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86화
끼익-.
암호문으로 추정되는 대화가 오가자 드워프 병사가 철문을 열어줬다.
우리는 땅 밑으로 계속 걸어갔다.
“드워프 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지금껏 날 도우며 변수를 만든 자.
드디어 베일에 싸여 있던 조력자에 관한 정보를 캐낼 순간이었다.
“스스로 나서 악을 처단하고, 적에게는 자비가 없으셨던 분이십니다.”
“없으셨던?”
“예. 지금은 계시지 않거든요.”
쿰룸은 언뜻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흘렸다.
“홀롬 쉐베르마 2세께서는 현재 실종되셨습니다. 그분만 계시면 드워프들도 옛 힘을 되찾을 텐데…….”
내가 모르는 뒷사정이 있나 본데.
‘설마 조력자가 실종 상태라니.’
나는 악마의 펜타그램을 들어 보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펜타그램은 황색대륙에서 우연히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드워프 왕과 관련 있는지 모르겠군요.”
“홀롬 2세는 현실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저희가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고뇌하시고 행하시는 분이셨거든요. 왕께서 현재 당신에게 조력하는 이유는 분명 그럴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확실히 보통 위인은 아닌가 보다.
헤르탄이 드워프 병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드워프들은 지하도시에서 실종되어 있었던 겁니까?”
나도 120회차에서 돌연 그들이 실종됐던 이유가 궁금했다.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차후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정이 복잡해서요.”
하여간 드워프 일족의 임시 거주지는 채광으로 만든 작은 땅굴이었다.
‘급히 만든 장소인가 본데.’
피난소처럼 땅굴은 전에 보았던 지하도시에 비해 좁고 규모가 작았다.
지맥에 따라서 이어진 용광로를 제외하면 건물의 설비도 초라하였다.
지하주민 드워프들은 우리를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쿰룸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원래 다들 저렇게 피폐하지는 않은데 최근 인간들을 피하며 다니느라 다들 날이 섰어요.”
회귀자들이 나타나며 드워프들은 납치와 감금으로 고통받았다 한다.
하기야 드워프는 손재주가 워낙 뛰어나 노예로 쓰기에는 제격이니까.
건물의 천장은 낮아서 키가 큰 나와 헤르탄, 그리고 퀸소히니베는 고개를 숙이고 다니느라 목이 아팠다.
“네년이 너무나 부럽다는 것이야. 키가 작아서 목 아플 일도 없으니.”
“하기야 당신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닐 일이 없어서 좋기는 하네요.”
카티에와 퀸소히니베가 투닥거리는 사이, 쿰룸이 대뜸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성좌의 금속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역시나.”
쿰룸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저희에게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지하도시를 놔두고 저희가 대피처로 피신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죠.”
“계시라고요?”
“예. 왕의 표식을 지닌 남자가 성좌의 금속을 찾으러 올 것이라고. 그리고 저희는 회귀자를 피해 거처를 옮기고, 그를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절대적인 계시가 내려졌습니다.”
“그 계시를 누가 내린 겁니까?”
“현재는 사라진 저희의 왕, 홀롬 2세 님이십니다.”
그러면 드워프들이 이전한 것도 드워프 왕에 의해서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역시나 그 계시라는 것도 120회차에서만 벌어진 변수였다.
‘조력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하여간 쿰룸은 공손히 말하였다.
“성좌의 금속을 만들 수 있는 일가는 저희 드워프 일족 중에서도 대대로 하나뿐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우리는 드워프 장인에게 도착했다.
가장 번듯하고 커다란 노의 앞에서 한 드워프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체구가 굵직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의외로 드워프답지 않게 수염을 기르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외견이 오히려 다른 드워프들에 비해서 조금 어려 보였다.
“누구요.”
“처음 뵙겠습니다. 드워프 왕의 조력을 받고 있는 범철이라 합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펜타그램을 보이며 예의 바른 어조로 말하였다.
