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88화
‘손에 꼽힐 만큼 강해지는 대가로, 성별이 바뀌는 아이템이라니.’
저 술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자 내 표정을 본 카티에는 염려 말라는 듯 허리에 손을 짚었다.
“걱정하지 마요. 나는 대장이 여자라고 할지라도 개의치 않으니까요.”
“…….”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심지어 퀸소히니베는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내게 수줍게 속삭였다.
“내 노예가 미녀가 되면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야.”
“자꾸 그딴 끔찍한 소리 할 거냐?”
그러자 믿었던 헤르탄마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범철. 성별에 편견을 두는 것은 고리타분한 자나 하는 착각입니다.”
“안 써, 절대로!”
나는 거의 절규하듯 선을 그었다.
어째선지 세 사람 모두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절대 어림도 없지!
“아, 잠깐만.”
난 문득 압생트 병을 바라보았다.
“이거, 꼭 사람이 써야 하는 거야?”
***
애당초 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원료이니, 운석을 내가 부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형이 이 약을 쓰면 괜찮지 않겠어? 성별도 딱히 문제없을 테고.”
“하기야 성별이 바뀌어도 인형이라면 딱히 충격받을 일도 없겠네요.”
“애당초 인간과는 관념이 다르니까요.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남자가 되면 내 취향이 아니게 되는 것이야.”
유일하게 퀸소히니베만이 염려했지만, 가뿐하게 무시해 버렸다.
나는 인형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복용이 가능한지 정중히 물었다.
“왕을 구하는데 필요한 일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의 금속 장비를 제작하면 바로 드워프 왕을 구하러 갈 겁니다.”
그러자 인형은 곧바로 대답하였다.
“주세요. 괜찮답니다.”
인형은 병에 담긴 술을 복용했다.
[인간처럼 아주 정교한 인형이기에 술의 모든 효력이 적용됩니다.]
[무참하게 강화되었습니다.]
[인형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품이 억센 무기처럼 쓰일 수 있습니다.]
‘딱히 변한 것은 없는데?’
톱니바퀴 소리가 세졌을 뿐, 인형의 외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인형에게는 성별이 없답니다. 저는 인간의 외형만을 닮았을 뿐, 생식기, 기관, 골격은 전혀 달라서요.”
그래서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거군.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분은 항상 느껴지지 않아요. 인형이니까. 하지만.”
인형이 오른손을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주먹에 쇳조각이 치솟았다.
“육체적 능력이 아주 높아졌군요. 어지간한 광물이라도 부수겠어요.”
그뿐만 아니라 인형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도 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퀸소히니베가 놀라서 입을 가렸다.
“똘똘이가 경직되어버린 것이야!”
“아, 그만해. 듣기 이상하다니까!”
결국 쿰룸이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실제로 운석을 부숴봅시다.”
***
“자그만 운석이여. 내게로 오라.”
인형이 별빛을 받아서 주문을 외우자 운석 하나가 궤도를 비틀었다.
우리는 아주 멀찍이 떨어진 터널에서 인형이 도전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늘에서 운석을 낙하시키고, 자기가 직접 부수려고 하는 광경이라니.
‘진짜 회귀가 없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던 풍경이구나.’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며 지켜본다. 압생트 병으로 인해 강화된 인형은 하늘 높이 뛰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타는 운석을 향해 청초한 인형이 뛰어오른다.
[철질 운석과 충돌했습니다.]
[똘똘이가 박살 났습니다.]
그리고 인형은 산산이 파괴되었다.
***
“내구력을 계산하지 않았어요.”
머리만 남은 인형이 태연히 말했고, 나는 그걸 황당해하며 내려다보았다.
“몸이 부서졌는데 괜찮은 겁니까?”
“힘은 넘치는데 그걸 버틸 재량이 저한테는 없었던 거예요. 아쉬워요.”
……괜찮나 보군.
바닥에는 완전히 부서져 버린 인형의 잔해가 난잡히 쌓여 있었다.
83회차의 술로 견고하게 강화됐으나 운석은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꺅!”
굴러다니던 무거운 왼팔 부품에 실수로 발등을 부딪친 퀸소히니베는 동동 뛰며 신음까지 흘려야 했다.
“용도 못 부술 부품을 조각내버리다니. 운석은 정말 무서운 것이야.”
저러니 날아드는 운석을 깨부수려는 행위는 자살행위가 맞기는 하다.
