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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79화 (179/200)

나만 1회차 179화

은밀한 본심을 들키면 당황스럽다.

설령 매사에 늘 침착한 헤르탄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금 그가 보이는 약간의 틈, 단지 그것뿐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

“사과는 120회차에서 하겠습니다.”

내가 가볍게 돌아서며 말했지만, 헤르탄은 나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콰직!

이미 레샬피티에의 아가리가 그의 몸통 절반을 씹어버린 뒤였으니까.

[제1반란군장을 제압했습니다!]

[제1과업을 달성했습니다.]

제1과업 달성!

헤르탄이 레샬피티에한테 잡아먹혀서 제1과업은 완료하게 되었다.

‘그나마 평행우주니까 다행이지.’

진짜 전생의 헤르탄이었으면 제압하는 게 조금 망설여졌을지 모른다.

‘하여간 두 번째 과업만이 남았다.’

일행과 친밀해지는 것.

그것만 마친다면 나는 떠나가는 카티에의 영혼을 붙잡아둘 수 있었다.

‘저 네 명과는 벌써 꽤 친밀한데.’

포그돈, 틴, 글래스, 세베켈과는 이미 충분한 호감도가 쌓여 있었다.

“크하핫! 역시나, 일낼 줄 알았지!”

“……보통내기는 아니군. 과연.”

“전장을 뒤덮는 마법 좀 봐! 지금 까지 이런 실력을 숨겨왔던 거야?”

“이만하면 대장으로 인정해줄 만하네. 내가 버리고 갈 일은 없겠어?”

[용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제1반란군장을 제압했습니다.]

[카티에를 뺀 용병대 4인은 당신을 믿음직한 대장이라 여깁니다.]

[용병대 4인과 제2과업을 완수할 만큼의 호감도가 쌓였습니다.]

날 우러러보는 네 명에게서 고개를 돌려, 어두운 표정의 소녀를 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카티에야.’

다른 네 명과 달리 그녀의 호감도는 여전히 그다지 높지가 않았다.

‘내가 미래 회차에서 왔단 걸 밝혔으니, 그에 대한 거부감이 있겠지.’

머리가 비상한 그녀이기에 내가 레샬피티에를 불러왔단 사실도 안다.

그녀와 호감도를 최대로 올리기 위해 획기적인 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카티에와 호감을 쌓는 최상의 길.

이미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까.

‘목숨을 바쳐, 그녀에게 희생한다.’

본래 21회차에서 내가 사망하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 바로 단서였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것도 그랬다.

‘내 목숨을 희생해서 입증해야 해.’

카티에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는 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천천히 친밀해지는 방법도 있지만, 역시나 가장 확실한 것은 희생이다.

“크라아아아아아!”

분노한 레샬피티에가 폭주한다.

반란군 이외에도 용의 반경에 있는 사람은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용의 활동에 상처 입은 용병을 치유하던 카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앗!”

용의 꼬리가 땅을 때리자 주변의 대지가 크게 흔들렸다.

21회차인 그녀가 넘어져 버렸다.

카티에의 뒤편에서 발톱이 난입할 때.

“피해!”

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머리맡에 발톱이 날아든다.

칼을 올려쳤지만, 피가 터졌다.

“안 돼!”

카티에가 목청껏 불렀지만, 흙먼지에 파묻혀버린 난 대답하지 못했다.

“대장! 대장! 괜찮아요? 지, 지금 당장 내가 상처를……!”

21회차 평행세계에선, 처음으로 그녀가 나를 대장이라고 불러주었다.

그녀가 어떻게든 치유하려 했지만, 엎고 엎히는 전장은 북새통이었다.

흙먼지가 자욱해 날 찾지 못했다.

“…….”

온몸에 피가 범벅이 되었다.

땅에 왼쪽 눈알이 철퍽 떨어졌다.

아프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건 카티에도 마찬가지다.

“카티에.”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티에는 다급히 이쪽을 보았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어 보였다.

“다음 삶에도, 나를 찾아와줘.”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입술을 씹고 눈물을 쏟는 21회차 카티에였다.

