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85화
“탐사단 인원 전부를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저뿐이군요.”
샬은 파리한 몰골로 누워 있었다.
“그 장비들, 구하기 힘든 것인데.”
역시나 회귀자답게 그가 초췌한 이유는 동료들이 죽어서가 아니라, 손에 익은 탐사장비를 잃어서였다.
회귀자는 보통 죽음에 그리 쉽게 연민을 가지는 성격이 아니니까.
“하지만 성과는 있었습니다. 지하 미로에서 이것을 발견했거든요.”
샬이 내게 보인 것은 긴 양초였다.
밀랍이 굳고 심지도 꽤나 굵어서 제법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드워프를 쫓은 세월만 30회차가 넘습니다. 척 보고 챙겼죠. 이 초가 밝히는 길을 따라가면 드워프 종족의 은신처로 향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아이템이 황제의 미로에 숨겨져 있었단 말입니까?”
“예. 아무래도 황제가 드워프 대실종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확실히 그럴듯한 추론이군.
샬이 나에게 양초를 건네주었다.
“왜 이걸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이것만 있으면 드워프를 쫓을 수 있으니까요. 전 이번 회차에서 불가능하니까,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샬은 미로에서의 전투로 다리 한쪽을 잃어서 활동하기가 힘겨웠다.
“혹시나 성좌의 금속 제조법을 알게 되면 제게도 꼭 알려주십시오.”
샬의 탐사단이 드워프를 쫓던 이유는 성좌의 금속 제조법 때문이었다.
‘성좌의 금속이라.’
나도 드워프만 제작 가능하다는 그 진귀한 금속에 관해 관심이 있었다.
샬의 쾌유를 바라고 방을 나섰다.
***
“갈 거라고?”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롬은 고심하듯 턱에 손을 얹었다.
백치가 진짜 고심을 하는 건 아닐 테고 그저 흉내만 내는 것이리라.
“뭘 갑자기 고뇌하는 척이냐?”
“너는 죽게 될 것이다.”
하기야 물어봤자, 내가 뭘 알겠나.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비록 시작은 악연이었지만 안부 인사도 못 할 사이라곤 생각되지 않아.”
롬은 사막을 떠나기로 하였다.
평화를 좋아하는 에고 소드, 호전적인 에고 실드와도 대화를 나눴다.
-우린 사막으로 갈 거야. 롬은 항상 방랑을 좋아하거든. 우린 무구이니까 주인을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잘 있으라고, 1회차!
그런데 헤어지는 순간.
롬이 나의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너는 살게 될 것이다.”
잠깐이지만, 45회차에서 맨정신이었던 롬과 아주 똑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소름이 끼쳐 되물었다.
“뭐?”
-로, 롬! 지금 뭐라고 했어?
-설마 제정신으로 돌아온 거야?
에고 소드와 에고 실드가 흠칫하며 곧장 다그쳤고, 나도 꽤나 놀랐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롬은 흐릿한 눈빛으로 그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은 그저 우연이었던 것일까?
난 얼떨떨해하며 어깨를 툭 쳤다.
“하여간 잘 가라. 서로 악연이었으니, 다시는 보지 말자고.”
롬은 꼿꼿하게 어깨를 펴고 갔다.
석양의 궤적을 따라서 붉은 사막.
누구보다 순수한 강자가 횡단한다.
***
아기 로크는 황제가 사망하여 주인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 상태였다.
“너, 새 주인이 필요하지 않냐?”
“내가 뭐하러 굳이?”
“새끼라면 혼자 살아남기 힘겹지?”
당장 감성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거래로 잡아야 한다.
“거기다 애완수 생활을 오래 했으면 야생에 돌아가기도 꽤 힘들 텐데.”
“…….”
아기 로크는 뜨끔한 표정이었고, 난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구슬렸다.
“내 밑에 와라. 나는 아무나 길들여서 곁에 두지 않아. 최소한 굶을 걱정도 없을 거라고. 쟤 좀 봐라.”
내가 쌀알을 우물대며 씹고 있는 퀸소히니베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아기 로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조금 주저하며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배신하지 않을 거야?”
“뭐?”
