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76화
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저게 헤르탄이라고?’
전생이라고는 하나 그는 내가 아는 120회차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항시 맨손을 사용하던 현실과는 다르게 폭풍처럼 휘두르는 해머는 용병들을 내찢는 화신 그 자체였다.
“저, 저 개자식이!”
“마법이나 화살! 멀리에서 공격하라고 이 머리 나쁜 용병 새끼들아!”
왕정 장교가 노호해 소리쳤지만 헤르탄은 덩치에 맞지 않게 재빨랐다.
회귀자의 화살이 여러 번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발걸음은 빨라졌다.
21회차 제1반란군장 헤르탄은 혼자서 칼과 마법을 뚫으며 돌격했다.
“이, 이 자식!”
왕정 장교가 뒤늦게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해머가 내려쳐진 뒤였다.
콰작!
헤르탄의 해머가 왕정 장교의 대갈통을 무참히 깨부숴 버렸다.
“크억!”
“자, 장교가 당했다!”
“저 자식을 죽여 버려!”
뒤늦게 호위가 재빠르게 달려왔다.
하나 헤르탄은 스크롤로 추정되는 용지를 찢으며 귀환해 버렸다.
결국은 아무도 그를 잡지 못했다.
“젠장. 저놈이 소문으로나 들리던 그 제1반란군장이란 놈이야?”
포그돈이 헤르탄에게 밀려서 넘어졌던 몸을 일으키며 눈을 찡그렸다.
“그래, 너 같은 곰이 밀린 걸 보면 저 자식도 제 몫 단단히 하나 본데.”
세베켈이 히죽대자 포그돈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 지금 나 보고 곰이라고 했냐?”
“돼지보다는 낫잖아?”
“어, 그러네?”
“너, 진짜 돌대가리냐.”
글래스가 지친 듯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지쳤어. 오늘은 이만 쉬고 싶어.”
나도 동감이다.
거기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한 참이다.
***
밤이 되어 모닥불이 타닥인다.
‘설마 21회차에서 제압해야 할 제1반란군장이 헤르탄이었을 줄이야.’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조금 당황스럽다.
‘헤르탄이 전생에서 반란군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틴이 차가운 얼굴로 짜증을 내며 피가 흐르는 팔뚝을 걷어 보였다.
“이봐, 뭘 보고만 있어? 성녀라고 했잖아. 얼른 치유해 줘야지.”
“아…… 네. 알겠어요.”
21회차의 카티에는 차가운 성격이었지만, 확실히 120회차보다는 미숙하고 어수룩한 일면이 있기는 했다.
‘하기야 서로 거의 100회차의 경험 차이가 나니까.’
120회차 카티에라면 말하지 않아도 일행의 부상부위를 깨끗이 치유하고 오염을 정화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미숙하지만, 그래도 인원은 잘 모은 것 같아요. 오늘 전투만 봐도 그래요. 다들 너무 잘해줬어요.”
첫 전투인데도 우리 용병대는 기묘할 만큼 호흡은 잘 맞는 편이었다.
다들 천부적인 소질이 있고 합을 맞출 줄 아는 능력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나랑 120회차까지 함께 일행으로 생활한다니.’
예전부터 계속 궁금했었다.
도대체 전생의 나는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했을까?
어쩌면 난, 이곳 평행세계에서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여간 과업을 완료하려면 이 녀석들과도 친해져야 하는데.’
모닥불을 피운 불가는 얘기를 나누거나 친목을 다지기 안성맞춤이다.
가장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바로 포그돈이었다.
솔직하고 유쾌한 성격인 그는 강한 녀석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고 봤다.
“그 제1반란군장이란 놈. 보통 녀석이 아냐. 내 방패를 밀어내다니.”
낮에서의 싸움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지 포그돈은 입맛을 다셨다.
“낮의 싸움이 마음에 걸렸나 봐?”
