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84화
[전생에서 획득한 진리의 문구는 현실로 그대로 가져가게 됩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으로부터 최강자의 검술을 수습하였습니다.]
[불세출의 검 숙련도가 크게 증진되었습니다.]
[불세출의 검 스킬 레벨이 두 개 올랐습니다!]
120회차.
나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헤르탄의 몸을 살피자 피에 젖은 상처들이 낫고 몸도 깨끗해져 갔다.
[45회차에서 헤르탄과 깊은 인연을 느끼며 과업을 완료했습니다.]
[당신과 헤르탄이 가장 깊은 감정을 공유한 삶이 노출됩니다.]
‘가장 깊은 감정을 공유한 삶?’
지금껏 단편적으로 스쳤던 광경과는 달리 삶이 세부적으로 보였다.
아직 헤르탄이 나를 윗사람으로 모시지 않았던 시절의 회차였다.
***
40회차.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란의 시대.
헤르탄은 이번에도 왕정과 결탁한 용병세력과 끝없는 전투를 벌였다.
그중에서 가장 까다롭고 강력했던 적은 바로 제3용병대 대장이었다.
‘이름이, 범철이라고 했던가.’
가장 처음 죽은 이후, 여러 번 도전했으나 오히려 역습당해 죽었다.
거기다 어째선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괴이한 특징까지 있었다.
그러나 헤르탄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놈을 그대로 살려두면 장차 반란군에게 있어 큰 적이 될 테니까.
‘따로 불러서 처치하지. 녀석의 동료와 엮이면 상당히 곤란하니까.’
따로 동굴로 몰아서 헤르탄은 홀로 있는 범철을 부하들과 기습했다.
그러나 싸움 도중에 부하들은 모두 사망했고, 동굴 입구가 무너졌다.
둘 다 지칠 대로 지치고 손에 피가 묻어 무기조차 쉴 수 없는 상황.
그 폐광에서 갇혀버리고 말았다.
“갇혔군.”
“맞아, 단둘이. 이것도 운명일까?”
범철이 넉살 좋게 농담을 던졌지만, 헤르탄은 웃지도 않고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방법부터 탐구하였다.
거기서, 재앙이 시작되었다.
우흐으우우우우……!
하필이면 그곳은 원혼 출몰 구간.
밴시가 밀집한 밀폐된 동굴이었다.
헤르탄은 평상시의 평정심조차 잃어버리고 극심한 공황을 느꼈다.
“크, 허어억, 크어윽!”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자해를 해도 공포가 그대로였다.
거기다 밴시들은 몰려오고 있다.
이대로 백치가 되어야 하는 걸까?
꺄아아악……!
하나 눈앞에서 처치되어버린 밴시.
마법검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범철이, 헤르탄을 지켜낸 것이다.
“왜…… 나를 지키는 거지?”
“다음 삶부터 백치로 살고 싶냐?”
헤르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닥치고 따라와.”
두 사람은 어떻게든 무너진 동굴로부터 탈출로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하나 탈출로는 열리지 않았고, 빛조차 없는 동굴에서 버텨야만 했다.
헤르탄은 자살 충동이 들었으나 반란군장이라는 직위 탓에 그럴 순 없었다.
‘40회차. 이번 회차는 중요하지. 어쩌면 정말로 반역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꼭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러나 둘은 40일을 갇혀 있었다.
그동안 식량을 최대한 아껴 먹고, 배낭에 꿍쳐둔 술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식량은 바닥났다.
그나마 식수는 빗물로 연명하였지만, 그마저도 얼마 안 가서 끊겼다.
“이러다 둘 다 죽겠다.”
“확실히, 그렇군.”
“너, 이번 삶이 중요하다면서. 솔직히 나는 용병 노릇만 해서, 어느 쪽이 이기든가 지든가는 상관 안 해.”
동굴에 갇힌 동안, 헤르탄은 범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가 회귀를 못 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막대한 검술재능으로 회귀자를 찢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깊은 성격까지 알게 됐다.
그리고 어느새, 헤르탄은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어차피 범철은 병까지 걸려 그가 아니어도 죽게 될 테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나보다는 네가 먼저 죽겠군.”
“내가 죽으면, 나를 먹어라.”
