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82화
백치가 아닌 롬은 처음 보았다.
비록 120회차보다 늙은 데다 모래에 얼룩졌지만, 머리칼의 모양새와 옷차림은 훨씬 단정하고 깔끔했다.
‘백치였을 때조차 롬은 강력했다.’
거물이자, 불세출의 검사인 사내.
그러나 백치라는 페널티 탓에 그 강인함이 얕아진 면이 없지 않았다.
백치였을 때도 전투력이 몸에 배어 있던 롬이, 하물며 제정신일 때 얼마나 강할지는 설명할 것도 없다.
“지금 연옥계 마수를 사냥하려는데, 네가 필요하다. 함께 행동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급하는 어쩌든 볼일이 있다면 화장실이나…….”
“나는 왕이다.”
내가 천천히 손으로 검을 휘두르자, 건너편 모래언덕이 파쇄됐다.
콰자작!
“…….”
롬은 황당해하며 무너진 언덕을 보다가 검과 방패를 쥐며 끄덕였다.
“난 싫지만, 나의 무구들이 끄덕이고 있다. 절대 네가 가진 힘이 무서워서 네 말을 따르는 것은 아니야.”
이렇게 나이 먹은 세 남자가 사막을 걷게 되었다.
난 세어버린 흰 머리칼을 긁었다.
“그래서 그 연옥계 마수란 놈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확인된 바에 따르면 세상에는 연옥계 마수가 세 마리 있습니다.”
“그중 가장 약한 녀석이 뭡니까?”
“마침 적색대륙에서 서식합니다. 새끼를 많이 낳는 늑대형 마수라더군요. 피에 젖어 광분하여, 국가 두 개를 멸망시킨 전적이 있다 합니다.”
“……가장 약한 놈을 물었는데요.”
“가장 약한 마수입니다. 다른 두 몬스터는 악마와 거미인데 각각 다섯 개 국가를 궤멸시켰다 합니다.”
“…….”
하여간 우리는 가장 약한 연옥계 마수가 거주하는 장소로 향하였다.
***
난 위험한 붉은 사막을 바라봤다.
“흐음.”
“캬구르릭!”
사막 고블린이 흠칫하며 내 눈을 피하려다가 제 발에 걸려 엎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 눈빛만으로 고블린에게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시켰습니다!]
나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터졌다.
‘눈빛만으로도 몬스터가 죽다니.’
어지간한 잡졸 따위는 내가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눈빛에 사망했다.
그야말로 세계최강의 반열에 올랐다는 회귀자의 왕다웠다.
[하품을 하였습니다.]
[끔찍할 만큼 위압이 드높은 강자의 존재감에, 붉은 사막의 하급 몬스터 출현율이 70% 급감합니다.]
[선술집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7회나 박수를 내리 쳤습니다.]
[최하급 사막도마뱀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였습니다!]
‘이건 뭐, 숨쉬기만 해도 알아서 몬스터들이 터져나가는구만.’
그저 내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일인군단이 거동하는 수준이었다.
‘괜히 120회차에서 불멸아귀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지.’
전성기 나의 일격으로 빈사의 대륙지배자를 죽이지 않았었던가.
나는 다시금 확인했다.
“능력치 창.”
이름: 이범철
칭호: 회귀자의 왕, 불을 내뱉는 사자의 주인, 무한히 탈태하는 자를 정화한 삼총사, 밥 짓기 명인…….
보유재능- 검술(SSS).
힘: 3,485 체력: 4,925 민첩: 3,221 마력: 1,811 행운: 1,993
*각종 장비보정을 받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 노쇠하였습니다.
*관절염과 각종 통증을 비롯한 노화의 페널티가 자주 일어납니다.
‘다시 봐도 능력치가 완전 미쳤군.’
120회차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괴물에 가까운 저력.
45회차의 난 검을 뽑지 않고도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를 뚜드려 패서 잡을 수 있는 수준의 능력치였다.
대륙최강자일 뿐만 아니라, 유일급 장비들을 두르고 있어서기도 하다.
‘이 정도면 그냥 검만 휘두르고 다녀도 어지간한 약소국가는 먹겠다.’
이게 그나마 늙어 약화된 거라니.
120회차에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
난 적당한 도시를 거칠 때마다 왕의 권력으로 인원을 즉시 보충했다.
“이곳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젊은 병사들을 데려가려고 한다. 특히나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있는 병사 위주로. 마땅한 보수는 약속하겠다.”
“……따르겠나이다. 왕이시여.”
[소도시 코란에서 312명의 척후병을 빌렸습니다.]
[무역도시 레튜알에서 1,582명의 정예병을 빌렸습니다.]