[목숨이 걸린 위기 속에서 카티에와 충분한 호감도를 쌓았습니다.]

[두 번째 과업을 완료했습니다.]

[21회차의 모든 과업 달성!]

[명계로 떠나가는 카티에 로넬야드의 영혼을 강제로 붙잡습니다.]

[현실로 귀환합니다.]

***

‘후, 살았네.’

어느새 시간이 멈춰진 원래 세상에 돌아온 나는 후련한 한숨을 뱉었다.

축축한 피를 일부러 묻히고 표정 관리하며 감정 잡느라 죽을 뻔했다.

시체로부터 주웠던 남의 눈알이 손에서 전생의 광경과 함께 사라졌다.

‘다치지 않았는데 연기하느라 혼났네. 아무리 그래도 눈알은 좀 너무했어. 조금만 더 있으면 들켰겠지.’

실제로 레샬피티에한테 밟히는 척을 했을 뿐, 몸은 스쳤을 뿐이었다.

그나마 흙먼지로 사방이 흐리지 않았다면 금세 들키고 말았을 거다.

‘내가 무슨 백마 탄 왕자님도 아니고. 유치하게 뭘 진짜 목숨을 바쳐.’

연기가 들키기 직전에 호감도가 쌓여서 과업이 완수되어 다행이었다.

‘하여간에.’

나는 서둘러서 현실의 120회차 카티에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카티에의 심장박동이 커지더니 놀랍게도 상처가 깨끗이 낫고 있었다.

옷깃에 깃든 핏자국도, 핏방울도 살갖으로 깔끔히 돌아가고 있었다.

‘카티에의 신체 시간이 멀쩡하던 순간으로 되돌려지고 있는 건가?’

시간의 돌이 이뤄내는 기현상!

분명 카티에의 기적으로도 치유하기 힘들 중상이었는데, 흐트러진 상흔과 핏물이 모두 나아가고 있었다.

‘다행이야. 일단은 한시름 놨어.’

아직 헤르탄의 영혼이 남았지만, 그래도 일단 주저앉고 한숨을 쉬었다.

카티에의 생명이 나아가는 와중에, 그녀의 전생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

22회차 극 초반.

전장에서 사망한 카티에는 회귀하자마자 익숙한 술집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에 앉자 그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기야 회귀를 하지 못하니까.

그러나 카티에는 상관하지 않았다.

“지켜줄게요.”

참으려 했지만, 참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

“이번엔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그 남자는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니까, 나를 지키지 마세요.”

그리고 카티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울보가 되어버릴 것처럼.

‘지켜낼 거야. 지켜내겠어. 반드시.’

처음에는 단순한 의무감이었으나.

삶을 함께하며 감정은 깊어졌다.

마침내 카티에는 자기가 미치지 않기 위한 모든 삶의 목표를 정했다.

눈앞의 남자, 범철을 지키겠노라고.

***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빠르지만, 아주 간략하게.

지금껏 카티에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나의 눈앞을 스쳐 가고 있었다.

31회차.

범철에게서 검술을 배워보았다. 뭐든 빨리 배우는 그녀였지만 그다지 적성에 맞지는 않았다. 검은 그냥 때려치우고 그를 꼬드겨 함께 잤다.

40회차.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카티에는 제3용병대를 다시금 소집했다. 전쟁이 끝나도 그들의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회귀를 멈추는 걸 목표로 이후로도 함께 여행했다.

45회차.

회귀자의 왕을 보필하여 평생을 바쳤다. 세 대륙을 제패했다. 세계제일의 반열에 오른 그의 품에 안겨 카티에는 행복한 꿈을 꾸었지만, 기적을 너무 써서 일찍 죽음을 맞았다.

57회차.

흑마법에 귀의해 스켈레톤이 됐다. 일행이 전멸해도 생존했다. 범철의 시체를 리치로 되살려 함께 잤다.

68회차.

성녀로서 끝없는 기도 끝에 마침내 범철의 성감대를 모두 파악했다. 그리고 처음 그가 밤에 우는 걸 봤다.

‘…….’

