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97화
서클 한계치.
개인이 오를 수 있는 서클의 한계.
여정의 초반, 황색대륙에서 마탑주 에오실은 내게 이런 평가를 내렸다.
‘그대는 12서클에 오를 수 있는 미친 재능을 지녔소.’
현재까지 세상에서 밝혀진 서클은 고작해야 9서클에 불과하였다.
난 그보다 몇 단계 더 높은 12서클에 오를 수 있는 자질을 지녔다.
‘다만 인간의 수명으로는 결코 마법의 정점까지 오를 수 없다.’
설령 SSS급 마법 재능이라 할지라도 12서클에 도달하려면 인간수명보다 훨씬 길고 오래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천 년의 세월 동안 영겁 수련관에서 끊임없이 수련했다.
그리고 마침내 달성한 12서클.
‘혼자 세상을 휩쓸 수 있는 경지.’
지금이라면, 설령 전성기의 용이라도 단숨에 처치해 버릴 수 있었다.
나는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솔직히 영겁 수련관에서 검술을 수련할까도 고민해 봤었지만.’
45회차에서 정점에 오른 SSS급 검술 재능은 이미 한 번 경험해 봤다.
그러나 상성상 ‘검술’은 어디까지나 그 전투영역이 한정되어 있다.
반면에 ‘마법’은 검술보다 훨씬 오랜 기간 수련해야 하지만 정점이 됐을 때의 압도적인 힘은 그 어떤 능력과도 비교가 불가하다.
‘수련의 난이도가 그 어느 재능보다 드높지만, 정점에 한 번 도달하면 세상조차 파괴할 수 있는 재능.’
정점의 대마법이 육신을 휘감는다.
역사상 그 어느 대마법사보다, 심지어는 아크 리치보다 지고한 마력.
이것이, 내가 천 년 동안 마법에만 몰두해 노력을 기울인 이유였다.
[9서클 마법 전역관찰이 적색대륙 지배자 솔로몬을 관찰합니다.]
[8시간 후, 솔로몬은 완전히 전지전능한 신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 8시간.’
8시간이 흐르면, 솔로몬은 전지전 능한 신이 되어서 세상을 지배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두진 않겠다.
‘타임 스톱.’
시간의 돌을 써야만 1회 사용 가능했던 9서클의 대마법, 타임 스톱.
그러나 나는 아무런 시전시간조차 없이 가볍게 세상의 시간을 멈췄다.
‘천문학적인 마나가 소모되지만, 단층으로 빨려드는 페널티도 없다.’
흩어지는 모래알도, 나부끼던 잔바람도 모두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천 년간 수련했다더니 과연 빈말은 아니군. 그 아크 리치조차 지금의 너만큼 강대한 마력은 없었다.”
시간을 멈췄지만, 전능해지는 솔로몬은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다.
완전하게 정지된 세상 속에서, 나와 솔로몬 오로지 둘만이 움직였다.
“세상의 시간은 멈추어도, 나는 멈출 수 없다. 이제 그런 규칙에는 얽매이지 않는 힘을 얻었으니까.”
“상관없어. 시간을 멈춘 것은 지금 이 결전을 방해받기가 싫어서니까.”
시간을 멈추며 엄청난 마나가 소모되고 있었지만, 내 마력은 충분했다.
“카오스 게이트.”
사막에서 사철沙鐵이 올라와 평방 1킬로미터 크기의 대마법진을 소환한다.
어느 마법사도 닿지 못했던 10서클 마법을 단신으로 실행한 것이다.
사철로 그려진 대마법진이 빛나며 하늘에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혼란의 마법, 카오스 게이트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혼돈의 차원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버립니다.]
[카오스 게이트를 5시간 이상 방치하면 인류의 큰 위협이 됩니다.]
[당신이 1순위 먹잇감으로 ‘대마술사 솔로몬’을 선정했습니다.]
대상을 빨아들여 나조차 모르는 공간으로 추방시키는 혼돈의 차원 문.
카오스 게이트로부터 높은 굉음이 일어나며 솔로몬을 빨아들이려 했다.
“우습구나. 한 번 사는 자여.”
그러나 솔로몬은 비웃음을 지으며 빨려들지 않게 자기 몸을 고정했다.