“……미쳤나.”
“회귀자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새롭네.”
제3용병대의 대장, 그 범철이 빼빼 마른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졌다.
처음엔 때리려고, 쳐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힘이 없었다.
범철이 죽어가며 힘없이 웃었다.
“뭐든 처먹어. 그래야 네가 살아.”
헤르탄은 무심했다.
하나 어째선지 눈물은 흘러내렸다.
밴시에게 공황을 일으킬 때조차 나지 않던 눈물이 뺨을 차게 적셨다.
“……언젠가 내가 사망하여, 만일 인류가 또다시 과거로 회귀한다면.”
헤르탄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의 마른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 손을, 꽉 쥐었다.
“앞으로 나의 모든 삶은 그대의 것입니다.”
그 마지막 말은 전달되었을까.
뺨을 매만지던 손이 추락한다.
본능적으로 시체를 향해 움직인다.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것이 그가 평생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은 인육이었다.
……참 질겼다.
‘그렇게 나는 살아남아 나를 찾으러 온 부하들에게 무사히 구조됐다.’
마침내 헤르탄은 살아남았고, 반란을 지휘해 소년왕을 밴시가 출몰하는 폐광에 밀어 넣어 백치로 만들었다.
반란에 성공해 왕정을 몰아냈으나,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왕의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빈 왕좌를 올려다보며, 헤르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새로운 왕은, 이미 찾았으니까.’
***
‘헤르탄은, 날 먹은 적이 있었군.’
그렇게 충격받을 것까진 없었다.
일단은 내가 허락했었던 것이니까.
‘그래도 설마 헤르탄의 괴식습관이 나로 인해서 생겨났던 것이라니.’
어째서 그가 나에게 반해서 아직까지 충성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겠다.
하여간 가장 인상 깊었던 삶이 보여지고, 멈춰진 세상이 움직인다.
‘돌아오고 있어.’
정지되었던 세상의 시간이 차츰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것이야?”
한창 흐느끼던 퀸소히니베가 눈물 젖은 눈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는 갑자기 두 사람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카티에를 안아 들었다.
“헤르탄은 네가 업어라. 이제는 서둘러 여기에서 나가야 해.”
황제가 쫓겨난 이후, 이차원의 미로는 조금씩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미로의 주인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모든 차원 문이 폐쇄됩니다.]
[차원균형이 고정되어 미로의 형태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미로 붕괴가 아주 빠르고 험했다.
사람 하나를 업고 달려서 나가기에는 미로의 붕괴가 너무나 재빨랐다.
‘그렇다고 날개를 쓰자니 아직 활용법이 그다지 능숙하지 않아.’
내가 곧장 롬을 바라보았다.
“롬. 네 에고 소드를 사용해서 바깥으로 순간 이동할 수는 없겠냐?”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롬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고소드가 붉게 빛나며 소리쳤다.
-말했잖아. 이동기 마법은 아직 대기시간이 일주일은 남아 있다니까!
제기랄, 그랬었지.
방금까지 전생에 다녀온 터라 지금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간신히 전생까지 다녀와서 두 사람을 구했는데, 여기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죄다 말짱 도루묵 신세다.’
그때 아기 로크가 황제에게 졸렸던 목을 매만지며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나갈 방법이 있어.”
“뭐? 그게 뭔데, 빨리 말해!”
“왜 멍청하게 묻지? 넌 내 날개를 훔쳤잖아. 내가 몰랐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내가 날개로 여기 이 인원을 다 데리고 나가라고?”
내가 황당해하며 짜증을 내자 아기 로크가 답답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의 날개라면, 시공간을 찢어서 바깥까지 이동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지금 다시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불가능하지만, 넌 가능하겠지.”
그러고 보니 갑자기 떠올랐다.
청색대륙에서부터 바다를 건너올 때 로크에게 배가 납치당했던 순간.
그때 우리는 무려 수 분 만에 넉 달 남짓한 장거리를 뛰어넘었었다.
‘어쩌면 나도 그게 가능할지 몰라. 대형괴조의 날개를 훔쳤으니까.’
“내가 가고 싶은 델 떠올리라고?”
내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갑자기 물으니까 머릿속이 꼬인다.