“성좌의 금속 제조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면 그것으로 장비를 제작해 입으려 합니다. 적색대륙 지배자를 죽이기 위해서.”
아마도 드워프를 만나고 난 이후, 적색대륙 지배자를 상대해야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최후의 적.
그런 정보도 없는 괴물을 상대하려면 최상의 장비를 갖춰야만 한다.
‘성좌의 금속.’
120회차 회귀자들조차 제조법을 모르며, 오직 드워프만 만들 수 있는, 세상에 현존하는 최강의 금속.
그 절대금속으로 이뤄진 장비를 획득한다면, 당연히도 지배자를 쓰러뜨릴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성좌의 금속 제조법을 아시오?”
드워프 장인이 담배 연기를 뱉으며 말했고, 우린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밖에. 성좌의 금속을 만드는 법은 일반 드워프들도 모르니까. 오로지 드워프 장인만이 그걸 아오.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드워프 장인이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 그 귀한 금속은 드워프의 수중에도 없소. 가공은 내가 해줄 수 있지만, 원료는 직접 구해야 하오.”
“당연히 그냥 도움만 받을 거라 생각하고 오진 않았습니다.”
“그럼 됐소.”
드워프 장인이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황당무계한 금속을 제조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오. 그중 첫째는.”
그가 약간 뜸을 들이고 말하였다.
“별.”
“예?”
드워프 장인이 땅이라는 지대한 경계선에 막힌 밤하늘을 가리켰다.
“저 별을 깨뜨려 가져다주시오.”
***
우리는 다들 순간 멍해졌다.
“별을 깨뜨려서 가져다 달라고요?”
저 하늘의 별을 따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인가.
그러나 드워프 장인은 진지했다.
“유성우 지대에는 항시 운석이 떨어지오. 거기서 나오는 운석 파편으로 성좌의 금속을 제작할 수 있소.”
성좌의 금속 원료가 운석이라니.
“그럼 떨어진 운석의 파편을 저희가 주워오면 되는 겁니까?”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떨어진 운석의 파편은 너무 작고 조잡해 일만 개는 모아야 하오. 그래서 성좌의 금속이 아주 희귀하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한 순도가 높고 큰놈이야. 그래야 세고 멀쩡한 장비를 만들지 않겠소?”
드워프 장인이 내가 차고 있는 검을 흘깃 보았다.
“그러니까, 운석을 베어달란 거요.”
***
“대장. 뭘 떠올리고 있어요?”
“슬픈 삶을 달래줄 유일한 행복.”
“너무 내 생각만 하고 살진 마요.”
“…….”
나는 품에서 밥집에서 가져온 쌀을 한 움큼 퍼서 입에 넣고, 카티에한테도 한 줌 퍼서 입에다 넣어줬다.
우리 둘은 사이좋게 쌀을 씹었다.
오독. 오독. 오도독.
이빨에 부딪혀 갈리는 쌀알의 비명은 언제 들어도 귓불까지 흥겨웠다.
“푸석푸석하네.”
“사막의 쌀이니까 이해해야죠.”
카티에가 마침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내 생일선물 있잖아요.”
“맞아. 선물 뭐 받고 싶냐?”
“아무리 생각해도 못 고르겠어요. 그냥 대장이 적당히 골라줘요.”
윽. 그 대답이 제일 어려운데.
나는 턱을 긁적이며 고민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띄게 늘어나 버린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보았다.
이제는 검은색이 흰색의 수를 압도한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염색약.”
“염색약이요?”
“네 머리칼, 전부 검어지면 죽는다며. 그래서 희게 해주는 염색약.”
카티에는 어렴풋하게 웃었다.
“보통 염색약은 흑채 아니에요?”
“너한테는 흰 머리칼이 어울려서.”
“염색약으로 머리칼을 강제로 희게 만들더라도 수명이 늘지는 않아요.”
“확실히 안타까운 소식이군. 하지만 그래도 역시 염색약으로 할래.”