그리고 마술의 힘을 끌어모아 게이트를 폐쇄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노린 것은 단순히 솔로몬을 추방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난 마력으로 부양해 카오스 게이트에 거침없이 오른팔을 집어넣었다.
[오른팔로 마나를 방출합니다.]
[카오스 게이트가 지고한 마력에 괴로워하며 아이템을 토해냅니다.]
[‘BO8925 혹성 창조자의 힘줄’을 가져왔습니다.]
원하는 아이템을 얻고서, 나는 스스로 카오스 게이트를 폭파시켰다.
콰가강!
솔로몬이 왼팔을 들어 폭발로부터 안면을 지키고 나서 눈살을 찌푸렸다.
“해괴한 짓을 해대는군.”
“너에게 이겨야 하니까.”
이번엔 솔로몬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빛을 내뿜으며 마술로 반격했다.
나는 드높은 마나로 베리어를 쳐서 솔로몬의 공격을 곧바로 차단했다.
그러나 완벽한 방어는 불가능했고, 나는 버티다가 크게 뒤로 밀려났다.
‘……조금 힘겹기는 하지만,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볼 수는 없어.’
나는 비등하게 상대하는 것이다.
신이 되어가고 있는 최후의 적을.
카오스 게이트로부터 가져온 특수한 힘줄을 나는 손목에다가 붙였다.
“크흣!”
힘줄이 팔목에 달라붙으며 맥박이 요동치고 장대한 힘이 몸부림쳤다.
그러나 강대한 마력으로 그것을 억누르며 나는 새 마법을 시전했다.
“혹성 창조.”
[혹성 창조자의 힘줄이 마력을 부풀리고, 부담을 버티게 해줍니다.]
[또한, 마나가 계속 공급됩니다.]
[더욱 견고하고 강력하게 강화된 11서클 마법을 시전합니다.]
모래를 담아서 마력을 부여해, 둥그런 혹성을 만들고 생기를 넣는다.
내가 일궈낸 집채만 한 소규모 혹성에서 바위와 자갈들이 생겨났다.
“주제넘게 신 같은 짓을 하는군.”
“천 년 동안 헛짓거리만 했겠어?”
내가 마력을 담은 손으로 솔로몬을 가리키자 혹성은 그쪽으로 날아가 터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운석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치명적인 폭발이 적을 휘감았다.
‘이건 소규모 혹성의 내핵 자체가 폭발해 버리는 초신성이니까.’
그래서 운석보다 폭발강도가 극한으로 높고 강한 방사선을 토한다.
그러나, 그 끔찍한 폭발 속에서도 솔로몬은 살아남아서 걸어 나왔다.
피부가 형편없이 갈라지고, 근육이 흉측하게 드러나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몹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심기에 거슬리는 짓만 해대는군.”
솔로몬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창조란 건, 바로 이런 것이라네.”
모래에서 독특한 형체가 일어섰다.
인간의 절반에 해당하는 몸집에, 이목구비가 흐려 모래 인형 같았다.
그러나 골렘 같은 인공생명체와 달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직 학명이 존재하지 않는 신인류 1종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뇌가 없고 모래를 다루는 데 뛰어난 자들로 번식성이 뛰어납니다.]
[태산이 모래가 될 만큼 시간이 흐르면 영장류가 될지 모릅니다.]
난 혹성을 창조했지만 아예 솔로몬은 즉석에서 신인류를 탄생시켰다.
“쿠오오오!”
수십 명의 신인류가 내게 모래폭풍을 토해냈지만, 마력으로 놈들을 휩쓸었다.
“쿠어어억!”
방금 태어났던 신인류는 허무하게도 전부 모래더미로 되돌아갔다.
내게 전멸하지 않았다면 신인류의 국가가 탄생할지도 몰랐을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아직, 12서클의 마법은 쓰지 않았어.’
12서클이야말로 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 중 가장 사기적이고 강력하다.
‘세상을 휩쓸 수 있는 정점의 힘.’
그러나 12서클의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나 역시 준비가 필요했다.
“어디, 이것도 이길 수 있을까?”
솔로몬이 악마의 펜타그램을 빛내며 내뻗자 악마 떼가 소환되었다.