[상업의 영지 카에날에서 3,574명의 영주사병들을 빌렸습니다.]
[빌려 간 병사들이 사망할 시 해당 도시의 공헌도를 잃게 됩니다.]
강제로 빌려 가는 도시의 병력!
사막의 도시마다 충성도가 빠르게 줄었지만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현실로 돌아가면, 다시 올 일도 없을 텐데, 뭘.’
어느새 우리 셋을 따르는 병력만 해도 8,000명이 넘어가게 되었다.
8,000명의 회귀자 군단은 강인한 왕에게 충성하는 대규모 부대였다.
비록 45회차 회귀자라서 120회차 때보다 실력 면은 떨어지겠지만 수적인 물량 공세론 결코 뒤지지 않는다.
‘확실히 왕이 좋기는 좋군.’
이렇게나 병력을 손쉽게 모으다니.
하여간 내가 마침내 물었다.
“이곳이 마수가 사는 지대입니까?”
생명의 흔적이 없는 사막지대.
본래 태양이 작열해야 할 환경일 텐데 싸늘한 잿빛이 모래를 저였다.
“아직 밤이 되려면 꽤 멀었는데.”
“연옥계 마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햇살이 지게 만듭니다.”
빛이 없는 사막의 영역부터 출현하는 몬스터의 수준도 꽤 강력해졌다.
나의 눈빛에도 겁먹지 않고 울부짖으며 공격해오는 파충류 계열 괴물!
난 날카로운 눈으로 검을 뽑았다.
[검의 대제(Lv10)에 의해서 검의 공격력이 800% 증가합니다.]
[마검술사(Lv10)에 의해서 검의 속성이 최소 네 가지 중첩됩니다.]
[화염, 냉기, 유령, 전격 속성!]
서거억!
“깨갱!”
내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태산이 부서질 것처럼 사막이 갈라졌다.
모래언덕 하나가 파괴되기는 일쑤였고 괴물은 산산 조각나 부서졌다.
[우두머리 베컬을 죽였습니다.]
[수수께끼 비늘을 얻었습니다.]
[젊음의 힘을 3% 되찾았습니다.]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은 젊은 시기의 활력을 되찾는 데 중요했다.
여전히 칼을 휘두를 때마다 관절이 저릿저릿했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
‘최대한 빨리 젊음의 힘을 모두 되찾아야 해. 그래야 마수를 사냥한다.’
무모하게 싸울수록 나는 강해진다.
젊음의 힘을 빠르게 되찾으려면 마수의 영역에서 싸우는 게 최고였다.
사막군단은 사냥에 박차를 가했다.
헤르탄은 묵묵히 식물을 키워 날 지원했고, 롬도 괴물을 때려 박았다.
그리고 잿빛의 사막 깊숙한 곳에.
“크르르르…….”
마수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대체적으로 검은 늑대 같지만 눈알이 다섯 개나 되며 덥수룩한 갈기가 한 올마다 철심처럼 억세 보였다.
‘함부로 건드리면 엿 될 관상.’
하나 과업을 완료하려면 저 마수를 사냥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내가 검을 휘두르자 마수의 머리가 쪼개질 듯이 크게 흔들렸다.
[잠자는 마수를 공격했습니다.]
[첫 타격 데미지 3배!]
[혼돈의 마수가 깨어났습니다.]
[절대 피를 먹이지 마십시오.]
“크르르릉!”
마수는 일어났지만 머리뼈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금세 쓰러졌다.
헤르탄이 덩굴로 마수의 몸을 휘감고, 롬은 현란하게 이동하며 공격했다.
그러나 마수의 강모剛毛가 강철보다 딱딱해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아우우우우!”
마수가 울부짖자 수천 마리 새끼들이 여러 군데에서 소환이 되었다.
혼돈의 마수와 꼭 닮았으며 능력치는 부족할지라도 엄청나게 질겼다.
“완전 몬스터 부대잖아! 그냥 마수 한 놈만 상대하면 될 줄 알았는데!”
롬이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결계를 펼쳤다.
[‘왕의 결계’가 발동되었습니다.]
[피해가 상당 부분 줄어듭니다.]
[결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결계가 새끼 마수의 침범을 막았다.
워낙에 높은 능력치와 스킬보정, 장비의 저력을 한 군데로 집중했다.
쎄이이이익!
원거리에서 검을 휘둘러도 풍압이 날아가 마수를 사정없이 할퀴었다.
“절대 저놈한테 피를 먹이지 마라! 시체가 있으면 불로 태워버려!”
사막의 마법사 군단이 마수를 불태우고, 동시에 검으로 찢어버린다.
8,000명이나 되는 회귀자가 합공을 하자 마수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새끼 마수들은 까다로웠지만,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백이 죽었다.