황당함을 삼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카티에의 삶들을 축약한 영상이 나의 머릿속으로 파도처럼 밀려온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전생을 보게 되자 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멀미 나겠네. 젠장.’

피곤한 눈을 감았다가 뜨고, 관자놀이를 꾹 누를 때였다.

불현듯 조금 특이한 삶이 보였다.

‘83회차.’

그 삶에서 카티에는 놀랍게도 처음 보는 여인과 함께하고 있었다.

‘뭐지, 저 여자는?’

카티에는 이제껏 저런 미녀를 동료로 두고 여행한 삶이 전혀 없었다.

절세미녀란 단어가 어울리는 풍모.

내가 지금껏 보아온 어떤 사람보다 가장 출중한 미모를 지닌 여성이다.

카티에는 미녀의 손을 잡고 나와 있을 때만큼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매력만을 따지자면 퀸소히니베도 넘는데? 아주 보기 드문 인상인걸.’

그러나 그 절세미녀의 정체를 추측해보기도 전에 그 전생은 지나갔다.

‘아쉽네.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그리고 이어서 다음 삶이 보였다.

87회차.

범철이 다른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기에 카티에는 웃으며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축하했다. 그리고 늘그막, 둘이 이혼했을 때 범철과 재혼해 함께 잤다.

98회차.

회귀를 멈추더라도 과연 모든 일이 잘 풀릴까? 카티에는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 극한까지 쌓은 기적의 힘은 폭주하였다. 그녀가 세상의 인류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너무나 뒤늦게 깨달았다. 함께할 수 있는 범철이 없단 걸. 자살해 회귀했다.

108회차.

원수에게 범철의 사지가 절단되었다. 예전에도 있었던 일이라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지극정성으로 그를 곁에서 간호하며 함께 자곤 했다.

114회차.

저주를 받고 서큐버스가 됐다. 그리고 인큐버스가 된 범철을 복상사시켰고, 만족하며 자신도 자살했다.

119회차.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정. 그리고 범철을 지키겠다는 의지. 카티에는 그 모든 게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그럴수록 회귀를 멈춰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이대로 가면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가 미쳐버릴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녀는 일행과 함께 백룡에게 전멸당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버림받은 120회차.

카티에는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대장…… 흐음…….”

나는 구슬픈 표정으로 침을 흘리며 회복되어가는 카티에를 내려다봤다.

‘대체 얘는 나랑 몇 번을 잔 거야.’

카티에의 숨겨져 있던(?) 과거를 직접 눈으로 보니 참 기가 막혔다.

‘하여간.’

떠나가는 카티에의 혼을 붙잡았다.

그녀가 완전히 회복되면 헤르탄도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겼지만.

[헤르탄의 영혼이 명계로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인 위기상황입니다.]

[다음 지켜볼 인물의 전생을 택하여 가슴 위에 손을 얹어주십시오.]

안타깝게도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헤르탄의 전생이다.’

나는 그의 피에 젖은 널찍한 가슴 위로 손아귀를 올렸다.

[‘헤르탄’의 삶.]

[1회차, ‘백작가의 사생아.’]

[지금부터 ‘헤르탄’의 모든 전생을 지켜봅니다.]

***

헤르탄.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성은 없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이었다.

‘누군가, 내게 뭐라도 정해줬다면.’

그런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백작가의 사생아로 버려져 길거리에서 자라나며 헤르탄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바로 ‘냉철함’이었다.

‘그 어떤 때도 차분한 게 최고군. 그래야 빵이라도 한 개 더 먹지.’

길거리 꼬마들 사이에서도 헤르탄은 유별난 눈빛을 가진 아이였다.

어린아이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해서 오히려 기분이 나쁠 만한 눈빛.

그건 아버지인 백작을 닮아서였지만, 아직 헤르탄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성인이 되자 헤르탄은 머리가 굵어지고 세상 보는 눈이 밝아졌다.

‘썩었어.’

헤르탄의 단편적인 평가였다.

황색대륙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는, 참 역겹게도 썩어 있었다.

그런 썩은 세상을 청결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성년의 헤르탄은 깊게 생각해보았다.

‘위가 바뀌어야 해.’