어딘지 모르는 세상에서 소환된 수백 마리나 되어 보이는 악마 떼!
각기 철갑의 피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기본 4장의 날개를 가졌다.
과거 황제 쟌이 소환한 소악마 무리에 비해서 훨씬 위험해 보인다.
“소환이라면 이쪽도 지지 않지.”
난 진혼검을 역수로 땅에 박았다.
[숨겨진 성능을 발휘합니다.]
[진혼검으로 냉기의 대요괴, 사타즈를 이승으로 소환하였습니다.]
칼날로부터 초록색 빛이 작렬한다.
곧은 원뿔을 가진, 불멸아귀만 한 덩치를 지닌 얼음요괴가 소환됐다.
“흐음. 4천 년 만에 맛보는 산 자들의 세상의 냄새란. 날 소환한 자여. 부디 나에게 물을 넘겨다오.”
오만에 들어찬 대요괴의 꼬드김.
나는 곧장 진혼검으로 수통을 찢어 대요괴를 향해 물줄기를 흩뿌렸다.
“오오!”
[사타즈가 정수를 마셨습니다.]
[죽은 자의 요력이 폭주합니다.]
[명계왕의 힘이 담긴 검에도 불구하고 요괴가 복종을 거부합니다.]
물방울을 꿀꺽꿀꺽 삼킨 대요괴가 입맛을 다시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핫! 멍청하긴! 방금 마신 한 모금으로 갈증이 회복됐다. 되찾은 힘으로 이승의 피를 맛보겠느니라!”
그리고 내가 칼을 허공에 내리긋자 대요괴를 향해서 별이 추락하였다.
“끄아아악!”
순식간에 별과 함께 터지는 요괴!
[살얼음별을 떨어뜨렸습니다.]
[대요괴의 죽음이 별의 폭발을 강화해 사막 일부가 얼어붙습니다.]
검디검은 사막에 서리폭발이 벌어지며 차디찬 눈 폭풍이 휘몰아쳤다.
덕분에 폭풍의 코앞에 있던 솔로몬 무리는 완전히 삼켜져 버렸다.
“카아아악!”
“사, 살려줘라!”
수백 악마 떼가 폭풍에 휩쓸린다.
그리고 얼음이 되어서 부서졌다.
“크윽!”
전능해지고 있는 솔로몬조차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강한 눈 폭풍!
거기에 나의 마력까지 더해지니 솔로몬은 함부로 피할 수도 없었다.
역시나 빠른 속도로 동상이 해동되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봉인되었다.
‘지금이다.’
나는 손안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마법재능을 정점까지 수련한 뒤로, 마나가 모자란 일은 없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상당량의 마나가 필요했다.
‘최후의 12서클 마법.’
이것은 바로 수많은 시련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혼자서 창조한 주문.
대상을 ‘삭제’해 버리는 마법이다.
‘12서클 마법의 원리는 간단하다.’
내가 대상을 향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은 원래 없던 것처럼 사라진다.
고통조차 느낄 새 없이 세상에 살아 있는 그 모습 자체가 삭제된다.
‘존재 자체를 말소해 버리는, 그야말로 막을 방법조차 없는 대마법.’
하지만 대상이 나에 비해서 강력할수록 고도의 정신집중과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다.
특히 신에 가까운 솔로몬을 없애기 위해선 오랜 정신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껏 싸우며 난 12서클의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져라.”
마력을 담아, 녀석을 가리키는 순간, 솔로몬의 형체가 사라져버렸다.
휘이이잉.
한참을 긴장하며 홀로 서 있었다.
하나 휑한 사막에 바람만 스친다.
비로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겼어.’
천 년간 수련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간의 긴 여정이 마침내 끝났다.
‘끝났구나. 모든 것이. 이제야.’
지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리에 힘을 풀고 쓰러지려 할 때.
“긴장을 늦추긴 조금 이르지 않나?”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고 손에 마력을 담았다.
“……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식은땀이 흐르며, 몸이 굳는다.
12서클 마법으로 ‘삭제’된 솔로몬.
그가 놀랍게도 동상까지 전부 나은 평소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분명 조금 전에 내가 죽였는데.”
“방금 부활했지. 신력으로 말이야.”
……부활?