쿰룸은 노련한 손길로 산산조각난 인형의 부품을 모아서 조립하였다.
“그나마 터널 안쪽에 소형 대장간을 만들어둬서 다행입니다.”
드워프의 노련한 손길로 수리된 인형은 다시 일어나 머리칼을 쓸었다.
“다시 해보겠어요.”
“방금 수리했는데 벌써 말입니까?”
“별빛만 충만하다면 인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동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그녀가 여러 번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괴암운석과 충돌했습니다.]
[똘똘이가 부서졌습니다.]
[흑색운석과 충돌했습니다.]
[똘똘이가 아작났습니다.]
[악령운석과 충돌했습니다.]
[똘똘이가 으깨졌습니다.] …….
인형은 몇 번이고 도전했지만 불타는 운석에 무참히 깨져버릴 뿐이다.
“이만하면 됐어. 시간만 버리겠다.”
내 생각 이상으로 대기에서 낙하하는 운석을 깨부수는 것은 어려웠다.
한편 인형은 밤하늘에서 지는 별을 바라보며 침울하게 말했다.
“해가 뜨면 전 움직일 수 없어요.”
어느새 동이 터오고 인형은 가동을 멈추고 잠들었다.
그녀가 눈을 감자, 하늘에서 쏟아지던 유성우의 행렬도 멈추었다.
“그런데 꼭 날아드는 운석을 깨부숴야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겁니까?”
차라리 저 구덩이에서 갈라진 운석 조각을 줍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그러자 쿰룸이 설명했다.
“공중에서 파괴해야 제련할 수 있는 쓸만한 운석이 많이 떨어집니다. 그냥 줍기만 해서는 원료가 부족해요. 이곳 모든 운석을 주워도 장비 하나를 뽑아내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가르긴 해야 할 텐데.
하여간 대낮 동안에는 인형도 가동을 멈춰서 우린 자유롭게 쏘다녔다.
“운석으로 파였던 대지들이 모조리 수복되고 있는 것이야.”
이곳 지형이 특이하다더니 지맥이 꿈틀거리며 스펀지처럼 복구됐다.
우린 허허벌판의 사막을 쏘다니며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운석은 빛깔마다 독특한 효력을 지녔습니다. 좀 전에 전생의 아이템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때로는 아주 위험하기도 합니다.”
휑한 사막을 걸으며, 나는 앞으로의 행보에 관해 생각해봤다.
“조력자가 적색대륙 지배자의 영역에서 위기를 맞았다고 했죠. 그런데 그 지배자의 영토는 어디입니까?”
“백혈사막입니다. 적색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죠. 그곳에서는 가장 약한 몬스터조차 다른 던전을 단신으로 파괴할 수 있다 전해집니다.”
빌어먹을, 벌써부터 우울하군.
“저기, 뭐가 보이는 것이야!”
때마침 붉은빛의 운석이 엿보였다.
[정령의 운석을 찾아냈습니다.]
[정령계로부터 떨어진 운석!]
[외계外界의 기운이 있습니다.]
우리가 멋모르고 운석을 만지자, 곧바로 타락한 정령들이 출현했다.
“마침내 정령계에서 살아남았다!”
“우릴 쫓아낸 걸 후회하게 하자!”
“정령왕! 그년에게 복수할 거다!”
정령에게는 유령처럼 물리적 행위가 통하지 않을뿐더러, 불의 정령의 경우는 사막의 환경 덕에 강력했다.
정신없이 냉기의 마법을 내뱉어 파괴한 뒤에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운석도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겠어요. 몬스터까지 출현을 하니까.”
카티에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유성우 지대를 탐사하며 조사한 아이템을 모았다.
[수수께끼의 철질암석]
[이질적인 도구의 조각#2]
[불을 토하는 별의 가루]
‘딱히 쓸만한 아이템은 없군.’
운석에 딸려온 아이템인 만큼 특수한 용도가 있어 보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들.
나는 초조하게 윗입술을 두드렸다.
‘적색대륙 지배자를 상대하려면 성좌의 금속 장비가 반드시 필요해.’
아직 적색대륙 지배자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최후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최상의 장비가 반드시 필수적이다.
‘거기다가 이제는 시간이 없어.’
조력자는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끽해봐야 열흘조차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난 장비를 맞추고 적색대륙 지배자의 영토에 도달해야 한다.
