멸망시켰다.

‘이제, 남은 시간은 4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내 손으로 마지막 황색대륙을 멸망시켜야 한다.

***

두 대륙이 소멸되자 세상의 곳곳에서 아주 불길한 징조가 일어났다.

조용하던 가축들이 갑자기 날뛰고, 평화롭게 날던 새들이 벽에 부딪쳐 머리가 깨졌으며, 개가 울부짖었다.

흉악한 몬스터조차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그리고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회귀자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회귀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세력을 규합해, 살아남으려는 부류가 있었는데 흰 사슴뿔 오크 부족이 그러했다.

급하게 주변의 회귀자를 긁어모은 안도니크가 크게 소리쳐 통역했다.

“카파콜은 세상이 멸망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겪고 있다. 나파보는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결혼을 못 한 자신을 원망했다. 바얀은 죽기 전에 사과나무를 심으러 산에 올라갔다.”

“콘도르! 오카르마르!”

흰 사슴뿔 부족의 족장이 외쳤다.

그들이 무기를 들며 나에게 대적하기 전에 서로를 격려하며 북돋았다.

“레카팔시타!”

싸우거나 성교하다가 죽으라는 오크 종족에게 있어 가장 큰 격찬.

그러나 그들의 격찬이 무색하게 그들 모두 나의 손짓에 전멸해버렸다.

「후우으으으……!」

「가, 가, 저리 가아아아……!」

「소멸되고 싶지 않아아……!」

오크 부족 근처에 있는 미궁의 밴시들까지도 내 손에 사라져버렸다.

“지금 수수께끼의 인물이 세상을 멸하고 있다. 규칙에 따라, 우린 중립에서 벗어나 대처해야 한다.”

레샬피티에는 용들과 회의를 열었으나 내가 들이닥쳐서 전부 죽였다.

그리고 자살기도회 본부로 향했다.

“정체 모를 사람이, 과거 회귀자의 왕이 쓰던 것과 똑같은 철가면을 쓰고서 세상을 멸망시키고 있다고?”

일레아흐는 충분히 걸을 수 있을 만큼 컸고, 머리칼도 제법 자랐다.

“누구일지 예상은 가지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지를 못하겠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일레아흐가 가차 없이 명령했다.

“지금 준비하던 일정은 일단 철수한다. 정면의 위험부터 방지한다. 보안대 디코브는 수비세력을 모아라.”

히사네가 그녀의 명령을 전했고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긴장에 젖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앞서 사기를 북돋는 자는 놀랍게도 암론이었다.

“정체 모를 학살자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대륙지배자도 죽였던 우리들입니다. 세상은 결코 쉽게 멸망하지 않아요! 우린 반드시 이번 삶에서 우리가 바라온 죽음을 맞을 겁니다.”

그는 아직은 조금 어색하고 부끄럽단 표정이었지만, 제법 굳건히 부하들 앞에 어깨를 펴고 서 있었다.

“암론 지부장님을 믿자! 아크 리치의 생명그릇을 깨고, 대륙지배자를 죽이는 데 한몫한 영웅이시잖아!”

“맞아, 직접 그 범철한테 검술까지 배우신 회귀자시고. 믿음직하지!”

모처럼 보는 그들이 반가웠지만, 내게는 남은 시간이 그다지 없었다.

깔끔히 자살기도회 세력을 단숨에 소멸시키고 나는 홀연히 떠나갔다.

“망할! 당장 물품부터 챙겨! 여기서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끝장이다!”

시궁쥐 튜크가 이끄는 도둑길드는 다급히 불법품을 숨기다 전멸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산에 올라갔다.

돌로 쌓여진 한적하고 작은 무덤.

‘……아로즈.’

난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전 아내의 무덤을 미련 없이 없애버렸다.

그다음으로 어느 산등성이로 갔을 때 모처럼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바로 소년왕을 지키는 밀밭기사단.

그러나 누구보다 내 눈에 걸린 것은 냉혹한 자태를 한 적발의 기사였다.

‘……마력을 조금은 낭비하더라도, 저 녀석 앞에서만큼은 조심해야 해. 잘못하면 내 정체를 들킬 테니까.’