끔찍한 속도의 자가 치유도 모자라서, 이제는 놈이 부활까지 한단다.
믿기지 않는 발언에 몸이 얼어붙었다.
“참, 그대가 한 가지 잊고 있는데.”
솔로몬이 히죽 짓궂게 웃어 보였다.
“이제, 시간이 꽤 흐르지 않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솔로몬은 전지전능한 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즉, 오래 지날수록 놈은 강해진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싸우며 놈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주고 말았다.
“그 마법은 굉장하군. 죽으면서도,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시간이 몇 초만 일렀어도, 나조차 감히 죽음에서 부활하지는 못했을 걸세.”
나는 이를 갈고 관찰마법으로 힘이 변해가는 솔로몬을 살폈다.
[9서클 마법 전역관찰이 적색대륙 지배자 솔로몬을 관찰합니다.]
[4시간 후, 솔로몬은 완전히 전지전능한 신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현재의 적은 완전무결합니다.]
‘놈이 신이 되기까지, 이제 4시간.’
그러나 솔로몬은 부활까지 가능할 만큼 전지전능에 가까워져 있었다.
“서로 간을 보는 시간은 끝났네.”
솔로몬이 손뼉을 가볍게 마주쳤다.
그러자, 멈춰진 시간이 흘러갔다.
놈이 시간마저 다루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마나를 쏟으며 정점까지 익힌 모든 마법을 나는 전력을 다해 발휘했다.
하지만 12서클의 마법 ‘삭제’를 썼음에도 솔로몬은 부활할 뿐이다.
“아까 그 마법, 두 번 통하지는 않아. 신력이란 게 만만하진 않거든.”
나는 이를 악물고 마나를 쏟았다.
사막이 뒤흔들리고, 몰아치며, 붕괴되고, 재창조되기를 계속 반복했다.
솟아오른 화산이 터지며, 칼날 같은 폭우가 몰아치고, 공간이 깨진다.
그러나 나의 공격과 비등하던 솔로몬의 힘이 점차 월등해져만 갔다.
“이제야 몸소 와 닿지 않나?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다는 현실이.”
난 온 힘을 쏟아붓느라 감히 잡담도 하지 못했지만 놈은 여유로웠다.
“설령 천 년을 수련해 재능을 키워도 신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네. 전지전능하니까.”
그리고, 마침내.
솔로몬의 압도적인 신력이 내 마법을 삼켜버리고 나의 몸을 덮쳤다.
“크윽!”
고밀도의 마나로 베리어를 쳤는데도, 머리가 깨지는 충격을 받았다.
[죽음 이후의 명계가 보일 만큼 아득히 초월적인 일격을 맞았습니다.]
[영겁허리띠가 절명하는 위기로부터 당신을 1회 구원합니다.]
뒷골이 크게 당기는 느낌과 함께 피를 토했다.
뇌진탕이 크게 왔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하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
모래에서 꿈틀거리며 악을 쓴다.
빌어먹을 상황을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의 나는, 놈을 이길 수 없다.
이마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검은 모래가 떨어진 피를 먹는다.
피우지도 않는 연초가 입에 당길 정도로, 지금 상황은 밑바닥이었다.
“…….”
무려 천 년.
수련관에서 보낸 천 년의 세월 간 고된 수련을 괴로워하고, 견뎌왔다.
“……흐.”
지독한 고생에 자살충동을 느끼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가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서, 세상에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솔로몬이라는 개인에 의해서 통제되는 세상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평안한 일상을 되찾고 싶었으니까.
“하…….”
그래왔는데…….
그래왔는데, 놈을 이길 수 없다고?
“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간 해온 고생은 뭐였는가.
결국은 어지러워 구토를 했다.
“쿨럭, 씨발…….”
그저 억울함과 짜증만이 치밀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욕하고 싶었다.
반면에 솔로몬은 나 따윈 거들떠보지 않고 스스로의 힘에 도취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영역까지 시야가 넓혀지는군. 우주가 이리도 컸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신의 시선.”
놈은 아직 완전한 신이 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힘에서 밀리고 말았다.
난 고작해야 몇 시간을 방어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신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 되겠어. 결국은.’
결코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식해야 했다.
