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91화
“출정이 코앞인데, 멀었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드워프 장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조수들과 온갖 고생을 하고 있었다.
산더미 같은 운석조각을 화로로 녹이고 형틀에 굳혀 망치로 두들긴다.
출정을 앞두고 장비제작과정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내가 성좌의 금속으로 제작된 장비에 섞으라고 한 특이금속 때문이다.
바로 불멸자의 갑의 파편!
‘불멸자의 갑의는 최고의 내구력을 지닌 방어구였지. 비록 아크 리치에 의해 파괴된 전적이 있긴 하지만.’
청색대륙의 불도깨비들조차 제련할 수 없다고 포기했던 파편 조각이다.
불멸자의 갑의를 재가공하는 것도 적색대륙에 온 이유 중 하나였다.
불멸자 갑의 파편을 본 드워프 장인은 세심한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이 금속조각, 무척 특이하오. 명계의 잔불이 담겨 있군. 이것도 운석 조각처럼 이 세상 금속이 아니오.”
“재가공이 가능하겠습니까?”
“평범한 장비에는 섞을 수 없소. 하나 성좌의 금속이라면 다르지. 정말 간만에 죽도록 작업해 봐야겠어.”
운석조각을 녹여 성좌의 금속을 추출하고, 불멸자의 갑의를 재가공하기 위해 드워프들은 밤을 지새웠다.
밤새워서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고, 화로가 쉬지 않고 가동되었다.
코피를 흘리며 과로한 나머지 픽 쓰러지는 조수들은 일상다반사였다.
“우리가 뭐라도 도울 게 없습니까?”
“가시오! 내 평생의 역작에는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하게 할 테니까!”
안쓰러워 뭔가 도우려고 해도 드워프 장인은 고집스레 거부하였다.
초대형 몬스터에게도 일격을 먹일 수 있다는 전투용 망치로 운석조각을 세차게 두드리고, 극지대에서 퍼 왔다는 냉각수로 담금질을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스러운 과정을 밟았음에도 장비제작과정은 느렸다.
“결코 서두르지 말고 신중해라. 우린 최고의 장비를 뽑아내야 하니까.”
이틀째가 되자 드워프 조수들이 통증을 호소하며 팔이 마비되었다.
“파, 팔이 안 움직여!”
“누가 망치질 좀 대신해줘!”
“대체 무슨 철이 저렇게 딱딱해?”
그나마 카티에가 치유해 주지 않았다면 열댓 명은 과로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사흘째.
휑한 눈의 장인이 후들후들 떨며 완성된 장비를 내 앞에 들고 왔다.
“됐어! 이것이 평생의 역작이오!”
은빛 검신에 흑색 선이 그어진 검.
그것은 수수해 보이는 장검이었다.
헤르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많은 운석을 녹였는데 고작 검 한 자루밖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운석을 이만큼이나 녹여서 정제한 거지. 순도도 아주 높소.”
나는 그것을 쥐고 들어보았다.
‘가볍다. 그 어떤 검보다도.’
꽤나 검신이 긴데도 얇은 깃털처럼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검의 성능을 자세히 살폈다.
『명계왕의 진혼검』
명계의 금속과 성좌의 금속이 결합해 탄생한 최고의 명검. 명계를 다스리는 이의 무서운 힘이 깃들었다. 드워프 장인이 일궈낸 최고의 역작.
+운석을 부순 자만이 장비 가능.
+방어력을 완전 무시하며, 규격 외의 존재에게 큰 파괴력을 행사한다.
+모든 능력치 120% 증가.
+하루 3번, ‘명계의 맹염’ 사용 가능. 불꽃에 달궈지면 사용횟수 충전.
+결코 훼손되지 않으며, 세월이 흘러도 녹슬거나 변질되지 않음.
+바라보는 별을 떨어뜨릴 수 있음.
*3가지 특수성능이 숨겨져 있다.
방어력을 완전 무시하는 괴물 검!
태어나서 이렇게 괴악한 검은 얘깃거리에서조차 들어본 바가 없었다.
내가 한 번, 검을 휘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입니다. 휘두르는 손맛도 제가 써온 어떤 검보다 훌륭하고요.”
“크흐흐…… 당연하…… 어억.”
일을 끝낸 드워프 장인은 뭐라고 말할 새 없이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쿰룸이 장인을 추스르며 말했다.
“이제 출정에 앞서 모두에게 드워프제 장비를 분배해 드리겠습니다.”
우린 드워프의 창고로 향하였다.
인간의 솜씨로는 볼 수 없는 최상품의 장비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
쿰룸이 열의에 차서 설명하였다.
“이 황금의 치유석은 진귀합니다. 마력이 늘어나고 소유자가 스스로의 회복도 가능하지요. 때로는 변형도 가능하고요. 특히나 치유력을 가진 인물에게는 효과가 배가됩니다. 이것은 어느 손재주 좋은 드워프 전사가 양팔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시간이 없으니 유래는 빼둡시다.”
카티에가 치유석에 손을 짚었다.