최대한, 은신하고 걸어서 접근했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자취를 지우며 접근한 보람도 없이, 블라이넨은 나를 향해 말하였다.

“뭔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지.”

“…….”

“느껴져. 없는 척하지 마.”

마법으로 은신까지 했는데 어떻게 날 알아본 건지 모르겠다, 저 자식.

“……나인지 어떻게 알았냐?”

“발소리, 숨소리, 기척, 땀의 향.”

최소한 솔로몬쯤 되어야 알아차릴 기적을 저놈은 어떻게 판별하는지.

부단장 세그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단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가면 탓에 목소리가 다를 텐데, 블라이넨은 정체를 확정해 말하였다.

“언젠가 검을 나누었던 녀석이, 또 회귀자보다 미친 짓을 하고 있군.”

저게 또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녀는 불멸아귀를 죽인 보상인, 백치를 치료하는 명약을 가지고 소년왕 게오르킨에게 돌아와 있었다.

정말로 백치가 치유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소년왕은 이전보다 눈빛이 맑고 선명했다.

“거기, 누가 있어?”

소년왕이 맑은 눈동자로 천천히 걸어오더니 내 근처를 살피며 말했다.

“……삼촌?”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날 살피려던 밀밭기사단과 소년왕 게오르킨이 소멸됐다.

‘이제 모든 곳을 파괴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거울을 깨뜨리고.

영지, 농지, 도회지를 궤멸시키고.

모든 생명체를 휩쓸어 소멸시킨다.

대륙 전역에 장대하게 펼쳐져 있던 누런 밀밭이 나에 의해서 사라졌다.

“제기랄, 지금 당장 멈춰라!”

솔로몬은 여전히 날 추격해 신력을 펼쳤지만, 명백히 이전보다 느렸다.

‘솔로몬은, 계속 약해지고 있어.’

파괴하고 멸할수록 놈은 약화된다.

그러나 나도 슬슬 끊임없이 마력을 소모하는 파괴행위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제기랄, 지쳐서 숨도 못 쉬겠네.’

땀방울이 턱 끝까지 흐르고 숨이 차올라서 정신집중조차 힘겨웠다.

비록 마법의 정점에 도달했지만 그 짧은 새 두 대륙을 멸망시켜버렸다.

제아무리 지금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해도, 지칠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체력이 바닥나 갈 때, 마침내 나는 그리운 장소로 돌아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왔네, 이곳도.’

원래 살던 세상에서 차원 이전된 이후, 내가 10년간 살아온 소도시.

여정을 떠난 이후 처음 돌아온 곳이기에 모든 것이 정겹고 반가웠다.

물론 회귀가 없던 시절과는 느낌이 다르지만, 내게는 고향 같은 장소다.

‘그래도 멸망시켜야 한다.’

여기서 난 꽤나 과거부터 알아왔던 단골집, 공판장, 지인들을 휩쓸었다.

“오랜만이다, 나버드.”

“누, 누구신데 저한테? 으억……!”

간만에 보는 평안한 시절의 옛 친구까지 죽이고 나서야 손을 거뒀다.

늘 다녔던 단골술집의 주인장, 여급까지 깔끔히 학살해버린 뒤였다.

마침내, 이제까지 여정에서 만났던 인연이 모두 나의 손에서 끝났다.

세상에 존재한 모든 이를 죽였다.

[모든 마나를 소진하였습니다.]

[과분한 학살로 인하여 당분간 온전한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지나친 마력 과부하로 혹성 창조자의 힘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죽을 만큼 체력을 썼으나 마지막 죽음모면 기회로 살아남습니다.]

마침내 완전히 고갈되어버린 마나!

계속해서 마력을 공급하던 혹성 창조자의 힘줄도 과부하로 끊어졌다.

끔찍한 탈진을 느끼며 손목을 움켜쥐었을 때, 큰 이변이 벌어졌다.

[제한시간이 모두 지났습니다.]

[솔로몬이 신이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완벽히 충족하였습니다.]