그 어떤 대륙지배자 앞에서도 난 포기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신만큼은 꺾을 수가 없었으니까.
“…….”
일어설 수 있는 기운조차 없었다.
아니, 일어서는 것조차 싫은지도.
피와 모래에 젖은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저 바닥에 쓰러져 있다.
그 순간.
“대장!”
귓가를 스친 목소리에 고갤 든다.
희미한 시선 속에 무언가 보였다.
멀리서, 내게 뛰어오려는 카티에를 쿰룸이 이를 악물며 말리고 있었다.
“대장, 도망쳐요!”
“안 돼! 가면 죽습니다. 이젠 우리가 낄 싸움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으면 당신도 회귀할 수 없잖아요!”
난 쿰룸의 대처에 찬사를 보냈다.
지금 그녀마저 배가 찢어져 쓰러진 퀸소히니베나 안구 한쪽을 잃은 헤르탄처럼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아니, 어차피 솔로몬이 우릴 살려둘 리 없으니까 전부 죽게 되겠지.’
빌어먹을.
‘……미안해.’
카티에.
네가 기적 때문에 일찍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결국은…….
‘……어.’
바로 그때.
‘잠깐. 카티에?’
나의 머릿속을 스치는.
‘잠시만 있어 봐.’
내가 놓치고 있던 사소한 의문.
‘지금 이 상황, 뭔가 이상하잖아.’
순간, 지금 상황에서 부자연스러운 점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이대로 솔로몬이 신이 되고, 내가 죽으면 얘기가 부자연스러워.’
바로 카티에가 인과율의 교차공간에서 보았던 미래 파편.
‘카티에는 미래의 내가 그녀를 해하려는 미래 파편을 봤다고 했다.’
최후가 가까워지는 지금, 나는 카티에를 배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솔로몬한테 죽으면, 그 미래 파편은 뭐였던 거지?
‘뭔가가 이상해. 다시 생각해 보자.’
그냥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걸린다.
피 같은 1초, 1초가 흘러가고 있지만 시작된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인과율 교차공간에서 겪었던 일들을 다시금 상기했다.
‘만일 이번 회차에서 회귀를 멈추어도 3년 후, 난 죽게 될 거예요.’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한다.
‘내 전생을 봤다고 했죠? 그렇다면 45회차의 삶도 기억하고 있나요?’
물론 전부 기억하고 있다.
내가 회귀자의 왕이었고 카티에는 기적 때문에 단명했던 45회차의 삶.
내가 거기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꼴 보기 싫은 거물을 끌어모아서 마수도 때려잡고, 퀸소히니베랑 카티에의 뼈도 써대고, 유적에서 진리의 문구를 찾는답시고 고생을…….
‘……잠깐만.’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미래파편으로 인해 생기는 모순을 파헤치려다 엉뚱한 단서가 잡혔다.
‘그래, 45회차에서 그걸 얻었잖아.’
나는 진심으로 멍청이가 분명했다.
영겁 수련관에서 보냈던 시간 동안 가장 큰 단서를 놓치고 있었으니까.
‘……진리의 문구.’
45회차에서의 과업을 성공하고 120회차에서까지 가져오게 된 문구.
옛 유적에서 발견한,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세상의 진리가 적힌 글귀.
“45회차의 전생에서 가져온 진리의 문구를 확인하겠다.”
나의 앞에 어떤 문구가 떠올랐다.
난 천천히 그것을 속으로 읽었다.
또 바보 같게도 이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난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던 걸지도 몰라.’
조금씩, 가망성이 없다고 포기했던 현실이 내 머릿속에서 뒤집어진다.
완전히 자포자기한 마음을 갈아엎고, 차가운 머리로 추리를 시작한다.
흘러가는 몇 초간 나는 단서들을 떠올리고, 찾아내, 미래를 쫓아간다.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 지녀 온 일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미래를 암시하는 파편들, 예언들, 예지들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간다.
사막드래곤이 내게 예언한 미래.
‘세상이 멸망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미래의 향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사망하며 유언을 남기는 헤르탄.
‘그간 모실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범철. 나의 폐하시여.’
인과율 교차공간에서의 미래파편.
‘잠깐, 미래파편 하나를 봤어요.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에서, 대장이 나를 해하려는…… 그런 광경.’