“……고집은.”
카티에는 아주 잠깐, 뭔가 말하려던 기색이었지만 바로 입을 닫았다.
나는 멋쩍어서 뺨을 긁었다.
“역시 염색약은 별로인가? 내가 이런 데에는 그다지 눈치가 없어서.”
“아니요. 아주 좋은 선물이에요.”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서 왼쪽 손등의 펜타그램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날 도와온 조력자의 정체.
그것은 바로 드워프의 왕이었다.
‘설마 조력자의 정체가 회귀자도 아닌, 이종족 드워프였을 줄이야.’
그래서 더 뜻밖이었다.
“왕이란 자가 왜 날 도왔을까?”
“글쎄요. 대장이 회귀를 멈추는 것을 바라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이제야 ‘키 작은 자’의 정체를 찾기는 했지만 아직도 의문투성이군.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는 다른 대륙에 있는 내게 변수를 만들고, 재능을 줘서 도움 줄 수 있었을까?
‘제기랄. 답답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턱을 짚었다.
길가의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경전을 들고서 쏘다니고 있었다.
“나도 이참에 종교나 믿을까.”
“청색대륙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사람이 할 소리예요?”
“이번엔 정말 너무하다고. 내가 괴물도 아니고 운석을 어떻게 베냐.”
“왜요? 못할 것 있어요?”
“지금 농담하냐? 운석은 몬스터가 아니라 자연재해라고. 태양이나 바다를 베는 검사를 본 적이 있냐?”
“벌써 잊었어요? 대장은 불멸아귀와 싸울 때 하늘도 갈랐었잖아요.”
“……그건 전성기 시절 능력이고.”
그때 드워프제 맥주를 마시던 퀸소히니베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위대한 용이라면 재해조차 가를 수 있단 것이야.”
난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줬다.
“너, 본모습 본 지가 오래돼서 가끔 네가 용인지 인간인지 헷갈린다.”
“본모습이 그립기는 한 것이야. 중립을 어겨서 이 꼴이 되었으니.”
평소처럼 콧방귀나 뀔 줄 알았는데 퀸소히니베는 의외로 한숨을 쉬었다.
“나도 이제는 가끔 내가 인간인지 용인지 헷갈리기도 하는 것이야.”
“뭘 걱정하냐? 백룡이 그랬잖아. 자기 피를 물려받았으니 언젠가 중립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건 그렇지만…….”
나는 침울해하는 퀸소히니베를 향하여 진지하게 농담을 던졌다.
“네가 죽으면 시체는 내가 수습하마. 네 뼈가 쓸모가 참 많더라고.”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눈초리를 휙 세웠다.
“꼭 내 노예가 내 뼈를 써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
“어라, 어떻게 알았냐?”
“뭐!”
때마침 여느 때처럼 침착한 표정의 헤르탄이 다가왔다.
“준비가 끝난다 합니다. 바로 유성우 지대로 향하시겠습니까, 범철?”
“갑시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
“운석이 빗발치는 위험지대입니다. 혹시나 양탄자에서 떨어지면 운석 파편에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해요.”
우리는 양탄자를 타고 이동하였다.
드워프가 수제로 제작한 마술양탄자가 너풀거리며 하늘을 주행한다.
물론 나나 퀸소히니베는 날개로 비행할 수 있지만, 저편의 광경을 보자 그럴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저런 걸 도대체 어떻게 베냐.’
구덩이가 잔뜩 파인 황무지.
고매한 유성우가 빗발치고 있다.
양탄자로부터 나오는 결계가 아니었다면 진작 파편이 튀었을 거다.
퀸소히니베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본모습이라고 해도 저런 운석에 맞으면 끝나겠다는 것이야.”
그것은 확실히 빈말이 아니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유성우.
경외롭지만 등골이 오싹한 풍경.
운석 한 개가 떨어질 때마다 사막이 무너질 것처럼 대지가 격동한다.