‘이런 데서 시간을 소요할 순 없다.’
장비를 제작하고 영토에 도달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지체할 수 없다.
“아, 잠깐.”
그때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가 지금 쓸만한 운석이 떨어진 자리를 찾지 못해 고민하잖아?”
“확실히 그런 것이야.”
나는 쿰룸을 돌아보았다.
“전에 별자리마다 떨어지는 운석의 종류가 다르다 하지 않았습니까?”
쿰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망치자리의 아래에서는 질 좋은 운석들이 자주 발견되곤 했죠.”
“그러면 그 별자리를 조사하면 지금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제기랄. 멍청했군요. 왜 그걸 이제 알았지?”
쿰룸이 자기 이마를 치며 혀를 차다가, 문득 풀이 죽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낮입니다. 말씀하신 방법대로 도움이 될 운석을 찾으려면 밤까지 기다려야만 하겠군요.”
제기랄, 1분 1초가 아쉬운데.
바로 그때 뜻밖의 도움이 있었다.
“시간을 아끼려면, 방법은 있어요.”
카티에가 끔찍한 빛이 어린 왼손을 높이 들자, 순식간에 해가 떨어졌다.
“이제, 이곳의 일대는 밤이에요.”
“……낮이랑 밤도 바꿀 수 있냐?”
“지역을 한정해, 1시간뿐이에요.”
자연까지 조정을 하다니, 놀랍군.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제 기적 쓰지 마. 검은 머리칼이 너무 늘었어. 수명에 지장 간다.”
“어련하겠어요.”
카티에는 어깨를 으쓱이고 걸었다.
쳇, 저게 걱정해주는 건데도 그냥 가버리네.
하여간 쿰룸이 밤하늘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면서 빠르게 설명했다.
“동쪽에는 얼음검자리, 서쪽에 물푸레자리와 불빛자리가 있습니다.”
그가 설명한 다양한 별자리에서 내 귀를 솔깃하게 하는 장소가 있었다.
“우선은 마지막 별자리로 향하죠.”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은 1시간뿐이 므로우리는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 얽혀진 별들.
밤하늘에 몇 번을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인간의 별자리가 떠 있었다.
“저곳은…….”
“회귀자리입니다. 회귀자들이 출현하던 시점에 발견한 별자리지요.”
[‘회귀자리’에 도달했습니다.]
[120회차 회귀자의 힘이 상승하며, 회귀할 때 고통이 감소합니다.]
[이곳에서 사망할 경우 추억 젖은 ‘주마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헤르탄은 간소한 감상을 중얼댔다.
“자살하기 좋은 곳이군요.”
회귀자리 아래를 샅샅이 조사한 결과 특이한 운석을 찾을 수 있었다.
독특하게도 운석을 둘러싼 밝은 기운에는 복잡한 수식이 얽혀 있었다.
[회생의 운석을 찾아냈습니다.]
[시간균열에 얽힌 운석입니다.]
[모두와는 다른 시간을 걷는 인물만이 이 운석을 깰 수 있습니다.]
카티에가 보더니 나를 돌아봤다.
“보통은 언데드를 떠올리겠지만, 우리들 중에서는 대장이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갔다.
내가 손을 대자, 운석이 갈라졌다.
[회생의 운석을 깨버렸습니다.]
[사용횟수를 소모한 아이템의 성능을 일부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시간과 관련된 성능만 해당되며 재사용 횟수는 2회입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쓸모없는 운석.
하지만 나는 관점을 달리하였다.
‘시간과 관련된 아이템이라면.’
예전부터 가슴팍에 챙겨두었던 아주 평범한 돌을 재빨리 내밀었다.
운석의 효능을 받은 돌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품에 챙겼다.
“무엇에 운석의 힘을 쓴 것이야?”
“때가 되면 알아.”
이윽고 밤이 되자, 인형이 깼다.
눈을 뜬 그녀에게 내가 다가갔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이곳에 8개월 후에 내려올 대재앙.
드워프가 유일하게 성좌의 금속 원료를 가장 많이 획득한다는 운석.
“혹시 초대형 운석이 떨어지는 시기를 앞당겨 줄 수 있겠습니까?”
“가능은 한데, 왜 그러시나요?”
설명할 시간마저 아쉬웠다.
“꺄악!”
내가 뻗은 손에 인형이 분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