그리고 언젠가 혼자 남게 되는 나.
‘어째서 지금까지 몰랐었던 걸까.’
모든 조각을 잡아채서 복잡한 퍼즐을 맞추자, 인과가 짜 맞춰져 간다.
이윽고 모든 실마리가 풀리고 답이 드러났을 때 난 일어서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겪은 그 모든 여정이 예지하는 단일한 미래는 자명했다.
‘온갖 복선을 해소할 유일한 정답.’
이제까지 나는.
주어진 운명을 부수려고 하였다.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하고 모두를 지키겠다는 영웅적인 일념뿐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내가 그래야만 하는 거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자, 육신에서 활기를 품은 불길이 타올랐다.
[3할의 마나를 전환하여 11서클 마법 ‘축복의 불길’을 둘렀습니다.]
[용에 버금가는 생명력과 상위 골렘에 준하는 방어력을 얻습니다.]
[생명력, 기력, 마나 및 모든 회복속도가 크게 증가하며 마력이 넘치는 명소에선 지치지 않습니다.]
[24시간 동안 총 24회, 죽음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생명력 대신 마나를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지닌 최고의 생존 마법.
그러나 솔로몬은 다시 일어선 나를 향해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최후의 발악인가. 그런 마법으로 생명력과 방어력을 끌어올린다고 한들, 내가 완전한 신이 되기까지 몇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을 뿐이네. 결코 나한테서 승리할 수는 없지.”
“그 몇 시간이면, 충분해.”
최소한 이제 나는 솔로몬이 신이 될 때까지 ‘생존’할 수 있게 됐다.
솔로몬이 날 죽일 수 없는 몇 시간, 단지 그것뿐이면 충분했다.
“……이젠 받아들일 테니까.”
“무엇을 말이지?”
“세상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결코 순탄치 않았던 여정.
끝에서 내가 정한 답은 이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겠다.”
스스로 정한 답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이 정당한지도, 옳은 행위인지도 알 수 없지만 지금 분명한 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적색대륙 지배자가 조소를 짓는다.
“실망스럽구나. 한 번 사는 자여. 결국 그 정도 인간이었나. 너마저.”
“그래. 난 ‘인간’이지. 너와 달리.”
나는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철회하지 않을 선언을 했다.
“지금부터 나는, 살아 있는 모든 이를 죽이고 세상을 파멸시키겠다.”
***
“……한 번 사는 자여.”
놈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결국 너도 최후에는 미치고 만 것인가. 여러 번 살아온 우리들처럼.”
솔로몬이 명백히 실망한 기색으로 날 쓰레기처럼 하찮게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모든 이를 죽이고 세상을 멸하겠다니. 무슨 헛소리지?”
그런 그의 앞에 나는 마력으로 한 가지 문구를 보일 수 있게 써냈다.
[신은 대적 불가하다. 신력이란 우리 세상이 있기에 이뤄진 것이니.]
그러나 그것을 모두 읽은 솔로몬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이것이 뭔가?”
“진리의 문구. 45회차에서 가져온,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의 진리.”
“그럼 더욱 절망적이겠군. 신에게는 대적 불가하단 것이 진리이니까.”
“아니, 내가 주목한 것은 두 번째 문장이다.”
솔로몬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말했다.
“신력은, 세상이 있기에 이뤄진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다면 세상이 사라지면, 너의 그 전지전능한 신력도 없어진다.”
아주 간단한 논리였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없다면, 신의 위상도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없으면, 신력도 잃게 된다.
120회차의 세계를 완전히 파멸시켜야지만, 솔로몬을 죽일 수 있다.
최후의 적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런 오랜 침묵이 있은 뒤, 솔로몬이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멸망시키겠다는 건가? 나의 신력을 없애기 위해 이 세상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솔로몬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군. 모두 죽일 수 있겠나? 네가 사랑하는 동료들, 그리고 네가 살아온 이 세상을 전부 네 손으로?”
생각할수록 황당한지 그는 어이없는 기색을 조금도 감추지 못했다.
“웃기지 말게. 범철. 나도 자네를 오래 보아 와서 알아. 당연한 소리지만 모두를 죽이면, 자네는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어. 자넨 결코 그런 짓을 할 위인이 되지 못하지.”