“딱히. 하지만 또 죽을까 봐 엄청나게 무섭기는 했었지. 이번 삶에서는 꼭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
포그돈은 호전적이지만 쓸데없는 자존심은 챙기지 않는 편이었다.
내가 짐짓 관심 있는 체하며 물었다.
“이번 삶에서 가고 싶은 곳?”
“혹시 너, 적색대륙에 가보았어?”
포그돈의 질문에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가보기는 했어. 사막이 넓고 랍비들이 배회하는 대륙이었지.”
거기다 웬 사막드래곤과 재능 뺏는 마술사를 만나 죽을 뻔하기도 했고.
“하! 거기 사막은 정말로 붉어? 나도 가고 싶은데 줄곧 못 갔거든. 어디 보통 먼 곳이어야 말이지.”
포그돈은 곧장 신이 나서는 떠벌떠벌대며 항상 적색대륙에서 가고 싶었던 장소에 관해서 떠들어대었다.
의외로 낯선 사막에 순수한 동경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포그돈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포그돈은 지금부터 당신을 낭만을 사랑하는 동료로 여깁니다.]
역시나 포그돈은 친밀해지기 쉬운 성격이었다.
‘일단 포그돈이랑은 금방 친해질 것 같고.’
그다음으로 나는 상당히 성격이 까다로워 보이는 틴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좀 친해지기 어려워 보이는데.’
깡마른 소년인 그는 내게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단검만을 닦았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냐?”
“꺼져. 지금 지쳤으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살의가 담긴 눈을 그를 흘깃 노려보았다.
《틴 워커》
설명: 거렁뱅이 출신으로 평생을 도적으로 살아온 21회차의 회귀자.
*고급감정(Lv3)을 사용해 대상에 대하여 조금 더 정보를 입수합니다.
+암살과 절도에 미친 솜씨를 가졌다. 도적길드의 수장 시궁쥐 튜크에게 은밀히 배운 기술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모두 비밀로 하고 있다.
‘회귀자 살해 재능.’
이것만 이용하면 회귀자의 간략한 정보를 대충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걸 쓰면 호감도를 올리기에 좋은 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가 있지.’
남과 친해질 때 가장 편한 방법은 공감할 수 있는 요소를 찾는 거다.
거기다 때마침 틴의 정보에는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 적혀져 있었다.
내가 남몰래 그에게만 속삭였다.
“이봐, 틴. 시궁쥐는 잘 지내냐?”
단검을 닦아대던 손수건이 멈췄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나는 그저 싱긋 웃어 보였다.
시궁쥐 튜크!
도둑길드의 수장 이름 아니던가.
‘내가 그 이름을 왜 모르겠어.’
지금은 벌써 옛일처럼 까마득하지만, 한때 난 도둑길드와 힘을 합쳐 황색대륙 지배자를 죽이기도 했다.
“네가 쓰는 기술이 딱 그놈 거던데. 자기 도벽을 치유하려고 스스로 시궁창에 갇혀 사는 양반 아니야?”
“놀랍군. 그분은 내 스승님이시다. 나에게 모든 기술을 가르쳐주었지.”
틴은 모처럼 자기 스승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에 놀랐지만,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틴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틴은 당신을 도적에 관해서 뭘 좀 아는 용병으로 인식합니다.]
‘좋아. 이 녀석도 괜찮고. 생각보다 재밌는데?’
정확히 단서를 파악하고 호감도를 올리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했다.
그다음으로는 글래스를 보았다.
동글동글한 안경을 착용한 그녀는 쉴 때조차 책을 보며 투덜거렸다.
“세상에서 책 읽기가 제일 싫어.”
“그런데 왜 읽고 있는 거지?”
“임지 않으면 실력이 녹슬거든. 그래서 연금술이 피곤한 길인 거야.”
이번에도 나는 살의를 담아서 그녀를 쏘아봤다.
《글래스 레이베르》
설명: 연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연금술사. 책을 싫어한다.