세상의 하늘이 완전히 검붉어지고.

솔로몬은 마침내 신으로 강림했다.

그러나 세상도, 다스릴 사람들도 없는, 전혀 보잘것없는 신이었다.

[황색대륙이 멸망하였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 대륙이 파괴돼 120회차가 파멸했습니다!]

[신神이 강림했으나 그가 다스릴 세상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피를 토할 듯 절규했다.

“120회차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하고 기다렸는데! 마침내 신이 되었는데! 세상이 없다고?”

세상이 없어서 신력을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초라한 신.

그러한 존재 앞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인간이 한 발짝 나섰다.

“할 말은 그게 다냐?”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된 솔로몬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기세로 항변하였다.

“비록 세상은 없지만, 오직 한 사람. 세계에 남아 있는 인간이 있다!”

솔로몬이 시뻘건 눈으로 포효했다.

“그것은 바로 범철, 네놈이지!”

초라한 신의 눈빛이 내게 향했다.

“세상에 속하는 단 하나의 생명체가 살아 있는 이상, 아주 조금의 신력은 남아 있다. 네놈이 죽지 않는 이상, 내 생명은 완전히 꺼지지 않아. 언젠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확실히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아주 작은 신력의 잔재라도 남겨져 있다면, 놈은 언젠가 재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솔로몬, 왜 의문을 갖지 않지?”

“의문이라니……?”

“내가 왜 회귀를 할 수 없었겠어?”

사망 회귀하는 인류 속에서 유일하게 내가 회귀를 할 수 없었던 이유.

“나는 이계 출신이 아니다. 따라서 이곳 세상엔 내가 포함되지 않아.”

사망 회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계에서 태어난 인류로 한정된다.

“이곳과는 다른 세상에서 왔지. 그래서 이제껏 회귀하지 못했고, 살아 있어도 신력에 영향이 가지 않아.”

다른 세상에서 왔기에, 이곳 이계에는 속하지 못하는 이질적인 외인.

그렇기에, 지금의 난 유일하게 솔로몬을 살해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넌 이, 세상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회귀를 못 한다는 것이 널 죽일 이점이 되었군.”

신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고, 최후의 인간은 손에다 힘을 불어넣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

그러나 나는 무無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검이 되었다.

‘불세출의 검.’

정점의 45회차를 겪으며 깨달았다.

검이란, 그저 날이 예리한 쇠붙이만을 일컫는 명사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걸려 있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바로 검이었다.

“끝내자. 세상도 버린 신 새끼야.”

“안, 돼…… 안 돼애……!”

난 무無로 이루어진 검을 신력을 소실한 솔로몬을 향해 내리그었다.

“끄아아아악!”

보잘것없는 몸뚱이가 조각났다.

[적색대륙의 지배자, 솔로몬을 완전한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너무 보잘것없고 약한 존재를 죽여 능력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신을 죽였지만, 허약합니다. 그 어떤 칭호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검술을 제외한, 솔로몬이 당신에게 전한 모든 재능이 소멸됩니다.]

탈진한 내가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까지 이뤄낸 마법의 모든 경지가 사라지고, 재능은 없어져 버렸다.

“…….”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멸망한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륙은 멸망했고, 멸한 잔재의 부스러기나, 일반적인 빛깔도 없었다.

여기 살아 숨 쉬는 것은 나뿐이다.

“…….”

모든 회귀자가 죽었다.

날 위해 울어주던 성녀도, 어떤 때에도 날 믿어주던 친우이자 신하도.

이제는 전부 없었다.

“…….”

회귀자의 세상이었지만, 단 한 번을 살아가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와 같이 회귀를 못 하는 자들마저 모두 죽어버렸다.

둥지를 빼앗기고 우울증에 걸렸던 용도, 애완수도, 유령도, 이종족도.

이제는 전부 없었다.

“…….”

허망하게 멸망한 세상을 바라본다.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누구도 없는 세상에서, 내뱉는다.

“……이제는.”

회귀자가 죽고.

회귀 못 하는 자도 사라진.

버림받은 120회차의 세계에서.

……오직.

“나만 1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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