간단한 결론.

‘그래야 아래도 바뀌겠지.’

재빠른 판단.

헤르탄은 반란군에 자원했고, 빠르게 행동과 임무를 개시하였다.

냉철한 판단력과 결연한 행동력을 가진 그가 반란군의 일정지위까지 오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1급 수배범이 되어 산채를 짓고 산적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새 왕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헤르탄은 무엇도 망설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마지막까지 활동하던 그는 왕국군 술수에 제압당해 죽고 말았다.

그것이 첫 번째 삶이었다.

[2회차, ‘되살아난 열망.’]

헤르탄은 되살아났다.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모든 이가 회귀한 것도 깨달았다.

‘후회를, 바꿀 수 있다.’

재시작했으나 당황하지 않았다.

미칠 이유도, 흔들릴 시간도 없다.

그에겐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새로운 왕을 만들겠다. 모두가 회귀하여 다시금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민중을 살피는 진정한 왕을.’

***

카티에의 경우와 대략 비슷했다.

회차가 지날수록 그의 눈빛은 열망에 불타기도 했고, 좌절을 겪기도 했으며, 환희로 빛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감정은 마모되어간다.

계속해서 헤르탄의 전생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45번째에서 멈추었다.

‘45회차? 여기서 과업을 하라고?’

분명 45회차라면 내가 ‘철가면의 왕’으로 활동했던 최강자 시절이다.

모든 전생을 통틀어서 회귀자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했던 삶이 아닌가.

‘설마 내가 그 45회차를 직접 경험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탄과 당신이 가장 깊은 인연을 맺었던 회차로 이동합니다.]

[45회차: ‘회귀자의 왕.’]

[해당 삶에서 과업을 완료해야 떠나가는 영혼을 잡을 수 있습니다.]

***

깨어나자, 고급스러운 침대 위였다.

주름진 안면에 쓰인 철가면.

모든 회귀자를 다스리는 왕.

정점에 군림하였던 나의 45회차.

그런데…….

“쿨럭! 퀘엑!”

기침을 하자 피가 토해졌다.

목이 찢길 것 같고 관절이 떨린다.

“끄으으…….”

나는 뼛속까지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얼굴 위의 철가면을 만졌다.

‘……분명 내 전성기가 이때 아니었나? 몸이 왜 이렇게 약해빠졌어?’

[45회차에 당도하였습니다.]

[해당 전생은 본래 45회차 당시의 능력치, 소지품이 유지됩니다.]

[현재 당신은 임종 직전입니다!]

나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기껏 최강자였던 회차로 왔는데, 하필이면 늙어 뒈지기 직전이라니!’

흉터랑 근육을 봐선 몸이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관절이 끊어지겠다.

내가 신음을 흘리면서 일어나려고 애쓰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전하. 기상하실 시각이옵니다.”

철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라서, 밖으로 나가는 목소리가 전혀 달랐다.

“들어와.”

웬 할머니가 들어왔다.

흰 머리칼을 곱게 틀어 올린 할머니는 노년의 멋스러움이 충만했다.

그 할머니가 걸으려고 애쓰는 나를 보며 주름지게 픽 웃고 말았다.

“업어드릴까요, 왕이시여?”

아무리 그래도 같은 노인한테 그런 부축을 받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괘, 괜찮…….”

혼자서 걸으려다가 엎어질 뻔한 나를 할머니가 재빠르게 받아주었다.

할머니는 이런 나와는 다르게, 딱히 관절이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다.

용케도 근육이 비대한 날 업었는데 주춤하는 기세도 없이 잘 걸었다.

“이름이 뭐지?”

“그새 잊으셨습니까?”

“늙어서 치매가 왔다고 생각해줘.”

어쩐지 마음이 잘 통하는 느낌이 들어서 난 괜스레 농담을 내뱉었다.

그녀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담은 아니시길 바랍니다. 정 그러시면 첫인사를 다시 해볼까요?”

예스러운 할머니가 호쾌하게 말했다.

“아로즈 호칼바니 드 그라프 앙팡송.”

불현듯.

나는 그녀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저, 아로즈라고 불러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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