*고급감정(Lv3)을 사용해 대상에 대하여 조금 더 정보를 입수합니다.
+교역도시 모놀칸 시장의 후손. 비록 지금은 연금술의 길을 걷고 있지만, 경험이 쌓이면 선조를 따라 보물사냥꾼이 되려고 한다. 초대 선조의 눈동자를 은밀히 찾으려 하고 있다.
모놀칸이란 교역도시를 듣자마자 나는 괜스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120회차에서 창천의 여제를 피하며 내가 지났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너, 혹시 모놀칸의 눈동자를 찾고 있냐?”
내가 묻자 글래스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책을 덮고 나를 따로 불렀다.
“그 사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혹시나 알면 곤란할 테니까.”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호감도를 올리는 데 크게 도움 될 수밖에 없다.
글래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듯이 내게만 조곤조곤 속삭였다.
“난 꼭 초대 선조, ‘모놀칸의 눈동자’를 손에 넣고 싶어. 먹으면 특정 재능을 A급으로 만들어주고, 눈에 끼면 눈물은 흐르지만 환상적인 성능을 얻게 해준다고 들었거든! 몇 번을 회귀하게 되든 상관없어. 꼭 후손인 내가 얻어서 보관할 거야.”
내가 신뢰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꼭 찾을 수 있을 거다.”
그 눈동자, 별맛은 없을 테지만.
[글래스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글래스는 당신을 비밀을 공유하는 협력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내가 그나마 면식이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베켈.’
120회차의 초반.
네 사람 중 유일하게 나에게 이름을 밝히고 자신을 소개했던 미청년.
‘그리고 가장 먼저 자살했었지.’
어쩌면, 그가 가장 먼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120회차에 카티에 혼자만 남겨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살의를 담아서 그를 노려보았다.
《세베켈 라그로 날》
설명: 멋들어진 외모의 검사. 그의 자세한 기술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고급감정(Lv3)을 사용해 대상에 대하여 조금 더 정보를 입수합니다.
+과거, 오크들과 부딪힌 전적이 있다. 모든 오크를 증오하고 있다. 특히 안도니크란 이름의 오크 여전사에게 가장 극심한 복수심을 가졌다.
*고급감정의 레벨이 부족해 해당 인물 기술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를 보며 은근슬쩍 말했다.
“레카팔시다.”
“그 썩을 오크어를 왜 내뱉지?”
세베켈이 곧장 눈썹을 찌푸리며 반응해왔다.
레카팔시타는 오크어로 싸우거나 성교하다 죽으라는 극찬의 의미다.
나는 흘깃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흰 사슴뿔 부족과 만났을 때 배웠지.”
“흰 사슴뿔 부족? 그럼 설마 안도니크라는 여전사와도 만났었어?”
세베켈은 당장에라도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와서 잔뜩 흥분하였다.
“그래, 쓰레기 같은 녀석이었지.”
나는 적절하게 그의 말을 받아주며 오크에 관한 욕을 한바탕 지껄였다.
“오크들은 원시적이고 천박하지. 그저 딱 보기만 해도 회귀자와 적대하려고 태어난 놈들 같달까.”
“동감이야. 아주 못된 것들이지. 회귀를 멈추려는 목적만 아니면 내가 당장 놈들을 숙청해 버렸을 텐데.”
[세베켈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세베켈은 오크에 대한 증오심으로 당신과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역시 서로 친해지는 데는 뒷담만 한 게 없다니까.’
다들 호감도는 순조롭게 오르고 있지만, 아직은 인연이 부족하였다.
‘이만한 수준으론 아직 안 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그리고 난 마지막 사람을 보았다.
그녀에게 살의를 갖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기에, 간신히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카티에 로넬야드》
설명: 이계에 현존하는 유일한 성녀. 아주 강력한 치유실력을 지녔다.