“치유석은 내가 갖는 게 좋겠어요.”
“나는 이 아름다운 마력을 내포한 적보석을 가져가겠다는 것이야.”
“저는 청록의 지팡이가 좋겠군요.”
창고에 있는 드워프의 장비를 모두가 적절하게 찾아서 장비하였다.
“캬아앙.”
“……여기 내 뿌리에 뿌리기 좋은 영양제도 많이 있어.”
“……!”
“꾸왁!”
“뭐, 나쁘지는 않네. 발찌를 다니까 날갯짓도 훨씬 빨라질 것 같고.”
심지어 다섯 애완수에게 맞는 장비도 있을 만큼 폭도 넓고 다양했다.
그때 카티에가 나에게 다가왔다.
“대장. 이거 가져가요.”
그녀가 내민 건 시간의 돌이었다.
“그래, 뭐라도 연구해 찾아냈어?”
“아뇨. 딱히 별것은 없던걸요.”
돌이켜보면, 이때 카티에는 복잡미묘한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랬었냐. 싱겁기는.”
카티에가 돌려준 시간의 돌을 난 가슴팍에 넣고서 소중히 보관했다.
‘아직 내가 시간을 멈출 기회는 1회 남아 있으니까.’
최종결전에서 유용하게 쓰이리라.
하여간 탈진한 장인 무리를 뒤로 하고 우린 5천 드워프와 함께 출정했다.
***
“세상이 조금은 이상해진 것이야.”
“조금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헤르탄의 그 말 그대로였다.
사막의 하늘이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둡고, 피처럼 검붉게 변하고 있다.
단순히 한 지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륙 전역이 저렇게 변해갔다.
“하늘이 왜 갑자기 저렇게 변한 거죠? 이런 일은 겪어본 적 없어요.”
카티에가 불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일부 정신이 불안정한 회귀자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수없이 회귀했지만, 이 시기의 적색대륙의 하늘이 저렇게 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세상이 멸할 징조다!”
“솔로몬이여! 우릴 지켜주소서!”
심지어는 우리가 지나는 마을의 주민들 대부분은 어딘가로 피난하기도 했다.
나는 피난민을 우두커니 보다가 익숙한 경전의 표지를 보고서 말했다.
“여기서도 믿는 건가, 솔로몬교?”
“그런가 보네요.”
대마술사 솔로몬을 섬기는 종교.
적색대륙에서 가장 널리 퍼진 주교는 이곳 회귀자들의 버팀목이었다.
“위대한 솔로몬께서 말미의 날 다가오는 멸망을 몸소 막아주시리라!”
“오오, 세상의 구원자, 솔로몬!”
“만물을 지키실 그분을 찬양하라!”
“오오, 민중의 인도자, 솔로몬!”
나앉아서 예배를 드리거나 포교활동을 펼치는 회귀자도 꽤나 있었다.
“고작해야 하늘이 붉어진 것뿐인데, 다들 너무 소란 떠는 것 아냐?”
“하지만 석양하고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피처럼 붉잖아요. 다들 회귀하며 겪어보지 못한 변수라구요.”
확실히 이상한 일이기는 하군.
‘하필 결전을 앞둔 상태에서 변수라니. 진짜 멸망의 징조라도 되나.’
괜히 사막드래곤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미래의 향기’를 맡아 안다고.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앞서 보았던 미래 파편들.’
하지만 이전에도 그에게 대답했듯 내가 결정한 길은 하나뿐이다.
‘정해진 미래라면, 내가 바꾸겠다.’
며칠을 무리해서 걸어, 마침내 우리가 도착한 곳은 흑영사막.
최후의 적, 적색대륙 지배자와 마지막 결전을 벌이게 될 장소였다.
***
현재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인형이 예고했던 드워프 왕이 사망하기 직전의 날짜가 바로 오늘이다.
‘키 작은 자’이자, 나의 ‘조력자’.
오늘 안에 왕을 찾지 못하면 정보도 얻지 못하고 조력자는 사망한다.
‘절대 오늘을 넘겨서는 안 된다.’
다들 조급한 마음으로 흑영사막을 횡단했다.
특이하게도 재처럼 검은 모래로 둘러싸여 있는 기분 나쁜 사막이었다.
그저 걷기만 해도 보통 위험한 곳이 아니란 것이 느껴지는 영역이다.
“이곳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서식하는 몬스터가 보통은 넘으니까.”
과연 쿰룸의 말대로였다.
흑영사막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다른 사막에서 볼 수 없는 형태였다.
다부진 팔이 여러 개 달려 있거나, 세 개의 머리로 마법이 강한 미라!
“캬아오옥!”
나는 그런 미라가 보일 때마다 진혼검으로 거침없이 처치해버렸다.
[생명을 앗아갈 때마다 명계왕의 진혼검이 강력하게 변화합니다.]
[‘명계의 맹염’이 증폭했습니다.]
적을 죽이면 녹색 빛이 어린다.
‘명계의 맹염.’
하루에 단 3번 쓸 수 있는 불꽃!