“날 배신하지 않을 거냐고.”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게 저거라니.
식은 가슴 한쪽이 저릿해지는군.
“절대. 그러니까, 너도 나를 배신하지 마.”
내가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넌 날 죽이려고 했고, 난 네 정수리에 칼을 박았지만. 추한 과거는 깨끗이 잊자고. 다시 시작해보자.”
“……일단은 따라주겠어.”
아기 로크가 마지못해 내가 뻗은 손을 내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괴조 로크가 당신의 애완수로 편입되었습니다.]
[상급조련 레벨이 올랐습니다!]
[포획 성공!]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안해하며 손을 가져왔다.
‘어쨌든 악수는 안 해주는구만.’
그보다 아기 로크의 능력치를 살폈다.
『대형괴조 로크(이름 없음)』
특이사항: 적색대륙에서 가장 높은 가능성을 지닌 전설적 비행 몬스터. 새롭게 환생하여 능력치가 약해진 편이다. 새의 본모습으로 변하면 능력치와 스킬에 큰 변화가 생긴다.
힘: 12 체력: 13 민첩: 43 마력: 14 행운: 21
소지스킬: 날아가 쪼기(Lv1). 꺾이지 않는 깃털(Passive), 이형변신.
주인에 대한 충성도: ‘전주인처럼 날 배신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현재 건강상태: 영양불균형.
잠재력: SSS급(세기의 천재!)
환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완수. 전주인에게 배신당하고 폭행당한 기억이 있어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한다.
*호감도를 쌓을수록 로크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나는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나.’
SSS급 애완수!
S급 애완수도 뛰어넘는 대물이다.
대형괴조일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닌 조류였다.
‘성체로 자라나면 시공간을 찢으며 비행하고 화염까지도 쓸 수 있다.’
그런 전설적인 비행 몬스터를 애완수로 들일 수 있게 되다니, 횡재했다.
하여간 새 애완수로 편입된 아기 로크는 다른 애완수들과 인사했다.
초화가 수줍어하며 조그맣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됐어.”
아기 로크는 고갤 저을 뿐이었다.
아직까지 그다지 호감도가 없고 애완수들조차 경계하는 상태.
“…….”
“끄왁!”
달귀가 반갑게 손을 내밀고, 동북이는 엉금엉금 기어가 인사했지만 아기 로크는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쉬익!
냉큼 호리병으로 들어가는 로크.
퀸소히니베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내 허리춤의 호리병을 노려보았다.
“내 노예 곁에 있는 커다란 생물체는 나 하나로 이미 충분한 것이야.”
“별걸 다 걱정한다. 네 밥 부족할 일은 없게 할 테니까 염려 마라.”
“흥! 헛소리를.”
그녀가 기막혀하며 고개를 돌렸다.
‘뭐, 친해지는 건 차차 해도 되고.’
이제부터 우리는 사막으로 떠나서 드워프 일족을 찾아내야만 했다.
‘드워프를 찾으면 조력자의 정체에 관해서 알게 될 수 있을지 몰라.’
과거 만났던 노예상에게 이 펜타그램은 드워프의 증표라고 들었었다.
그렇다는 것은 조력자 역시 드워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대륙지배자들이 날 돕는 조력자에 관해서 말하던 별칭은 ‘키 작은 자.’
실로 드워프에 어울리지 않는가.
거기다 의문은 한 가지가 아니다.
‘기사단장 유령이 적색대륙 지배자는 내가 알고 있는 자라고 했었지.’
회귀를 멈추기 위해서 내가 쓰러뜨려야 할 최후의 적, 적색대륙 지배자.
그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내가 알고 있는 자라고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어찌 보면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불길한 의혹.’
사막드래곤과 조우했을 때, 그는 ‘미래의 향기’를 맡았다고 했었다.
‘머지않아 세상은 멸망할 거라고.’
어째서 세상이 멸망하게 된다는 걸까?
그 외에도 적지 않은 의문이 있다.
생명그릇을 훔칠 때 보았던 미래파편, 나를 죽일 카티에, 죽는 헤르탄.
‘이 모든 의문점에는 연관이 있어.’