[새끼 마수를 250마리 사냥했습니다.]
[젊음의 힘이 빠르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젊음의 힘이 돌아올수록 몸이 가볍고, 관절의 쇠약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와아아아아!”
“회귀자의 왕께서 앞장서신다!”
“철가면의 왕을 따라라!”
[몹시 위험한 전투에서 가장 높은 지휘권자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가장 선두에 선 철가면의 왕!]
[전투에 앞장서는 왕의 위용에 병사들의 사기가 200% 증가합니다!]
그렇게 대략 혼돈의 마수의 생명력을 순조롭게 깎아내고 있을 무렵.
갑자기 놈이 이상행동을 보였다.
‘……뭐지?’
자기가 낳은 새끼들을 으스러뜨려 깨물어 부수고 피를 보충하는 마수!
우리가 공격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수는 자기 새끼를 씹어서 삼킨다.
그나마 남아 있던 많고 많은 새끼 마수들이 전부 마수에게 잡아먹혔다.
“마수의 이상행동을 멈추게 해라!”
위화감을 느낀 내가 소리쳤지만, 상황은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아우우우우우!”
입가에 피를 묻힌 마수가 크게 울부짖자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2,000마리의 자기 새끼를 삼켜버린 마수가 동지들을 소환합니다.]
[세상에 현존하는 두 연옥계 마수가 소환되었습니다.]
[‘세상을 잘못 찾은 악마, 에테크랄’과 ‘미쳐버린 거미여왕, 궤넬’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뒤흔들 연옥계 마수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칭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법진이 그려진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커다란 생명체가 넘어왔다.
“크오아아악! 피 냄새가 잔뜩!”
날개가 여섯 장이나 달린 대악마.
손에는 위압적인 채찍이 들려 있다.
“샤크라르르르르르르!”
수십 개의 다리를 가진 연옥거미.
다리에는 척 봐도 위협적인 독액이 묻혀 있었고, 꽁무니에 강철보다 굵고 질긴 거미줄이 얽매여져 있었다.
분명 두 녀석 모두 용조차 뛰어넘는 파괴력을 가진 대형 몬스터였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재수 없게 마주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수준.’
연옥거미가 독액을 내뿜자 사막 회귀자들이 방패째로 녹아버렸다.
악마는 어떤 갑옷이라도 채찍으로 가볍게 찢어버리고 집어 삼켜버렸다.
‘제기랄, 이런 게 어디 있어?’
일부러 가장 약한 마수를 잡으러 왔는데, 나머지 마수까지 모이다니.
어째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세 마리의 연옥계 몬스터가 날뛰며 회귀자 군단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으아아악!”
“이, 이놈들을 대체 어떻게 이겨!”
하나만 출현해도 대륙이 난리가 나는 통에, 대형마수 세 마리가 날뛰자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연옥이었다.
어느새 내가 데려온 병사들 중 5,000명이 넘게 사망하고 말았다.
절반이 넘게 줄어드는 나의 병력!
‘세 마리의 마수가 날뛰고 있으니 지금 재정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 포기하면 그저 전멸뿐!
나는 늑대마수를 노려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말하였다.
“굉장해. 하지만 여기서 지원군을 부를 수 있는 건 너만이 아니거든.”
나는 품에 있던 푸른빛의 마석을 꺼내어 손에 쥐고서 깨뜨려 버렸다.
[마나농축의 마석을 깼습니다.]
[현재 소유한 모든 마나를 소모합니다.]
[대륙 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마석으로 계약된 인물을 소환합니다!]
그러자 허공에 포탈이 소환되어 익숙해 보이는 인물이 바로 넘어왔다.
“일레아흐!”
“준비하느라 회귀할 뻔했습니다.”
상처투성이인 그녀가 한숨 쉬었다.
포탈을 타고 온 일레아흐의 뒤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따라 서 있었다.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싸우던 롬조차 멈칫하며 놀랐다.
“저, 저들은…… 설마……?”
바로 그랬다.
회귀할수록 강해지는 선택받은 자.
‘비록 120회차에서는 전부 내 손에 살해당했지만.’
45회차의 전생에서는 달랐다.
거물의 신분을 뜻하는 여섯 개의 별이 달린 육성기가 높이 펄럭인다.
“자, 이제.”
멸살군주, 창천의 여제, 범파 교주 이랑, 철파 교주 화비, 그리고 황제.
마지막으로 롬까지 포함한 여섯 거물이 모두 이곳 한자리에 집합했다.
내가 120회차에서 직접 죽였던 악인들을 향하여 싱긋 미소를 짓는다.
“옛일은 잊고 함께 싸워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