이전에 불멸자의 갑의로 썼었던 명계의 잔불과는 비교가 불허했다.
녹색 불길이 치솟아 초대형 몬스터조차 단숨에 삼켜 피해를 준다.
“캬아아악!”
심지어 명계의 맹염은 물이나 사막의 모래로도 전혀 꺼지지 않았다.
어지간한 적이라면 맹염을 두르고 내리쳐지는 검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나는 칼날에 마력이 어린 손을 가져다 대고 뜨거운 불길을 더했다.
[명계왕의 진혼검이 마법의 불꽃으로 달궈지고 있습니다.]
[명계의 맹염 사용횟수가 충전되고 있습니다.]
‘사용횟수마저 충전 가능하다니.’
정말 터무니없이 강력한 검이다.
우린 조심히 흑영사막을 횡단했다.
“그 실종된 드워프 왕의 인상은 어떻게 됩니까?”
“수염을 기르지 않으셨습니다. 장인 출신인 드워프라 그렇지요. 대장간 일에만 집중한다는 의미거든요.”
카티에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드워프 왕을 어떻게 찾죠? 전생지식이 전혀 없는 곳이거든요.”
“그건 간단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펜타그램이 갈수록 진해지고 있다.
지금, 죽어가는 조력자가 우릴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어서 가자. 이제 시간이 없어.”
그러나 검붉은 하늘이 서서히 거뭇거뭇해지고 있는데도 우린 사막에서 그 어떤 왕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는 것이야. 아직 조력자를 찾지 못한 것이야?”
“이 근처인 것 같은데…….”
검은 사막의 둔덕을 오르고 있을 때, 갑자기 펜타그램이 확 빛났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자신에게 다가오라는 명백한 신호였다.
“이쪽이다. 아래쪽에 있어!”
우린 황급히 둔덕 아래로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은 드워프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
몇 초간의 정적.
모두가 한참 할 말을 잃었을 때.
“왕이시여!”
쿰룸이 절규하며 뛰쳐나갔다.
드워프들이 절박해하며 웅성댔다.
“저, 전하!”
“지, 진짜로 왕이시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구출하기 위해서 밤새 달려온 드워프 왕이 이미 이곳에 죽어 있다고?
‘설마.’
내가 침착하려 애쓰며 물었다.
“그 시체가 드워프 왕입니까? 확실한 거예요?”
“제가 인상을 확실히 기억합니다. 시체는 훼손됐지만, 본래 있는 흉터와 얼굴상은 완전히 똑같아요. 저희 홈롬 2세께서 어째서 이렇게…….”
쿰룸은 오열하며 비통해했다.
헤르탄이 침착하게 다가가 수염 없는 드워프의 시체를 살피고 말했다.
“죽은 지 상당히 시간이 지나 있습니다. 최소 몇 달 전에 죽었군요.”
몇 달 전?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조력자는 죽어가고 있다 했잖아.’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별빛 인형이 분명히 내게 말했다.
‘드워프 왕의 힘이 희미하지만 느껴진다고. 그래서 살아 있다 했는데.’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냐고.
왜 여기 드워프 왕이 죽어 있냐고.
‘무엇보다.’
드워프 왕이 사망했는데도 여전히 펜타그램은 밝은 빛을 내뿜고 있다.
사망한 그가 정말로 나의 조력자였다면, 지금 펜타그램이 힘을 발휘할 리 없었다.
‘그럼 펜타그램은 왜 날 여기로 안내한 거지?’
세상이 갑자기 어지러워지고 있다.
사막에서 신기루가 일어나듯이.
당최 울렁이는 속을 참을 수 없다.
‘설마 그렇다면…….’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 소름 끼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 돼.”
“뭐라고 했어요, 대장?”
“함정이었어. 당장 도망쳐야 해!”
다급히 소리치는 나를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나마 헤르탄이 나를 다잡았다.
“진정하십시오. 범철. 무슨 일인데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함정이었습니다. 제길, 우린 결코 이곳에 와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이 날 만큼 몸이 떨렸다.
평생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없다.
“드워프 왕은 조력자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우리를 불렀겠습니까!”
“대장, 그게 무슨……?”
하나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어억!”
“시, 심장이!”
갑자기 저편에 있던 드워프 셋이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했다.
“무슨 일이야, 옴톰!”
“괜찮아? 괜찮은 거냐고!”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그들은 비명을 토하면서 심각하게 괴로워했다.
“꺼으억…… 사살려……!”
모래바람에 무언가 인영이 보였다.
한 걸음.
그리고 한 걸음.
느릿하게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흑색 모래가 흩날리는 저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보였다.
다가오는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검을 내세우며 이를 갈았다.
“누구냐고 물었다.”
“자네가 이미 알고 있을 자.”
암운이 감도는 그림자가 속삭인다.
“자네가 쓰러뜨려야 할 마지막 숙적. 적색대륙 지배자. 그와 동시에.”
악마의 펜타그램의 빛이 진해졌다.
“지금껏 그 누구보다 그대를 성심성의껏 도와온 조력자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