여정이 후반으로 진행될수록 의문들은 조금씩 밝혀져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모든 의문의 해답은 종결에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나아가야 했다.
멀지 않은 여정의 끝을 향해서.
***
‘45회차에서 느꼈던 그 감각.’
검의 최강자이던 시절을 직접 겪으며 난 검을 다루는 방법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수련해도 레벨 올리기 버겁다는 불세출의 검 스킬 레벨이 무려 두 개나 올라간 걸 봐도 알 수 있다.
“캬아아악!”
밤이 되면 사막에 출몰하는 몬스터 종류가 더욱 늘어나고 강해진다.
그러나 긴 양초가 밝히는 길을 따라가려면 우리는 낮에는 쉬고, 밤에만 사막을 걸어야 했다.
“사막의 밤은 너무 춥고 이동도 어려워요.”
“그래서 각별히 주의하면서 움직여야 합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며 우리는 수없이 많은 몬스터 떼와 마주치기도 하였다.
“이봐, 버림받은 회차에서 뭐해?”
“너힐 다음 회차로 넘어가게 해주지. 물론 너희 물건은 받고 말이야.”
거기다 때때로 기습해 오는 도적들!
내가 허공을 쥐어서 만들어낸 검에 닿을 때마다 습격자들은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아직, 멀었어. 45회차에 비하면.’
한계까지 개화한 SSS급 재능.
그것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녔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재능을 한계까지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못 죽일 게 없을 텐데.’
퀸소히니베가 어두운 모래에 넘어지지 않게 주의해서 걸으며 물었다.
“우리가 드워프를 발견하기까지 이제 얼마나 남은 것이야?”
“글쎄, 일단 양초는 거의 끝까지 타들어 가고 있는데.”
길고 두꺼웠던 양초는 촛농이 거의 흘러내려서 아주 작게 변해 버렸다.
우리 앞을 안내하던 촛불의 밝기도 처음에 비해서 눈에 띄게 희미하다.
‘이젠 양초가 거의 다 녹아내렸는데, 드워프 주거지는 어디에 있지?’
주위에는 공허한 사막의 광경뿐.
괜스레 초조해진다.
‘정 안 되면 펜타그램의 이득경로를 찾아보자. 한동안 마법을 못 쓰게 되는 것이 꽤나 심한 대가지만.’
그때, 앞장서던 헤르탄이 멈췄다.
“멈추십시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생물체로 보이는 그림자들이 서 있었다.
카티에가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그 순간, 그림자들이 활을 들었다.
우리가 각자 민첩하게 전투태세를 취했을 때, 작은 그림자가 소리쳤다.
“잠깐!”
철갑을 입은 드워프가 다가왔다.
그가 내 왼쪽 손등에서 희미한 불빛을 내뱉는 펜타그램을 가리켰다.
“그것은 ‘왕의 표식’이 아닙니까?”
***
“죄송합니다. 저희 드워프를 해치러 온 회귀자라고 생각했거든요. 전 쿰룸. 순찰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땅딸막한 키.
그러나 장대한 기골.
고급스러운 금속제 갑옷.
나는 처음으로 드워프를 보았다.
“홀롬 쉐베르마 2세께서 남기신 표식. 그게 바로 그 펜타그램입니다.”
“이게 드워프 왕의 표식이라고요?”
“예. 왕이 직접 돕고 지원하는 영웅에게만 하사하시는 증표입니다.”
설마 악마의 펜타그램의 정체가 드워프 왕의 증표였을 줄이야.
‘키 작은 자.’
이제야 가까스로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대륙지배자가 조력자를 부르는 별칭이 ‘키 작은 자’였는지를.
‘드워프 왕. 그가 내 조력자였군.’
하지만 조력자의 정체는 알았다고 해도 아직까지 의문점은 여전했다.
그 왕이 나를 왜 돕고 있는 걸까?
펜타그램을 본 쿰룸은 경계를 풀고서 우릴 숨겨진 지하로 안내했다.
사막지하로 연결되는 통로 끝에는 굵고 단단해 보이는 철문이 있었다.
문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음악과 촛불의 공통점은?”
“세상을 밝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