거기다가 자칫 실수하면 완전히 엉뚱한 장소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퀸소히니베가 다급히 재촉했다.
“지금 시간이 없다는 것이야!”
롬이 윽박을 질렀다.
“너는 죽게 될 것이다!”
품에 안긴 카티에가 신음하였다.
“히끄으으……!”
다들 예민하게 재촉하니 나도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개 같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완전히 무너져가는 미궁 속에서.
훤히 펼쳐진 날개가 희게 빛났다.
***
“역시 회귀를 하면 머리 한구석이 멍하네요. 지금은 121회차인가요?”
“인간소리를 하렴.”
“무슨 생뚱맞은 소리예요, 대장?”
“네가 개가 아닌데 개소리를 하니까 그런다. 인간이니 인간소리해.”
카티에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놀랐다.
“……왜 내가 살아 있어요?”
“설명하자면 길고, 내 삶은 짧아.”
나는 피로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침대에 파묻힌 카티에가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메마른 사막의 풍토에서도 소신 있게 벼농사를 연구하는 밥집.”
“……갑자기 뭔 뜬금없이 밥집?”
“나한테 묻지 마라. 괴로우니까.”
난 침울히 얼굴을 손으로 비볐다.
무너지는 미궁 속에서 내가 진심으로 가고 싶었던 곳은 밥집이었다.
‘무의식중에 쌀밥이 먹고 싶었나.’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좋아하는 쌀밥 못 먹은 지도 꽤 오래되긴 했지.
“그나마 여기 주인이 착하더라고. 우리가 쉴 곳은 마련해 줬으니까 말이야. 하여간 정신 차려 다행이다.”
“헤르탄은요?”
“너보다 일찍 일어났어. 방금 바깥 공기 쉰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럼 어서 나가봐요.”
“지금?”
카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둘이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쉬고 있을게요.”
하여간 예리하기는.
난 일어나 그녀의 머리맡에 찬 수건을 올려다 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사막의 건물이라지만 저녁 시간대가 되자 쌀쌀하고 입술에 모래가 꼈다.
헤르탄은 노후한 옥상에서 무애한 눈빛으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르탄.”
그가 나를 천천히 돌아봤을 때.
“왜 그러십…….”
짜악!
내가 그의 뺨을 때렸다.
헤르탄은 잠깐 멈칫했지만 돌려진 고갤 돌이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제가 전에 때렸던 것을, 지금 되돌려주시는 겁니까?”
“아뇨. 그냥 한 대 패고 싶어서.”
“…….”
헤르탄은 고개를 돌렸다.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번 싸움에서 깨달았어요. 나는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헤르탄도, 카티에도, 퀸소히니베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번 회차에서.”
헤르탄은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오묘한 표정을 짓는 회귀자를 향해서 내가 말하였다.
“사람에 대한 집착은, 회귀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범철.”
한참 침묵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울어도 되겠습니까?”
“뭘 물어요. 이미 흐르는데.”
“그렇군요.”
헤르탄은 뺨에 손을 짚었다.
그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울고 있군요.”
“피해줘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손으로 가려진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끝에서 희미하게 낮고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대를 모시길 잘했습니다. 범철.”
……나야말로.
***
두 사람이 깨어났다고 하자 누군가가 가장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다.
단숨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녀는 어젯밤에도 한숨도 자지 못하였다.
“꽤나 다급하게 들어오네요? 내가 죽지 않아서 실망이라도 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퀸소히니베가 부르튼 눈으로 카티에를 껴안았다.
“언니!”
순간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카티에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퀸소히니베는 스스로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 다급히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그, 그게. 콜록!”
결국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야!”
그녀가 그대로 창문을 부수며 날아가 버렸고, 헤르탄은 담담히 말했다.
“밥집 주인에게 수리비 청구해 놓겠습니다.”
난 고개를 젓고 그녀를 돌아봤다.
“카티에.”
“왜요?”
“가지 마. 내가 이뤄줄 테니까.”
“뭘요?”
나는 회귀자들을 붙잡아둘 것이다.
삶을 반복하며 감정이 마모된 인간이면, 누구나 원할 그것을 이뤄줘서.
“너희들이 그토록 바라온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