내가 황당해서 운석의 굉음에 묻히지 않도록 크게 소리쳤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이런 데서 어떻게 원료를 주워서 만듭니까? 설마 운석을 매번 베지는 않을 테고.”
“3년에 한 번마다 이곳에 초대형 운석이 떨어집니다. 거기서 채취한 파편으로 성좌의 금속을 만들죠.”
“그럼 초대형 운석이 떨어지는 시기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아직은 8개월가량 남았습니다. 사방이 흔적도 남지 않고 소멸되죠.”
그나마 8개월 먼저 와서 다행이다.
양탄자를 타고 온 드워프는 최대한 멀리서 우리를 내려주며 말하였다.
“제가 모셔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혹시나 돌아가실 때가 되면 저에게 다시 말씀해 주시기를.”
안내자는 거기서 대기하고, 동행한 쿰룸이 직접 걸으며 우릴 안내했다.
“유성우 지대에 근접하려면 반드시 이곳 터널을 이용해야 합니다. 드워프의 손재주와 마술로 도배된 장소라서 유성우에도 무너지지 않죠.”
우리는 온갖 부적과 술식이 복잡하게 쓰여 있는 터널로 들어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천장과 벽이 투명해져 우린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유성우 지대에 도착했습니다.]
[운석 규모, 색깔, 구성 재질에 따라서 떨어지는 물질이 다릅니다.]
[갈라진 운석에서는 미확인체가 나올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바로 터널 위로 떨어지는 운석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서 괜스레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정말 안전한 것 맞습니까?”
“운석이라 해도 우리 기술력을 이길 수는 없어요.”
쿰룸은 자부심 있게 말하고는 그 말을 입증하듯 앞장을 섰다.
역시나 드워프 전용 터널이기에 우리는 기어가듯이 그곳을 걸었다.
‘확실히 여기가 위험지대긴 하군.’
유성우 지대는 어지간한 생명체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구덩이가 파여 있고 당장 사막의 지대가 무너질 듯 위태롭다.
‘그런데 왜 운석들이 정확히 이곳 한 곳에만 몰려서 떨어지는 거지?’
운석이 떨어지는 것이 그리 흔한 현상은 아닐 텐데, 의아스러운 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성우의 모양은 각양각색이었다.
대개는 대기로부터 불타면서 막강한 속도로 내려오지만, 여관만 한 것이 있는가 하면, 내 주먹보다 작은 조그마한 운석도 있었다.
보통 크기가 작은 운석은 대기에서 불타다가 완전히 말소돼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길은 어떻게 찾습니까? 지형이 항상 파괴되는데.”
“별자리입니다.”
“별자리?”
쿰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별자리의 위치마다 떨어지는 운석의 종류가 약간씩 다릅니다. 가령 우리가 향하는 ‘망치자리’ 쪽에는 성좌의 금속을 다루기 괜찮은 재질의 운석이 많이 떨어집니다.”
그냥 가는 건 줄 알았는데, 별자리에 따라서 운석의 흐름이 다르다니.
한참을 주저하지 않고 나가던 쿰룸이 멈춰선 곳은 운석이 틀어박힌 구덩이 바로 옆 구간이었다.
“이번에 운이 좋군요. 터널 근처에 이렇게 멀쩡한 운석이 떨어졌다니.”
쿰룸이 뭐라고 주문을 외우자, 우리가 있는 통로가 드드드 흔들렸다.
터널의 방향이 운석이 떨어진 구덩이 쪽으로 비틀어져 연결되었다.
걸어가자, 구덩이의 한가운데에서 보랏빛의 바위만 한 운석이 보였다.
[무작위 인과율의 운석입니다.]
[손을 대면, 접촉자에 따라 개별적인 현상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드워프가 만졌을 땐 장비 제작이 가능한 특수 합금을 얻었습니다. 회귀자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무작위 현상이 벌어지는 운석이라.
“누가 만져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