*고급감정(Lv3)을 사용해 대상에 대하여 조금 더 정보를 입수합니다.
+인간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수없이 많아 날이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다. 현재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는 중이다.
‘카티에는…… 좀 어렵겠군.’
냉소적이고 날이 선 그녀와 친해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비록 내가 그녀를 잘 알고 있더라도, 그건 120회차의 경우였으니까.
‘아직 120회차만큼 마모되진 않았지만, 그만큼 더 예민해 보이니까.’
일단 호감도 작업은 이 정도에서 끝내두고, 지금 문제는 헤르탄이다.
‘제1반란군장 헤르탄. 그를 제압하려면 일단 정보부터 파악해야 해.’
나는 불 가에 모인 일행을 향해서 말했다.
“제1반란군장. 그놈은 대체 뭐지?”
그러자 포그돈이 대답하였다.
“초창기부터 반란군 진영에서 날뛰던 녀석인데 아주 유명해. 회귀자 중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기로 손꼽혀 유명하다더군.”
“확실히 강해 보이긴 했어. 포그돈이 괴력에서 밀릴 정도였잖아?”
글래스의 말에 포그돈은 발끈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쉽게 인정했다.
“맞아. 덩치로만 보자면 나랑 맞먹지만, 뭐랄까. 싸움 실력 자체가 이미 비교가 안 돼. 부딪혀 보니까 알겠어. 그놈은 자기 덩치랑 힘을 아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놈이라고.”
틴이 단도를 닦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놈을 잡으면 높은 공적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겠군.”
카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1반란군장. 확실히 그를 쓰러뜨리면 우린 다른 용병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공적을 쌓을 수가 있어요.”
“그럼 1차 목표는 그놈인가?”
세베켈이 칼집을 만지며 말했다.
“후일이 기대되는걸. 상당히.”
***
우린 2주일 동안 전쟁을 계속했다.
내가 쓰러뜨린 회귀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용병들 사이에서도 나의 소문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였다.
“저 용병대, 요새 아주 유명하던데?”
“저 사내가 그 악명 높다는 용병대의 대장인가?”
“아직 신참에 불과한데도, 벌써 살해한 회귀자만 500명이 넘는대.”
처음엔 무명에 불과하던 우리 용병대는 점차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그렇게 21회차에 당도한 지 15일째가 되던 날.
‘계속 반란군 진영으로 깊게 들어가야 헤르탄과 조우할 수가 있다.’
우린 가장 깊숙이 적진에 침투했다.
내가 한창 반란군을 휩쓸고 회귀자를 척살해댈 때, 누군가 나타났다.
“이 영악한 회귀자 살해자 놈! 네가 죽일 제3반란군장이 여기 있다!”
눈에 띄게 걸출하고 큰 목소리.
반란군이란 위치답지 않게 오만한 중년이 나를 향해서 창을 빼 들었다.
그가 바로 제3반란군장이었다.
“네놈이 죽인 우리 형제만 수백이 넘어간다. 네놈 끝은 내가 내주마!”
흑마를 탄 반란군이 창을 휘두르며 돌격해오자 아군 수십 명이 죽었다.
그러나 놈이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
히이이잉!
난 몸을 숙여 흑마의 발을 잘랐다.
“크헉!”
그리고 난 천천히 걸어가 낙마한 놈의 목을 가볍게 따버렸다.
[제3반란군장을 죽였습니다!]
[반란군의 적의가 강해집니다.]
[적군 사기가 크게 줄었습니다!]
‘지금까지 딱히 어려운 적은 없군.’
당시 21회차의 나라면 제법 고전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주 쉽다.
하여간 그 제3반란군장이란 녀석을 죽여 버렸을 때였다.
[본래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전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작 15일 만에 본래 역사에서의 90일치 공적을 세웠습니다.]
[사건의 전개가 앞당겨집니다.]
[당신이 기존의 21회차에서 사망했던 구간에 도달하였습니다.]