한참을 킬킬거리던 솔로몬은 내게 분명히 조롱하는 어조로 일갈했다.
“모두를 죽이겠다고? 세상을 멸하겠다고? 오, 제발 서로 맡은 배역을 혼동치 말자고. 그건 나처럼 매력적인 악역이나 내뱉을 대사 아닌가.”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내가 만약 널 죽이고 네가 헛되이 낭비한 숙원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솔로몬의 입이 다물어졌다.
드디어 처음으로, 그에게 희미하지만 긴장한 낯빛이 여렸다.
“무슨 소리지?”
“세상을 멸망시키고, 너를 죽이면 난 회차 목표를 이루게 된다. 그럼 한 가지 숙원을 빌 수 있게 되지.”
솔로몬은 전지전능한 신이 되기 위한 숙원을 빌었고, 실패로 끝났다.
숙원 하나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한 것은 한낱 인간에게는 과욕이기에.
하지만 내가 다른 숙원을 빈다면?
“그 숙원을 사용한다면 나는 멸망시켰던 세상을 복구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죽인 솔로몬, 넌 제외하고.”
설령 모두가 죽고 120회차의 세계가 멸망할지라도.
솔로몬을 죽이면 숙원으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가 있다.
“……웃기고 앉았군.”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단 것을 전능해지는 네 자신이 입증하고 있다.”
회차 목표 완수 뒤에 뭐든 이룰 수 있는 숙원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도, 그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었다.
세상을 멸망시켜, 솔로몬을 죽인다.
‘당연히 거부감이 끔찍하게 크고 괴악한 미친 짓이지만, 해야만 해.’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이 평범한 이는 생각도 못 할 미친 짓이라는 걸.
하나 지금 이대로 가만히 두면 세 상은 솔로몬의 손아귀로 들어간다.
식은땀이 흐르고 이빨이 떨리지만 언젠가, 스스로 각오했던 일이었다.
‘회귀자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회귀자보다 미친 짓을 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솔로몬이 입을 열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다 죽이겠다고? 어째서 네가 말하는 세상에는 ‘인류’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지? 과연 세상의 정의가 살아 있는 인류까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건가?”
되도 않는 블러핑을 쳐대는 걸 보니, 녀석도 어지간히 당황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들었던 과거의 말을 입으로 그대로 옮겼다.
“세상은 그저 단일하다 볼 수 없지. 수많은 구성요소로 채워져 있어. 생명체, 건축물, 자연, 대륙까지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세상 자체이지.”
솔로몬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반면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줬다.
“네가 내게 말해줬었잖아, 솔로몬.”
이것은 다름 아닌, 솔로몬 그가 포도밭에서 내게 말해준 이야기였다.
놈의 힘을 전부 없애기 위해선 세상의 모든 걸 파괴할 필요가 있다.
솔로몬이 날 죽이지 못하는 수 시간, 난 120회차를 멸망시킬 것이다.
“말도 안 돼. 네놈, 네놈이…….”
혼란해 하는 솔로몬에게 걸어간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모든 예지가 이것을 가리킨다.’
카티에가 나를 칼로 찌르는 예지가 실현됐지만,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본인에게 주어진 운명은, 본인 자신이 해석하기 나름이다.
끔찍한 예지가 실현되어도, 세상은 솔로몬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솔로몬을 꺾을 유일한 전략.’
전지전능한 신에겐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세상을 파괴해 신에게서 전지전능한 힘을 앗아갈 것이다.
“망할……. 말도…… 말도 안 돼!”
날 바라보는 솔로몬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제야…… 이제야, 알겠군. 네놈에게서 맴돌던 불길함의 정체를!”
“그래, 이제 실현이 될 순간이지.”
“그 입 닥쳐라!”
얼굴이 새빨개진 솔로몬이 본인의 힘을 지키기 위해 고함을 내질렀다.
“제길, 제기랄! 내가…… 내가, 네놈으로부터 이 세상을 지켜내겠다!”
이제는 상황이 뒤바뀌었다.
최후의 적은 세상을 지키려 하고.
나는 모두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솔로몬.”
그러니, 내가 뱉을 말은 당연하다.
“너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